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 10:1-10 / 양의 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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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양의 문
2002년 6월 12일 49강
본문 말씀 : 요 10:1-1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 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 본문에 보면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고 생명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지금 인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죽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 없이는 죽은 채로 인생을 끝낸다는 겁니다.
또 9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지금 인생들은 저주받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생명이란 없고 그 대신 저주만 주어짐을 자인하고 있는 자라면 그는 예수님이 무슨 취지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나름대로 참 신을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을 보고 절도요 강도요 도둑이요 라고 규정하시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것은,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세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아야 그 가운데 놓여 있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해답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참 신을 본인들이 잘 알아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참 신을 안다는 것은 그 참 신이 하고자 하시는 작업을 알아차린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구약에서 약속한 그 양으로 여겼습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유대인들은 이 양 의식으로 전 백성이 일체화 되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여겼습니다. 에스겔 34:15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찌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참 신이고 그 참 신을 고대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참 하나님의 양이라는 겁니다. 이 참 양에게는 참 목자되시는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것이고 결국에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듯 스스로 하나님의 양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이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이야기를 비유로서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1절에서 6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 비유 끝에 보면,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 유대인들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까? 어떤 요소가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까?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양을 키울 때 아마 이웃 사람의 양하고 한 우리에 넣는 방식을 사용했는 것 같습니다. 따로 양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도 따로 두고 말입니다.
어느 날 그 중 양 주인이 와서 양의 문에 당도하니 문지기가 양의 주인임을 알아보고 양 우리 문을 열어줍니다. 양 주인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자기 양의 한 마리 한 마리씩 부릅니다. 그랬더니만 그동안 어떤 양이 어떤 주인 것인지 분간이 안되던 상황에서 신기하게도 그 주인에게 속한 양들은 빠짐없이 졸졸 주인 앞으로 나오는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 주인은 자기의 음성을 알아먹는 자기 양 떼를 데리고 나갔다는 비유입니다.
지금 비유가 과연 어려운 비유입니까? 일반적인 양 사육 방식을 아는 자라면 하등 어려울 것이 없는 비유입니다. 양 키울 때 원래 다 그렇게 하는 것인데 새삼스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비유에 대해서 의아하는 것이 이 양과 목자의 비유를 하면서 예수님이 집어넣어도 될 이야기를 집어넣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 1절과 5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 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왜 이 대목을 삽입하는지 그들은 그 의도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누가 옆에서 뭐래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양이라고 자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해 못함으로 보시고 그 대목을 다음과 같은 8-10절에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에 보면, '나보다 먼저 온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진정 하나님의 양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판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와서 비로소 판정해야 옳은 판정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골라내는데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참 신이신 예수님이 말씀을 던져서 그것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자만이 정말 양임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전의 판정은 모두 무용지물이다는 말입니다. 양의 특징은 목자에 철저히 예속된다는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도 좋아서 어쩔줄 몰라야 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양과 목자의 관계는 제 3자가 개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의 목자의 음성이 그리워하고 만족하면서 사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서, 어떤 목회자가 자기 교회 교인들이 목회자 눈에 보이에 너무 태만해 보여서 교회 활동에 열심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양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목자의 참 음성과 말씀이 듣고싶어 환장한 사람입니다. 외부의 제 3자가 강요하고 협박하고 저주한다고 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자들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의 말씀과 목자의 이야기에 온통 관심을 갖고 들으려고 달려들 자들입니다. 즉 개별적인 사귐의 관계가 성립하고 있어야 참된 양입니다. 제 3자가 개입될 여지도 두지 않고 말입니다. 요한 일서 1:6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예수님과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정말 예수님만이 참 신입니다. 그 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목자라고 하던 그 예언은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 종결되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다른 협박, 다른 공갈과 저주에 주눅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자신을 불러주신 예수님과 사귀면서 사시면 됩니다. 그 음성을 즐겨워 하면서 말입니다.
성경의 내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마치 자기 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수하에 두려는 겁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 10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들은 도둑과 강도의 심보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양을 살리려는 목자가 아니라 양을 이용하고 양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목회자 자신은 살고보자는 심리가 바로 예수님이 지적하는 절도와 강도에 해당되는 목회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이런 강도와 절도 같은 사람들에게서 못벗어나는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너는 내 양이야"하고 포크로 고기반찬 찍듯이 찍어주지 않는 이상 목자의 음성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예수님으로부터 호출받은 양이라면, 자신의 구원은 순전히 예수님의 부르심 덕분인 것을 고백할 것입니다. 결코 자신이 훌륭하고 착하고 착실해서 남들을 제치고 자신을 구원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양은 오로지 참된 목자의 무조건적인 공로만을 증거할 따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최종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참 신을 알았으면 모든 것을 다 알았고, 참 목자가 불러주었으면 더 이상 다른 소망이 없음을 믿는 신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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