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 9:8-12 / 소경과 이웃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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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소경과 이웃들
2002년 5월 15일 45강
본문 말씀: 요 9:8-12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지난 번에는 예수님도 계시고 제자들도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에 있어 소경된 이 사람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한 보조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즉 빛과 어두움을 말씀하기 위해 잠시 등장된 자입니다. 이 세상은 철저하게 어두움이며 오직 예수님만이 빛이요 낮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소경된 자가 불러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다 떠나 버린 마당입니다. 남은 자는 소경되었던 자와 평소에 그가 소경이었음을 알았던 사람들과 안면있는 이웃들 뿐입니다. 자 이래도 진리는 전달될까요? 예수님도 안계시고 제자들도 없는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소경되었던 자가 진리 전달의 중앙에 서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자주 등장해서 가르치시고 제자들이 꿈에 나타나 격려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 각자의 신체 뿐입니다. 그래도 진리는 전파될 수 있을까요?
이 사회에서 지방 선거가 있다면 중앙당의 유력 인사들이 와서 자기 당의 후보를 격려차 주민들에게 연설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복음 전달 현장에는 우리들만 남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복음 전달이 가능할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웃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소경 거지였던 사람이 졸지에 눈이 떠져서 나타났더란 말입니다. 8절에 보면,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혼란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 때문에 예수님이 빠진 상황이 되어도 인간 사회에서는 혼란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위기입니다. 이 위기란 바로 지금까지의 인간 세계의 모든 원리 원칙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데서 오는 위기입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날 때부터 소경이었기에 절대로 눈이 뜰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살던 사람들이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그들이 그동안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지게 만든 상황을 이 소경된 자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의 진리관에 의해서 결코 눈뜨지 말아야 될 소경이 갑자기 눈을 뜨고 나타났으니 이 소경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정된 세계관이 공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어두움의 세상입니다. 유일하게 빛이 되시는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을 통해 소동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세계라면 그 세계가 바로 어두움이 세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소경이 나타나기 전에는, 인간들끼리의 원칙 안에서 안심 푹 놓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가 깨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만을 전하면 듣는 사람이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반적으로 통념화된 종교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그들은 여유만만하게 잘 듣게 됩니다.
"종교든, 하나님이든 결국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호감을 얻으려는 신들의 재롱잔치가 불과하지 않느냐"하는 식이죠. 즉 인간의 아쉬움이 종교의 동기가 되고 그것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종교의 핵심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요구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사태, 즉 졸지에 소경이 눈을 뜨고서 나타나는 사태에 대해서 경악스럽기 짝이 없는 겁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소경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정화수 떠 놓고 평소에 빌었던 자가 아닙니다. 정말이지 난데없이 눈이 뜨게 된 것 뿐입니다.
자신도 놀랐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더욱 당황스러운 일이고 그들의 판단 범주 밖에서 일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기분 상하게 만든 사태입니다. 그래서 애써 외면하려고 어떤 사람은 전에 그 소경이 아니었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3장에 분명히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이 세상은 어두움입니다. 정말 이 세상은 어두움 답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들은 복음을 들으면 당황하게 됩니다. 그래놓고서는 이 세상 사람은 자꾸 우기기를 자신들은 어두움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만하면 인간답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대충 살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선입니다. 천국이란 빛이 되신 분이 와서 직접 그 빛으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영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연구하고 탐구해도 그들에게는 위기로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오늘날 종교계는 현대인들으로부터 점차 관심을 모으지 못하고 있으니 연합해서 세상을 향해 광고하자고 합니다. 즉 아직도 종교라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니까 우리들의 하는 소리를 좀 들어달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겁니다. 정작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없으니 자기들까리 머리를 짜내어 살아남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종교의 폐단은 위선자를 양산시키는데 있습니다. 어두운 자는 교회오나 성당 가나 어디가나 어둡고 목사가 되나 장로나 되나 역시 어둡습니다.
어둡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 졸지에 딴 사람되는 현상 뿐입니다. 마치 자신이 원하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소경이 눈을 뜬 것처럼 말입니다. 새 사람되는 것에 있어 그 원인을 인간에게 둘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 11절-12절에 보면,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소경이 발랐던 그 진흙에 어떤 효험이 있었습니까? 실로움 물이 효험을 있게 했습니까? 자기 얼굴을 열심히 씻는 그 세수 행위가 효과를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이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오직 빛 되시는 예수님에게서입니다. 그 외는 결코 원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원인자는 지금 자리에 없습니다. 남아 있는 현실은 전에 소경되었던 그 인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둡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깜깜한 세계에 빛의 혜택을 입은 자가 난데없이 튀어 나온 식이 됩니다.
희안하게 덜렁 새사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적 분위기가 신앙을 창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경은 오직 예수라는 그 한분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44-45에 보면,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기적입니다. 마치 소경이 눈 뜨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결코 상식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윤리, 도덕을 새 사람의 원리로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성령이 임해야 새사람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새사람 끝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누구든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영의 일, 즉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성령을 받았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인간 조직망을 철저하게 갖추어놓고서 교회 출석을 강요하고 헌금을 강요하고 지옥론으로 협박을 해도 성령을 받지 않은 이상 일시적인 목사 얼굴 봐주는 식으로 억지로 출석해주만 결국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정말 성령을 받은 자라면 이런 목사의 지시 같은 것이 우스운 일입니다. 과연 소경이 눈을 뜬 이후에 일부러 눈 감고 다닐 필요가 이유가 있을까요? 자발적으로 성령을 따라 살게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이 밤 늦도록 사도 바울의 강론을 듣고 졸다가 그만 3층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다시 안아 주니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 청년이 죽은 채로 있을 때 다시 살아나야겠다고 용을 썼습니까?
유두고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나 소경이 눈을 뜬 것이나 더 나아가서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이 모두 한 분에 의해 일어난 신기한 일입니다. 구약에 보면 야곱이 얍복강가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살아납니다. 사사기 13장에 봐도 마노아 라는 분이 고백하기를,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곧 죽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임한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되살아나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성령이 임한 자는 곧 전부가 하나님의 소유라고 되어 있고 고린도전서 3:16에 봐도, 성령이 임한 자는 곧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그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친히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죽어야 될 자가 살아났는데 그래도 여전히 자기 능력 자랑하시렵니까? 정말 성령받은 자라면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자신의 미래가 비참하고 힘들과 어렵고 험난하다고 할지라도 난데없이 졸지에 성령받은 이 하늘의 선물로 인해 평생을 예수님만 자랑하는 자가 진정 신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위적으로 시도해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확신하게 해주옵소서. 주님에 의해 소경된 자가 눈을 떴기에 오직 주님만 자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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