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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 8:12-20 / 예수님에 대한 증거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 8:12-20 / 예수님에 대한 증거

정인순 2013. 12. 28. 11:43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40339.mp3

 

예수님에 대한 증거

 

2002년 4월 3일 39강

 

본문 말씀 : 요 8:12-20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판단하고 평가를 내리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호응과 인기 몰이와 후원을 예수님은 왜 거절할까요?

 

보통 인간 세상에서는 옆에서 거들어 주면 더 큰 힘이 되잖아요. 일도 잘 풀리고 주위에서 알아주니 성공한 사례가 아닐까요?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인간 세계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잡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고 싶은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지만 아직 예정된 때가 되지 않아서 체포 당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호응을 기대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예수님 보시기에 애초부터 인간은 예수님에게 호응할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잡아 죽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고 또한 이런 마음에서 예수님을 평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보통 인간 세계에서의 종교가들이나 교주들은 어떻게하든 대중들의 심성에 자신의 이미지를 새겨보려고 애를 씁니다. "나는 도을 터득했다. 이 행복의 길을 나만 간직하고 있으면 안된다. 세상에 나가서 이 도를 널리 펼쳐야지"라는 것이 종교 교주들의 의도입니다. 또한 대중들도 이런 절대적인 교주나 스승이나 선각자들이 나타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 마음이 갈피를 못잡는데 어디 훌륭한 선생님이 어디 없나? 이 컬컬한 심령이 진리의 말씀으로 시원~함을 얻고 싶다"라는 마음 가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라 도리어 체포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살벌하고 잘 화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에게만 국한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성향을 말합니다. 이는 곧 인간이 주님께 나오는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잘 이해하고 납득을 해서 정체를 알아내어 예수님을 따르는 식은 모조리 차단되고 절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차단에 대해 예수님은 증인에 관한 논쟁을 통해서 증명하고 계십니다. 율법에 보면, 살인죄로 고발되어 처형될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한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두 세 증인의 증언이 일치 될 때만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은 어디에서 사용하시는가 하면,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이해성과 관계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음을 증명하는데 사용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 쪽에서 거부해 버리면 예수님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듣기에 섭섭한 말이 됩니다. 예수님을 한 번 잘 믿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고 싶은데 예수님 쪽에서 시큰둥 하게 나오고 또한 체포 이야기를 들이 밀면 믿고자 하는 의욕조차 버리고 싶을 것이 뻔 합니다. 강한 차단이 예수님을 잘 믿고자하는 모든 선한 의도조차 가로막는 셈이 되지요.

 

이런 사실이 우리가 듣기에 대단한 슬프고 안타깝게 들립니까 아니면 도리어 우리를 안정하게 만들고 평안하게 해주시는 다행스러운 소식으로 들립니까?

어떤 자가 씩씩거리면서 나서기를 "예수님이 구원자라면 나는 성심 성의껏 열심을 다해 철저히 추종할거야"라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이런 거부가 대단히 못마땅할 것입니다.

 

반면에 그 어떤 인간의 추가적인 증거가 더 필요없이 예수님이 그저 계시다는 그 사실 하나로 예수님의 메시야됨이 충족됨에 대해 감격스러울 정도로 다행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어 주는 자들이 주위에 득실거릴 때, 비로소 예수님 다움이 완성되는 거라면 그 예수님은 인간에 의해 충족성이 채워지기도 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도 하는 존재자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그 어떤 인간의 반응과 상관없이 예수님 홀로 계신 것으로서 예수님의 모든 사명과 하실 일이 충족되는 이것이 진정한 예수님 상이다 이 말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린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만들고 놀고 있습니다. 그 때 어떤 어른이 지나가면서 모래성을 비웃습니다. "이 모래성아, 너는 아이들의 손 장난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할 불쌍한 신세이구나" 그런데 그날 그 바닷가에 태풍이 불고 해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어른은 생각했습니다. 내일 아침만 되면 모래성은 흔적도 없이 무너졌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모래성은 어느 한 군데 손상됨이 없이 건재했습니다. 모래성은 처음부터 아이들의 솜씨로 세워진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 어른이 하는 말이, "너는 너를 믿는다. 너 스스로 완성된 작품임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 모래성과 같은 존재입니다. 바로 이점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신앙인으로 하여금 든든하게 만듭니까! 왜 예수님은 사람들의 증거나 판단을 필요치 않는 겁니까? 그것은 홀로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이 때가 되면 자신을 체포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12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홀로 충족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빛이고 나머지 모든 이들이 다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온통 사방이 캄캄한 밤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여러분의 손에 손전등이 있다고 한다면 사방의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 수도 더욱 빛의 가치는 더 빛날 것입니다. 결코 주위의 어두움으로 인해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어두어도 동그란 빛의 자리의 밝음은 도리어 더욱 가치가 부각될 것이고 이것이 손전등을 갖고 있는 나의 자부심을 더욱 높여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약 주위가 손전등의 빛보다 더 밝게 되면 손전등 갖고 있는 손이 웬지 쑥스러워지고 부끄러워 질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앙적 세계의 득세에 대해 좌절과 낙담을 한다면 이는 빛을 빛으로 제대로 보고 사는 자의 바른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손전등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지면 그 때는 참으로 황당하지요. 바로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의 평가는 증거를 받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들의 호응도에 의해 빛이 더 빛 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확실히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과 율법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 평가에 나섭니다. "당신이 빛인 증거를 대라"라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우리 자신에 호응한 유력 인사들을 하나 둘 식 대동하든지 나열하는 것으로 힘을 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판단 논쟁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15절에 보면,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판단하는 식으로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내가 혼자 있어도 겹치기로 있는 것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누구와 누구의 겹치기 입니까?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겹치기입니다. 육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는 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예수님 계신 곳에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은, 기존 인간들이 믿는다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가짜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이 거론하고 율법을 거론하는 꼭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자 하니 결국에는 예수님을 체포해서 살해시키는 일 밖에 더 했습니까? 그러니까 애초부터 그들이 하나님 믿는다는 것도 엉터리 신앙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증거를 믿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증거에서 인간은 배제 되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증거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으며 예수님 또한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는 곧 모든 일단 하나님 믿고 난 뒤, 추가해서 거기에다 예수님까지 덧붙여 믿는 방식조차도 예수님은 거부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마치 며느리가 두 분의 시아버지를 모시는 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어느 한 분을 사랑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분은 덜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믿기는 오로지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만 믿으면 거기에 우리의 하나님도 함께 계시는 겁니다. 그 외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는 식의 신앙은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이런 자는 아무리 어두움이 짙어도 예수님만이 빛이라는 사실로 인해 조금도 신앙의 안정감이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정리하고 확인하게 해 주옵소서. 내 쪽에서 일일이 챙겨는 신앙이 아니라 완전하신 예수님을 빛으로 인정하는 믿음이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