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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 8:31-40 / 자 유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 8:31-40 / 자 유

정인순 2013. 12. 28. 12:01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41741.mp3

 

 

이근호

 

자 유

2002년 4월 17일 41강

 

본문 말씀 : 요 8:31-40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종교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일단 성경을 전혀 모른다고 간주해 봅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는 것이 가장 간편한 방법이 되겠습니까? 아마 낚시대로 그냥 낚아 올리는 방법이 가장 단순하며 속시원할 것입니다. 어지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번거롭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선입감에서 보면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는 예수님을 보내시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구원 방식이 복잡해집니다. 동시에 이 복잡함은 인간들의 안일한 구원관을 공격하게 됩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한 하나님과 실제의 하나님이 상호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등장됩니다.

 

상식적으로 봐서 신이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주 업무 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흔히 인간 사회에서 이웃과 이웃 사이에서 자비를 베풀 때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자비를 베풉니다. 마찬가지로 상식적인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때 인간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지 않아야 되는게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구원자되시는 분이 이 땅에 와서는 사람들과 토닥토닥 싸우고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사람들의 마음 속까지 시원하게 부담없이 만드는 방법이 제격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봐서 37절과 40절에서,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하고 두 번씩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믿고 구원얻는다"는 논리는 아주 간단한데 문제는 그 당사자 되시는 예수라는 분이 대단히 껄끄럽게 나오신다는 겁니다.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 과연 이런 식으로 인간을 구원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어지심에 빗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안일에 빠져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나를 죽이려 하는 구나"라고 하실 수도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봐서도, "네가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라고 하신 대상이 다른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자 했던 자들입니다. 30절-31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지금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아 보겠다고 나서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예수가 누군지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아보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잘 믿고 있다고 간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 37절에 보면,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면 결국 우리도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부하고 죽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당시 유대인들보고 하신 이 말씀도 우리 속에 거해야 합니다. 곧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행여 "이 말씀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책망일거야"라고 생각하시면 아니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로 너희들은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자유가 필요 할 정도로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이 들어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이 예수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들이 아브라함과 관련이 있는 자라고 여기고 그것으로 인해 종이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 아브라함 같으면 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한다면 산뜻하고 깔끔하게 구원하시면 될 일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하시는 겁니까?

 

종교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도모하기 위해 신을 찾는 겁니다. 그런데 이 종교에 무엇이 빠져 있는가 하며는 예수님의 말씀이 빠진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빠진 채 이들은 자신의 구원을 얻어내고자 덤벼든 겁니다. 진실된 하나님의 의도가 빠져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 같으면 제대로 예수님의 이 의도를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혹독하게 다루었는지를 알것입니다. 결코 아브라함이 스스로 알아서 마음 편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가 아브라함처럼 제 자식을 산채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자가 누굽니까? 우리 중에 누가 아브라함처럼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까? 누가 태가 죽은 다음에 자식을 갖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불러내었고 끌고 다녔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본인도 원치 않았지만 자기 속에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온 결과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물럭 주물럭 대는 인생이 바로 아브라함같은 인생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을 알게 된 것은 바로 "나 택함받았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택함받은 자만이 구원된다는 것을 절절히 알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아니고 교리가 아니고 신학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온통 느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에수님은 아브라함을 모델로 내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즉 진리의 말씀이 마음 속에 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지도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자신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맥락이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언제 죄의 종입니까?"라고 반문이나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같으면 이런 소리를 하지 않겠지요.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칠 때, 그는 자신이 죽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일 수 있는 죄인인 것을 알고서 바친 겁니다.

 

그들이 아브라함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 구원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만 얻고자 합니다.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구원받고 싶은 의욕이 곧 구원이 실현될 수 있는 자격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나는 구원받아야 돼, 나는 구원받고 싶어"라는 생각이 바로 자기 자신의 현 위치를 모르는데서 나온 죄입니다.

 

에덴동산을 잠시 생각해 봅시다. 에덴동산에 사는 아담과 하와를 현대인이 보면서 대단히 안타깝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 갇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에덴동산 바깥으로 살 자유도 있는데 왜 그리 갇혀 사느냐"하고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사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으로부터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한 것으로 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종이기 때문에 생겨난 죄의 관점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은 제 자리로 돌아올 줄 모르고 있는 말이 됩니다. 차라리 에덴동산 밖에 살 권리도 있다고 여기는 것이 본래의 인간의 권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6일이 되기까지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예 흔적조차도 없습니다. 6일이 되어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인간이 없었던 때도 있었음을 겸허하고 받아드려야 정상이고 본래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죄를 지은 인간들은 원래의 이 자리로 돌아 올 줄 모릅니다. 그저 이미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무조건 나를 구원해 내어야 하고 무조건 나를 영원히 존속시켜서 좋으신 하나님이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나는 원래부터 '나'라는 존재는 없어져도 괜찮은 존재였어"라는 생각을 평소에 늘 지니고 살고 있습니까?

 

인간이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시면 있어도 되지만 하나님이 없에면 얼마든지 없어져도 그만인 것이 인간입니다. 선택해서 구원해주면 고마운 줄로 알고, 창조해주신 것만해도 감당못할 은혜인 줄로 알아야 하는 겁니다. 이것을 누가 알았습니끼? 바로 아브라함은 알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하게 그를 다루어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브라함처럼 선택된 자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자만 죄에서 자유를 얻은 자입니다. 죄 지은 본래의 자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원래 우리가 이런 자였습니다. 바로 이런 인간이였던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을 심어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빼내어 주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보여줄 것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공로 뿐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스스로가 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위력보다 더 크고 엄청난 위력임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큰 위력 앞에 우리는 간음한 여인처럼 다소곳이 용서받는 자세로 일관하는 여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예수님 말씀이 어떤 식으로 들어와 있는지를 알고 그 말씀의 내용과 능력을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