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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 8:1-11 /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 8:1-11 /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정인순 2013. 12. 28. 11:43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32738.mp3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2002년 3월 27일 38강

 

본문 말씀 : 요 8:1-1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서로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두 집단 간의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그 현장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선제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데려와서 예수님 앞에서 내동댕이 치면서 말입니다. 누가 과연 제대로 율법대로 행하는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예수님에게 도전해온 장면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다 잡힌 자는 현장에서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 당신의 처리방식은 뭐요?"라고 하면서 시비걸어 왔습니다. 만약 어떤 자가 이런 식으로 시비걸어 온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 합시다"라든지 "다음에 봅시다."라든지 했겠지요.

 

지금 예수님은 한참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깡패같은 바리새인들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보시기에는 오히려 마침 잘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의 가르침을 실전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실습 기회를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그 어떤 무방비한 상태에 놓이더라도 항상 말씀에 부합되는 자연스러움이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한국 교회 목사들의 비리에 대해서 공개 석상에서 언급을 하면, 목사들이 불만을 털어놓기를, "왜 그런 이야기를 평신도들이 있는 자리에서 하는가? 우리 목사들 끼리 있는 곳에서 하면 될터인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평소에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눈치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어느 곳에 서 있든지 늘 하나님 면전에서 행동하고 말하는 식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경우와 같이 예수님의 한참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그 자리에 불쑥 적들이 들이닥쳐도 예수님은 그 상황을 가지고 방금 이 자리에서 가르쳤던 그 말씀을 보다 효과적으로 잘 가르칠 수 있는 교육의 연장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계산하기를 예수님의 권위를 제자들 앞에서 완전히 뭉개지게 할 요량으로 들이닥쳤지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어떤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했습니까? 그것이 이제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대화와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과의 대화에서 밝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간음한 여인 하나를 용서하고 구원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세계와 예수님 바깥의 세계가 얼마나 확연하게 다른가가 요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바깥 세계를 어떤 식으로 봐야 하는 지를 가르치고자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전도하시다가 불쌍한 여인 하나 줍는 듯이 구원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통해서 나타난 인간세계의 사고방식 자체가 뭔가를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시비 걸기를, 이 여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율법적으로 옳겠느냐고 했을 때, 그 바리새인들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행동을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딴 게 아니라 그냥 아무 소리 안하시고 땅에다가 글씨만을 쓰시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신 이이유는 이러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나타날 때는 그들과 간음한 여인을 상호 구분지었습니다. 자신들은 상대적으로 의인이요 저 여인은 상대적으로 죄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계는 이런 인위적인 구분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예수님 바깥의 세계는 율법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름대로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삼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계는 일체 이런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바로 이 점이 드러나는 것을 유도하기 위해 가만히 앉아서 땅에 글을 쓰신 겁니다. 가만히 글을 쓰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더 제촉해서 자기들이 던진 질문에 답변해 주기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치라" 이는 예수님의 세계의 특징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들이 제정한 의인과 죄인의 구분을 완전히 철폐하는 세계입니다. 어떤 식으로 철폐하십니까? 말씀하시기 전부터 계속 해왔던 똑같은 행동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땅에다 글을 쓰시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공격하려 왔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답변을 전 후로 하여 같은 행동을 했던 그 "땅에 글쓰기"의 의미를 예수님의 답변을 중앙에 놓고 상호 연결시켜 이해하려고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즉 "이 여인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여인에게 주목했던 그들의 관심사가 예수님의 답변으로 인해 이제 자신의 문제로 되돌아 와 버렸습니다. "과연 나도 같이 돌로 맞을 자가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땅의 글 쓰기 행위는 인간들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이로서 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 둘 씩 글을 계속 써내려가시는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땅의 글 쓰기는 곧 그 어떤 인간도 그 자리에 따나지 않고서는 못배기게 만드는 글 쓰기였습니다. 죄없다고 자부하며 찾아온 자로 하여금 죄인임을 자인하게 만드는 글 쓰기입니다.

 

이것이 또한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글 쓰기 앞에서는 그 어떤 인간도 의인이나 죄인을 구분 지을 자격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모두다 죄인으로 드러나 버립니다. 이것이 진정 인간 세계의 정체입니다. 예수님의 글쓰기 앞에서 그 누구도 감히 버틸 수 없는 것이 인간 세계입니다. 이제 그 세계에 속한 자는 오직 한 사람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간음하다 잡힌 여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났다는 것을 예수님이 익히 아시면서도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너를 정죄하던 자가 어디있느냐?" 이 질문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왜 인간 세계에서는 나 자신을 정죄할 수 없는가?"하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즉 이 여인이 진정 구원받으려면 단순히 간음한 그 죄에서만 벗어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한 행위만 문제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소속했던 전체 세계를 문제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의 입에서 참된 예수님의 세계의 속성이 터져나오기를 원하고 하신 말입니다. 드디어 여인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바로 이 세계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세계입니다. 정죄함이 없는 세계가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자비의 세계요 용서의 세계입니다. 로마서 8:33-34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정죄함이 더 이상 없는 세계, 그리고 다가고 이제 예수님 앞에서만 놓여 있는 세계, 이것이 바로 구원의 세계요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만약 이 여인이 간음죄에서만 용서받게 된다고 이 여인은 다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세계에 여전히 속해서 구원되지 못한 자일 것입니다.

 

즉 용서받은 그 자체를 자신의 특별함의 근거가 되어 용서받지 못한 자를 정죄하기 쉽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찾아온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그 세계 자체에서 구원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있으면 너를 정죄할 자가 없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저 예수님의 용서와 자비만이 세상을 향해 드러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여인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이 말씀으로 인해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위에 예수님의 자비가 이불처럼 뒤덮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도 세상에 나가서는 바리새인이 저질은 죄에 그 본인도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죄 안하심'으로 인해 더 이상 바리새인의 의식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자기 행동에 대해 단지 간섭받지 않기 위하여 "죄없는 자가 나를 향해 돌을 던지라"고 큰소리 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정치판에서 나올 인위적인 작태입니다. 과연 우리가 더 이상 세상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의 정죄함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비로소 우리는 간음한 여인과 같은 세계에 같이 놓였다는 것을 알고 감격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겁이 나서 그들 보기에 의로운 인간 행세를 한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제부터 우리를 덮는 것이 다른 세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