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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 9:35-41 / 인자의 심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 9:35-41 / 인자의 심판

정인순 2013. 12. 28. 13:54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60548.mp3

 

 

인자의 심판

 

2002년 6월 5일 48강

 

본문 말씀 : 요 9:35-41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님에 대해서는 구원자라는 인식이 붙어다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실제로 지상에서 진행될 때는 심판이라는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 39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심판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만약 어떤 자가 우리 모임에 뛰어들면서 외치기를, "나는 너희를 심판하려 왔다"고 한다면 우리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지독스럽게도 기분이 상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맨 처음 올라오는 생각은 이것입니다. "네가 뭔데 우리를 심판하고, 우리가 뭐가 잘못된 것이 있어 심판이니 뭐니 하느냐?"하는 반발입니다.

 

그러면 그 낯선 사람이 더 황당한 말을 다음과 같이 늘어 놓는다고 합시다.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니 그것이 곧 더욱 더 심판 받아야 될 죄야"라고 말입니다. 아마 이 소리듣고 분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용의 진실됨을 확인할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분은 예수님을 대하는 유대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성도를 찾아 올 때도 이런 환경과 분위기에서 이탈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찾아오십니다. 흔히 꿈에 예수님을 보았느니.... 하지만 그런 것은 잊어버리세요. 참되게 예수님이 찾오실 때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찾아오십니다. 다른 노선,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 중의 오늘 본문의 상황도 포함된다는 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악한 바리새인에게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똑같이 적용하십니다. 어떤 자가 우리를 함부로 심판하겠다면 참으로 기분 나쁜 것처럼 예수님도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 본문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할 일을 알리시면서 자신을 '인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자'라는 분은 구약 다니엘 7장에 보면, 하나님 보좌에서 나오신 분으로 이 세상을 심판해 버리려고 구름타고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이 인자라는 분이 이런 최종 심판의 일을 하신다는 것은 유대인들이라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동방박사가 헤롯 왕을 방문했을 때, 그 당시 성경 학자들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점을 참고로 해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형편을 생각해 보면, 오로지 예언 성취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던 유대인들보다 더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인자'라는 용어가 나오면 그런 용어에 담긴 의미나 그런 표현을 쓰게된 의도에 전혀 무관심하면서 무조건 '예수'라는 용어에만 매달려 있잖아요. 성경에 나오는 용어 하나 하나가 예수님을 겨냥해서 쓰여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무관심하고 그저 예수라는 용어만 붙든다고 뭐가 되는 겁니까?

 

예를 들어, 수학을 잘 못하는 어떤 학생이 주관식 수학 문제에서 1번 답이 3이라는 것을 컨닝해서 '답, 3'이라고 썼다고해서 그것을 옳은 답으로 간주해 주겠습니까? 선생님이 그 학생을 불러서 묻기를, "너는 여기서 어떻게 3이라는 답이 나왔는지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그 학생은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예수라는 용어나 인자라는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예수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그 예수가 어디서 나온 예수며 어떤 식으로 예언의 끝자락을 실현시키는 가를 알아야 예수님에게 담긴 의미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결론적으로 예수만 붙잡고 있다면, 이 예수가 갓바위 예수인지, 어느 무속 신앙과 결부된 예수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예수님을 알아야 성도가 어느 환경, 어느 형편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마치 수학의 과정을 아는 학생에게는 그 어떤 유형의 문제가 주어져도 다 풀어내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6:26의 예를 봅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말씀을 마치 해답처럼 간주해서 달랑 기억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만으로 과연 실생활에 반영이 됩니까? "그래 예수님의 영생만 얻으면 사실 전부를 얻은 것이야. 더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드느냐 말입니다.

