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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 9:13-22 / 세 가지 태도 (소경과 권력)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 9:13-22 / 세 가지 태도 (소경과 권력)

정인순 2013. 12. 28. 13:52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52246.mp3

 

 

이근호

 

세 가지 태도

 

2002년 5월 22일 46강

 

본문 말씀 : 요 9:13-22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들은 알 수 없는 공포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래새인들과 소경되었던 자의 부모가 그런 자들입니다. 그것은 예상하지도 못한 일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인간에게는 자기 나름대로 보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위배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면 당황하게 되지요.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과 우리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실 때에는 먼저 예수님편에 서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좋지 않게 보는 자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예수님을 다시금 제대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인간 세상은 고요하고 조용한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이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깨는 자가 있다면 그 자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인간 세상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 사이에 물의를 야기시킨 책임이 결국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 끼어드시는 겁니까? 여기에 대해 여러분들은 불만같은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오후에 퇴근해서 오순도순 정답게 행복한 저녁을 맞이하고 있는 가정에서 누군가 예수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식구들끼리 언성이 높아지고 싸우고 의가 깨어진다면 결국 모두 다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서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그냥 인간들끼리 살도록 두시면 될 일을 왜 하늘에서 사시는 분이 개입하시어 심술을 부리시는 겁니까? 은근히 부화가 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라면 하나님답게 하늘에 그냥 진득히 계실 일이지 왜 연약한 인간 나라를 휘젖느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인생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에 대해서 진실로 고마워합니까? 하나님이 관여해서 내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신자 맞습니다. 이런 생각이 안드는 것 오히려 문제입니다.

 

"예수? 그것은 교회 안에서만 이야기 되잖아. 거기 가서 따져보자"라고 여긴다면 신자 아닙니다. "예수님이여, 왜 제 인생에 관여하십니까?"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예수님을 현실적으로 보고 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왜 저를 미워해서 남들처럼 그런 평범하게 살지 못하고 늘상 예수님과 결부되는 생을 살아야 합니까?"라는 고백은 참으로 귀한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이 되지 않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신자도 아닙니다. 신을 가지고 장난치는 중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아무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는 줄 아느냐?"

 

예수님의 오심은 늘 이러합니다.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어기시면서 인간의 질서를 무시하십니다. 그리고 눈 뜨겠다는 어떤 의사 표시도 없었던 자를 일방적으로 불러서 눈을 뜨게 하시므로서 그 소경된 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숱한 눈총을 받게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소위 신자라는 우리 쪽에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기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든 마찰과 충돌을 줄이고 싶어하지는 않습니까? 말썽없이 예수 믿어보겠다는 심보가 아닐까요? 말썽나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마태복음 10:34-37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지옥가게 만드는 것은, 질서 질서와 평화, 평화를 외치는 가까운 식구들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아무나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관여한 인생에 대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개입해서 말썽이 안난 적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일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세 종류의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율법을 통해서만 관계가 성립된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라는 자가 안식일날 병을 고쳤고 소경된 자도 안식일날 병이 나았기 때문에 율법으로 볼 때 참으로 사이비 짓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율법을 어긴 하나님의 메시야는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둘째로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말하기를, 지상의 하나님의 일이냐 일이 아니냐 하는 것은 사람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느냐 아니냐로 검증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표적 또는 기적이라고 하지요. 사람이 못하는 일, 즉 소경이 눈을 떴으니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의 주장대로라면, 안식일을 어긴 죄인을 하나님이 자신의 놀라운 일을 시키실 리가 만무하다는 겁니다.

 

이 첫째 그룹과 둘째 그룹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논쟁에 초청받았다면 어떤 판정을 내리겠습니까? 흔히 사람들은 무책임하게도 세 번째 타입의 답변으로 일관합니다.

 

세 번째 태도는 소경된 자의 부모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과 하나님의 전문가도 아닌데 우리가 뭘 알겠습니까. 그저 교회에다 저의 구원을 다 일임하겠습니다"라는 식과 같습니다.

 

과연 자기 구원를 대행할 대행업소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소경된 자의 부모는 알 수 없는 공포심을 갖고 있습니다. 현 질서에 주눅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자기 아들은 지금, 인간들이 도저히 못해 내는 놀라운 은총을 받았습니다. 감히 소경이 눈을 뜬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아들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한 자들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아야지요! 오늘날의 교회상을 보는 것같습니다. 예수 믿으면 죽어도 산다고 입으로 큰소리쳐도 세상살이에서는 왜 그리 무서운 것이 많습니까? 이중 생활 아닙니까? 어느 생활이 진짜입니까?

 

정말 예수님이 그 정도 밖에 안되는 분입니까? 예수님 사랑은 따로 제쳐놓고 무서워 하는 교회 권력, 세상 권력에 대해서는 계속 무서워하고들 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내가 무서워 하는 대상보다는 한 수 아래라는 말입니까?

 

유대인들도 인정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이 자기 아들에게 일어났다고 한다면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없이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가 아닐까요? 예수 때문에 구태여 손해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늘 이런 공포를 달고 사는 것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가지 타입의 사람들은 인간들이 진짜 예수님 앞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1번도 아니요 2번도 아니요 3번도 아니라면 그럼 뭡니까? 네번째의 진리를 알기 위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의 공통된 점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맺어진다는 자들은, 율법을 지키게 되면 축적이 되는 그 의로움과 선행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적으로 신의 일을 검증하려는 자들은 신기한 기적을 본인이 소지했다는 것으로 구원의 확정책으로 소유하려는 겁니다.

 

세 번째 소경된 자의 부모는, 자식이나 자신의 몸을 자기 것으로 간주해서 영원히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합니다. 세 가지 다 소유성은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답을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22-24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이냐 하면, 일체 인간의 행함이나 지식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의 일방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십자가가 과연 무슨 일을 일으킬까요? 골로새서 2:14-17에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십자가가 율법을 도말한다고 했습니다. 도말이란 찢어 없앤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안식일도 찢어 없애고, 월삭과 절기의 율법도 찢어없앤다는 겁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의와 십자가의 공로로만 충분하고 넉넉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이 점을 잘 아신다면 인생사에 그 어떤 일어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체제에서 말썽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한 거울입니다. 고지식한 진실한 거울은 예수님입니다. 너무나 솔직하고 진실의 거울이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기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죄인인 줄 알고 진실의 거울을 바라보면 거기에서 모든 두려움도 두렵지 않을 정도의 자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앞에 나가 그들의 평가에 주눅들 필요조차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킨 일로 인해 모두들 떨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도리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고 관여하더라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자를 먼저 찾아와 주신 것에 대해 황공스럽게 여기고 고마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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