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0:31-39 / 참 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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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참 신 2002년 7월 3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0:31-39
10: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10: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10: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10: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오늘 성경에 보게 되면 단번에 들어오는 느낌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 구태여 예수라는 존재를 개입시킬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을 개입시키기로 한다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하나님 믿어온 것이 모두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하나님 섬기는 것이 완벽하기 때문에 그 완벽함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추가적인 요소를 집어 넣을 이유가 없는 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즉 현재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정상적이라면 이 정상적인 신앙에다 구태여 추가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리까지 꼭 마련해야만 하는가 라는 점을 고려해 봐야 합니다.
그저 추가적으로 예수님 자리를 하나 마련해 드린다는 식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싫어하고 거부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독점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더 이상 그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끼어 들 위인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유대인들의 절대적 신앙심을 가지고 우리 자신들의 본심과 연결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 속의 신의 자리는 늘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에 대한 자리를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 교리라든지 어떤 신학이라도 이 타고난 본성을 거스려서는 납득이 가능치 않겠지요. 즉 신만이 홀로 영광받아야 한다는 정신을 그 어떤 이론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법입니다.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절대적인 사실에 흠집을 낼 주장이 있다면 이유막론하고 기피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특징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자처한다면 이런 유대인적인 요소가 극복이 된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만 신봉하겠다는 절대적 의지가 전혀 깨트려지지 않는채 그냥 추가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나선다면 이런 사람은 유대인들과 동일한 사람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이 끼어 들 자리가 마련되기 곤란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다시금 묻습니다.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되는데 왜 꼭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 믿는 것과 예수님 믿는 것이 충돌되는 게 아닐까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느꼈는데 우리들이 과연 그렇지 않다고 우길 수 있는 문제입니까? 정말 참 신앙이라는 그런가요 아니면 그저 예수님을 끼어넣기 식으로 믿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까?
저는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이 문제를 구약 욥기를 통해 이해를 구하려고 합니다. 욥기에 보면 욥과 3명의 친구가 나옵니다. 욥의 셋 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보면 참으로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주권적 관점에서 신앙적인 조언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적 신앙심으로 무장된 자라면 누구라도 그 욥의 세 친구의 주장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끝 자락을 보면 하나님의 평가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욥의 친구들은 욥보다 정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욥기를 거쳐오면서 욥의 친구들의 발언에 동의하면서 왔는데 최종 하나님의 평가가 정당치 못한 것으로 귀결되면 욥의 친구들의 생각에 동조한 우리들도 같이 정당치 못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명나고 마는 겁니다.
따라서 욥의 세 친국의 발언을 보면서 무엇이 잘못 되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욥이나 욥의 친구들에 있어 하나님과 그 주권성은 순전히 자기 자신의 행위와 처지와 연관시켜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 하시기를,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는 네가 아느냐?"라고 했습니다. 광야는 인간들의 밭이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인간들 편에서 볼 때 순전히 빗물을 낭비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별을 만들 때에도 인간은 없었습니다.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 인간은 거기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산 염소에게 새끼를 베개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욥과 세 친구들이 욥에게 난데없이 일어난 고난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모든 것을 평정시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가 관여한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찾고자 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욥에게 내려진 고난은 마치 광야를 비를 내리는 식과 같습니다. 빗물을 맞는 광야가 하나님보고 "하나님 왜 저에게 빗물을 내리십니까?"라고 물지도 않고 물어서도 아니되는 것처럼 욥의 고난도 같은 차원입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과 아픔과 고난을 주십니까?"라는 그런 물음 조차 고난 받는 욥이 해서는 않아야 될 질문입니다.
물론 나중에 욥은 스스로 자기 입을 가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항의하던 그의 입을 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절대적 진리처럼 간주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속성은 죄 지은 아담의 성품을 그대로 물러 받은 결과입니다.
죄 지은 아담과 그 후손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어디까지나 자기의 관계와 하나님 상으로 이해되게 마련입니다. 무슨 일이 발생되어도 그 일을 가지고 늘 상 하나님에게 묻게 되는 식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 왜 이 일은 성사되지 않는 겁니까? 왜 저 일은 갑자기 왜 터져 나왔습니까?"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관과 신앙이라는 것이 기껏 이런 식입니다. 욥이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 받을 만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조건하고 하나님께 빌고 의로운 행동을 해야만 그 고난이 해소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생각하기를, 아무리 따져도 자기보다 더 잘나지도 못한 친구들 보다 더 독한 징벌을 받을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욥의 친구들과 욥의 태도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이나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즉 "예수님, 왜 저의 가정에 시련을 주십니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을 대할 때 이미 자기 자신들의 자리에서 대하는 것이 확실하고 절대적인 진리이기에 이 자신의 자리를 예수님에게 빼앗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자기 자리를 갖고 하나님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엮어 자기만의 의미를 따로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일소해 버리고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치 광야에 비를 내리듯이 말입니다. 그 모든 인간과의 관계를 붕괴시키시고 구원을 인간과의 연결고리와 상관없이 일방적인 선물로만 가능케 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의 한 강도는 자신의 입장에서 출발해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이 정녕 메시야라면 당장 이곳 십자가에서 내려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이미 인간과 상의한 바 없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취를 위하여 오신 분인 줄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라고 합니다. 즉 이미 예수님의 나라는 일방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유대인들은 안믿고 안 받아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두고 일방적으로 다른 분을 자기 곁에 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시편 82:6를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의 신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시편 82:6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라고 불리워야 될 자들이 결국은 보통 다른 인간들처럼 망해버린다는 예언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유는, 모든 그 말씀의 본질은 오로지 예수님 자신을 겨냥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완벽한 참 신의 아들임을 보이기 위해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죽어가는 그들 곁에 참 신이신 예수님이 등장하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사정과 관련시켜서 하나님에게 짜증내지 맙시다. 진정한 신앙이란 우리 행위에 두지 않고 오직 예수님 오심이 곧 구원임을 아는 자입니다. 절대적 하나님만을 고집하는 자들은 자신의 행위과 관련시켜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을 고려해 볼 때 바로 그러한 생각 자체가 절대적으로 잘못된 하나님관임이 밝히 드러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할 입장이 못 됨을 알게 해주시고 예수님의 생명을 비같이 부여 받은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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