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 10:19-30 / 양 (목자의 음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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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양
2002년 6월 26일 51강
본문 말씀 : 요 10:19-30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우리가 성경에 볼 때는 그 성경의 현장에 우리들도 놓여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과연 우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 동조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24절에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확신하고 예수님에게 대들고 있습니다.
유대 인들이나 우리나 다같이 인간인 이상 어느 정도 같이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만고만한 수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메시야인 것을 분명히 밝히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했지만 너희들은 믿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웬지 양쪽이 서로 상대를 향하여 답답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가 이 다툼의 현장에 있다고 봅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가 옳다고 보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납득이 되는 증거물로서 자신을 메시야라고 주장하라는 것이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말씀하시기를, 분명히 메시야다운 증거를 보여주고 그리고 말을 했건만 너희들이 하나님의 양이 아닌 이유로 믿기지 않을 뿐이라고 식으로 나오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도 안믿고 예수도 안믿고 오로지 교회 활동만 믿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요구하기를, 신의 축복으로 교회 활동이 활성화되고 번창되는 증거가 보여져야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가 함께 있음을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정신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과 다릅니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그 말씀은 다음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영생은 예수님이 주셔야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 준 영생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 지켜주시기에 그 어떤 식으로 빼앗기지 않는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은 결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메시야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유대인이 로마 군대의 치하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이스라엘이 당대의 최대의 국가로 우뚝서고, 성전에서 드리는 모든 기도가 다 응답이 되는 그런 증거 같은 것은 예수님이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예수님 앞에든지, 신 앞에서든지 간에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분 앞에서 자신의 순결함과 순수한 의욕을 가지고 대화를 시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저는 예수 잘 믿어서 천국 갈겁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증거는 이런 식이 아닙니다. 순전히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영생을 주는 자에게만 멸망치 않는다는 것이고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면서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단호한 결심과 용기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반면 예수님을 이러한 생각을 전면 거부하고 순전히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임의로 결정하시고 예수님 홀로 시행하는 일에 의해 영생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6:37에 보면 보다 뚜렷하게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영생이라는 것이 순전히 하나님과 예수님, 둘 만이 작업으로 주입되고 종결되는 겁니다. 인간이 끼어 들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이러한 소식을 누가 믿겠느냐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라는 사실을 과연 우리들이 믿습니까? 영생을 자신이 얻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종교인들과 유대인들의 생각이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영생을 줄 때만 영생이 너희들에게 있어진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증거를 하셨는데 이 첫 번째 증거를 가지고 우리 나라 5만 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다 한다고 봅시다. 과연 믿을 자가 있습니까? 사람이란 종교없이는 못삽니다. 종교로서 자기 인생을 마무리 하겠다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중들 앞에서 이런 예수님의 주장이 과연 먹히겠습니까? 그 대신 인간들은 그들이 원하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난리일 것입니다. 즉 신이 저 하늘에 있고, 자신은 땅에 있고, 자기가 최선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신께서는 기적적으로 응답해 주고, 이것 말고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냐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저히 그런 식으로 증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 둘 사이에서 일어난 것만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의 증거집은 이 세상 모든 종교, 불교든, 이슬람교이든, 힌두교이든, 무슨 토속 종교이든 상관없이 수 천년을 걸쳐서 수북히 쌓여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려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 외에는 그 누구도 인간 구원에 개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런 이야기를 알아 듣는 자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 자들이 바로 양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제자들에게도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택한 양, 진정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내준 양을 위하여 그들이 납득이 되도록 하는 작업에 나서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러한 이야기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해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인류 최후의 순간을 미리 아시기에 비로소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 모든 인간이 가는 최후의 도착 지점이 어디입니까? 직업이 어떻듯, 재능이 어떻듯, 환경이 어떻듯 상관없이 결국은 한 지점에 모이게 됩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심판대 앞입니다. 거기에서 양과 염소로 나뉘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닷가 모래 사장에서 숱한 사람들의 발자욱이 찍히게 됩니다. 앞서 온 사람, 혹은 뒤에 온 사람의 발자욱이 늘려 있습니다. 하지만 일시에 불어오는 밀물에 그 많은 발자욱은 말끔히 정리가 되어 버립니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로 예수님의 심판 하나로 모든 것이 다 정리되고 맙니다. 이 점을 예수님이 이미 아시고 이 사실을 미리 구원받게 될 자기 양들에게만 알려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혜를 능가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와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성령 부어주심을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신해서 제자의 운명을 몸소 담당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6:1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성도의 신분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죽은 자로 봅니다. 그리고 산자로 봅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고린도전서 6:19-20의 나오는 말씀과 같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더 이상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죄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자임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예수님의 의 안에서 이미 산 자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씀은,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편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편에 소속되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야기했듯이, 자신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이제 사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아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라야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세상 것을 얻는데 신의 능력을 이용하자는 것은 양도 아니요 예수님도 그들의 목자가 아닙니다. 목자는 오로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누가 과연 이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습니까? 속에 예수님이 계신 자만 영생이 순전히 예수님께서 집어 넣어주신 것임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를 지키려고 하지 말게 하시고, 주님이 주신 영생이 영생답게 드러내는 식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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