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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 9:24-34 / 소경과 유대인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 9:24-34 / 소경과 유대인

정인순 2013. 12. 28. 13:53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52947.mp3

 

 

 

이근호

 

소경과 유대인

 

2002년 5월 29일 47강

 

본문 말씀 : 요 9:24-34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남으로서 이 세상은 뒤죽박죽이 됩니다. 가치관이나 진리관에 있어서 혼돈 상태로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의 각자의 인생에 개입해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일어납니다.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될 수 있는대로 조용하게 세상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는 저 높은 창공은 늘 조용하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저 조용한 나라에 계신 그 조용한 하나님께서 마음껏 찬양과 영광을 돌리면 이 지상에서 사는 나의 인생도 조용해 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감을 훼방놓듯이 무너뜨리는 계기가 곧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조용하고 경건스럽게 하나님만 찾는 무리 속에서 예수님은 도리어 분란을 일으키는 분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된 자와 유대인들 사이의 분란도 모두 예수님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저는 예수믿는다는 사람을 만나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들 하나님 믿는 신자이지 예수 믿는 신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한 번 물어 봅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변화를 이르켰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쪽에서 하는 대답이, "평소에도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싶었는데 더 잘 믿고 이제 제대로 믿으라고 예수님을 알게 해주셨습니다"라고 나오면, 저는 속으로 사태가 정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렇지 예수믿는 사람이 이렇게 손 쉽게 만날 리 있을 수 없지"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께 영광돌린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행위가 몽땅 죄악된 것이고 영적으로, 심적으로 소경의 짓이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정말 이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경건됨을 스스로 부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공들여, 돈들여, 시간을 교회 바쳐 얻어낸 그 경건성을 일시에 부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된 자처럼 자기 자신이 어두움이었음을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아는 자에 한한 기적적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소경과 유대인들의 논쟁에 대해서 서술해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된 유대인들의 평소의 생활신조입니다. 그냥 신앙인 행세한다고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 영광'이 전부입니다.

 

이들이 공연히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제자라는 것은 그들로서의 최고의 권위성이요 최고의 자랑거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보다 구체적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즉 유대인들도 압니다. 전 세계인이 다 신을 찾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신도 자기네들이 믿고 있는 여호와 신만큼은 신적 구체성을 지니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위대한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직접 하나님과 독대했던 자입니다. 그리고 그 팔에는 황공스럽게도 하나님께서 직접 친필로 새겨주신 문자가 박힌 돌판을 끼고 백성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보다 더 확실성 있는 중개인이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계시의 중개자는 모세로서 종결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후대에 나타난 많은 선지자들은 기껏해봤자 모세가 소개한 그 하나님의 종일 뿐이고 그들이 한결같이 외친 계시는 모세 율법에 충실해야 복받는다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이만큼 했으면 하나님에 대한 정보는 충족되고 마감되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모세의 제자'됨을 영광스럽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에게 대들면 이것이 곧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셈이 되고 모세의 말씀에 도전하는 자라면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없는 자이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없다면 틀임없이 죄인일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대단한 귄위를 가지고 유대인들은 소경되었던자를 심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되었던 자의 입장에서 봐서는, 예수님을 만난 자와 예수님의 안 만나 자의 차이성 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영광을 논하고 모세의 제자로 자처해도 예수님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 자로 분류 될 뿐입니다.

 

소경되었던 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말 예수라는 분이 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죄인의 기도나 죄인이 하는 일을 도와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껏 그 어느 위대인 선지자나 제사장도 못했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을 봐서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일이 틀임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보고 죄인이다고 주장하는 소위 '모세의 제자들'이라는 유대인들에게 도리어 문제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소경된 자의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만났다는 우리가 이 소경되었던 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삽니까?

 

즉 소경되었던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경건과 찬양과 영광을 언급해도, 본인이 죄인이며 소경이었고 이제는 예수님 만으로 모든 상황이 완료되었음을 기쁨과 만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여전히 신자로 안보이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은 누가 교육 시켜서 될 일이 아닙니다. 획기적인 변화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자꾸만 겉을 완벽하게 종교적으로 신학적으로 정립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찾아오심은 겉이 아니라 속이 달라지는 겁니다. 속이 달라지면 더 이상 겉을 치장할 일은 없게 되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유대인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더 이상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이 또 달리 있겠습니까! 소경은 참으로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소경되었던 자는 결코 유대인들의 타협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의 보호나 호응도가 아쉽지 않습니다. 꿀릴 것도 없고 불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통나무를 자르는 전기톱같이 자신이 가만히 있어 아는 것을 증거하기만해도 통나무 한 가운데가 양쪽으로 갈라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침착성이 주의 증인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에게서도 이런 모습이 발견됩니다. 고린도후서 2:15-16에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아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멸망도 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28-29에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즉 복음이란 멸망의 증거로서도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런 일로 인하여 성도에게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경되었던 자와 유대인들은 정말 제대로 마주쳤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마주침에서 과연 우리가 겉으로 복음과 비복음을 화합시키려고 한 적으로 없었는가를 돌아볼 수 있는 증거로 삼아야 합니다. 겉에 너무 신경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속입니다.

 

속이 변화되었으면 비록 고난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것도 은혜입니다. 겉으로 속을 보충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사람의 이목이 두려워서 스스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믿다가 지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오히려 반대로 더욱 더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