 

과연 해답을 안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라는 분이 와서 세상을 제대로 심판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마는, 예수라는 분이 소경을 데리고 세상을 심판하는 식으로 '인자로서의 심판'을 감행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 그들 유대인들은 인자에 관해서 해답이 없는 셈이죠.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예언을 하시고 옥에 갇힌 후,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현 사회에서 정답이라고 고수하는 것을 도리어 처버리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 군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시고 말씀 하시되,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가진 자를 못봤다. 소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지옥의 어두운 곳에서 울며 이를 갈고 지낼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사상에 있어서 이 얼마나 큰 대립입니까! 인자의 구원방식은 사고방식의 교체로 통해서 이루어지고, 교체를 거부하는 자는 그 자리 가만히 앉아서 지옥되게 하시는 작업을 통해서 실행됩니다.

 

따라서 오늘날 설교 시간이나 성경을 보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인자 방식대로 구원 작업을 해나가시는 겁니다. "내가 평소에 착하고 훌륭하기 때문에 주님이 날 구원해 주시려고 오셨구나"라는 이 말도 안되는 엉터리 사고방식을 심판으로 정죄하시고 이 정죄된 사상이 주님으로부터 교체당한 자만이 구원된 자입니다.

 

우리가 착하다고 해서 예수님이 순하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이사야의 고백처럼 "화로나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를 실감하지 아니하면 인자가 품고 있는 해답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민중들에게 말씀을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일체 그런 것은 인정치 않고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로 오니 이사야는 자신이 죄인 중에 속한 일개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뿐만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그는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당하게 됩니다.

 

사울이라는 이 사람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성경 말씀에 해박한 사람이었고 또 그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 믿는 자를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일이라고 자신만만해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직접 만나고 난 뒤부터, 자신은 소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인간들은 남은 일생이 고요하고 형편이 펴일 것이라고 우리가 짐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예수님에 관해서 바로 알고 제대로 증거한 스데반 집사님은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즉사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를 이런 식으로 인도하는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치있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되었던 자도 마찬가입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장님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형편은 사회적으로 매도당할 입장입니다. 그는 그당시 권력층로부터 공개적으로 안식일 법을 어기는 자가 되었고, 사회에서 이단이라고 하는 예수를 두둔하므로서 신을 모독하고 신의 법에 도전하는 자로 몰릴 판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온 자에게 왜 이렇게 힘든 상황이 주어지는 겁니까?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시 그 소경되었던 자를 찾아오십니다. 말씀하시기를, "내가 심판자인 줄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극도로 나빠진 소경된 자의 삶의 환경을 개선시켜 주시려 찾아 오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지금보다 더 미움받는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소경되었던 자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무얼 더 바랍니까?

 

만약 우리들이 그 현장에 있다면 과연 무리를 헤치고 나서면서, "저도 저 소경된 자가 당하는 곤궁을 자처하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구름타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인자되시는 분으로 믿고자 합니다"라고 나설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반대로 "저 바리새인님, 예수라는 자와 저 소경되었던 자가 나누는 이야기는 말씀에 의하면 완전히 엉터리 인 것 맞지요?"라고 하면서 권력층에 눈치 살피며 목숨부지 하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과 소경된 자가 무슨 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면서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즉 "우리가 어찌 소경인가?"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인자되시는 예수님의 연속적인 심판이 이어집니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심판은 이런 식으로 지금도 감행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우리들을 향하여 감행되고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제가 소경입니다. 그 어떤 상황이 들이닥쳐도 저는 예수님을 심판주로 믿습니다"라는 이 소경된 자의 고백이 지금 우리들의 고백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이 전부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인 줄 지식으로는 알지만 현실의 생활 태도에 반영이 안되는 우리들에게 늘 찾아드시면서 이 요한복음 9장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는 소경되게 한다."고 말입니다.

 

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제가 소경이었습니다. 온 천하보다 예수님이 주신 목숨이 더 귀한 줄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이며, 이런 자에게 그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주님 주신 영생으로 인해 그 어려움을 진정한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개인적인 위신과 체면과 명예만 생각하면서 정작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