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 8:21-29 / 네가 누구냐?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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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냐?
2002년 4월 10일 40강
본문 말씀 : 요 8:21-29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을 기독교라는 종교로 전환시키게 되면 사람들의 선택이 대상으로 인식되기 쉽상입니다. 기독교가 필요한 자에게 관계하는 예수님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에 호의적이든 호의적이 아니든 간에 누구에게도 예수님은 영향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도와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들 각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선언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이런 취지를 근거로 해서 대범해야 합니다. 그저 몇 사람 더 건지기 위해서 속으로 애을 태우는 모습을 보이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안믿으면 죄 가운데 죽는 것은 정말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임을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강하게 나오십시오. 아쉬운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사정 사정하고 부탁할 필요도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선언이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기에 우리가 공연히 아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당당해야 합니다. 하늘이 내려준 진리를 우리 선에서 두려워하고 무서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든지 예수님 안 믿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끝장난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름대로 "잘났다, 못났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일을 잘했다, 일을 못했다"라는 비교를 끊임없이 해댑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주를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 죽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비교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 이렇게 변명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물론 예수님 앞에서는 그렇지요.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여전히 그런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니 우리가 거기에 신경 안 쓸 수 없는 노릇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믿을까 말까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생각이 당기거든 잘 생각해서 예수 믿으라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통고받을 대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변명도 예수님 말씀 앞에서는 빛을 잃습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느 해변가에 큰 해일이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백사장에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팅에 성공했는데 너는 선팅이 성공했니?" "아니, 나는 언제 선팅이 곱게 될까?" 하고 말입니다. 그 때 어떤 분이 이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해 줍니다. "어서 피하세요. 해일이 들이닥치네요." 그러자 두 사람이 그 사람에게 말합니다. "물론 해일이 있으면 그렇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 선팅에 성공하느냐 마느냐 라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짜고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죄 가운데 죽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한쪽으로 치워놓을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신자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다는 우리부터도 이런 예수님의 취지를 약화시키려고 합니다. 이 땅에서의 성공, 실패 같은 것은 이 말씀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 죽으리라'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보통은 '네가 지은 죄 때문에 그것이 쌓여서 나중에 그 행위에 대해 벌 받는다.'라는 식으로 죄와 저주를 관련짓는 법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라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겁니다. 마치 우물에 아이가 빠져 죽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이가 우물을 만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우물에 아이가 빠진 격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볼 때는 이런 식으로 보시는 겁니다. 비록 인간들은 각자 자신의 구역과 영역을 가지고 누가 더 세냐 하는 식으로 싸우더라도 그것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과연 인간들이나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죄 가운데 푹 빠져 있을까요?
그 증거가 25절에 나옵니다. "네가 누구냐"라고 바리새인을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자기에게 평가하는 것을 거부하는 반응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평가할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당신이 어떤 자인가를 물을 만한 자격이 바리새인 자신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은 그들이 죄 가운데 푹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좀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출애굽기 16장의 경우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하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물이 없고 양식이 없으니 책임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데 적어도 기본 생존의 조건을 갖추어 주어야 될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대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여전히 옛날 사고방식으로서 그들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유발되어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 그대로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음식을 제공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양식을 하늘에서 주셨습니다. 그것을 보자,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기 16:15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즉 과거 자신들이 예상한 것과 왜 다른가 이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이 바로 자신들이 죄 가운데 있기에 그 속에서 원망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즉 만나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을 양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백성의 죄를 지적하고 고발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만나의 기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기존의 인간들이 단순히 죄 짓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죄 가운데 푹 빠져 있음을 보이기 위합니다. 여기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이러합니다. "네가 누구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에 푹 빠진채 살아간다는 사실조차를 모릅니다. 아직도 예수를 자신들의 평가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다 이러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6:3-8에 보면,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인간은 완전히 주인의 것을 제멋대로 횡령하고 있는 도둑놈입니다. 얼마나 불의한 자입니까! 이 자가 불의하다는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어린애들도 다 알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런 자가 도리어 스스로 빛의 아들이라는 바리새인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자신의 미래 정도를 대비할 정도로 자기 주제 파악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즉 탕자가 집으로 되돌아 오기 전까지는 형은 아버지 옆에서 천하의 의롭고 성실한 아들인 것처럼 비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이 아버지로부터 비난을 받은 것은 동생이 집에 돌아와서부터 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이 이미 죄 속에서 죽은 채로 있음을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보니,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설득해서 많은 사람들이 믿도록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속에서 죽는다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마음 속에 부질없는 세상에 대한 성공과 실패로 성처받지 말고 마치 청명한 푸른 하늘을 쳐다 보듯이 청명한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그리고 세상을 청명하게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해일 앞에 서 있는 군상들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 본 것처럼 단순하고 간결하게 바라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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