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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 7:40-53 / 예수님은 누구신가?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 7:40-53 / 예수님은 누구신가?

정인순 2013. 12. 28. 11:33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2032037.mp3

 

 

예수님은 누구신가?

 

2002년 3월 20일 37강

 

본문 말씀: 요 7:40-53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오늘 본문에 보면, 치열한 공방전이 있습니다. 그 중앙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생긴 공방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실정과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예수님 아니더라도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월드컵 개최에 따르는 손님 채비에 바쁘고,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 마다 각각 신경 쓸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예수까지 신경 쓸게 어디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누구를 만나게 되면 먼저 자기 소개부터 하는 법이지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면, 상대방이 이점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죠. "나의 이름이 아무개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것입니다"라고 소개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관계가 성사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과연 누구냐?"가 유행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예수님 쪽에서 먼저 벼락 같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동 떨어진 예상외의 발언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반응이 엇갈려 나왔는데 오늘 본문 40-41절에 보면,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들 눈에는 예수님도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당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요?"라고 물음의 대상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들이 서로 서로에 대해서 "당신이 누구시요?"라고 묻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은 이렇다하고 확정지으신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6:5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당시 사람들과 땅의 짐승들을 모두 물로 쓸어 버리신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물의 심판 이 후에는 인간들이 많이 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창세기 8:21에 보면,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죄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나섭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 평가를 그대로 지니시고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전했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7:19에 나온 바와 같이,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라는 말씀을 서슴없이 하시는 겁니다.

 

이런 과격한 말씀을 하시면서 대중들 앞에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 여기서 오늘날의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들 눈에 띄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의 잠시 있었던 과거 인물에 불과합니다. 그 예수라는 자가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고 뭐라고 이해했던지간에 그것 조차 이미 과거의 일이라고 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만약에 이웃에 방금 이사 온 어떤 아저씨가 여러분보고 다짜고짜 말하기를, "이 나쁜 자야, 이 악하 자야,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항상 악했단 말이야"라고 시비 걸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물론 교회 다니는 점잖은 타입이라고 평소에 자부해 온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속으로 삭일 것입니다. "그래, 어디 미친 놈이 한 둘이야. 그저 못들은 걸로 하고 상종을 말아야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낮에 들었던 그 욕설로 인해 잠을 편히 잘 수 없습니다. 은근히 부화가 날 것입니다. 당장 이 밤 중이라도 그 집에 쳐들어가서 혼내주고 싶을 것입니다. "당신이 날 언제 봤다고 함부로 낯선 사람을 욕합니까?"라고 따지고도 싶습니다. 민감한 반응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가 없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하찮은 인간이 이런 평가를 내려도 발끈 반응을 가지는 법인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런 평가를 내려도 왜 요즈음 사람들은 무딥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남기신 각가지 말씀으로 인해 그 당시 사회는 상당한 빈응을 나타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그당시 바리새인들이 갖는 예수님의 인식만큼 우리들이 안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강단에서 다음과 같이 강하게 외쳤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죄밖에 지을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로마서 7: 18-20에 보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했습니다.

 

어찌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겠습니까? 모든 인간들이 다 이렇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분노를 가졌습니다. "너는 누구냐?"라고 대들었겠지요.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역시 인간들은 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인간들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모두 인간들이 스스로 갖는 모든 근본을 뒤집는 말씀이었습니다. 과연 인간들이 호락 호락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했을까요?

 

오늘 본문 49절에 보니, 바리새인들의 평가가 나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바리새인들은 평소에 늘 율법에 죽고 율법에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한 마디의 말을 해도 율법에 합당해야 진리가 된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입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화가 나서 예수님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주장과 그 행동을 나름대로 유심히 관찰해서 과연 율법과 맞는가 아니 맞는가를 따져서 신중하게 내린 결론이 바로 "예수는 율법을 모르는 저주받을 자이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율법에서 어떤 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지를 알아 봐야 합니다. 레위기 24:23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니 그들이 저주한 자를 진 밖에 끌어 내어 돌로 쳤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 하신대로 행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실제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저주의 형벌을 행사하라고 하셨는가요? 레위기 24:13-16에 보니,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저주한 사람을 진 밖에 끌어 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찌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극히 위험스러운 자이요 더 나아가서 여호와의 이름을 훼손하는 자로 보였습니다. 인간의 근본을 뒤흔드는 사상을 유포하는 자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조치에 따라 저주해서 돌로 쳐죽여야 마땅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민감한 반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무지 몽매한 인간들이 모르고 하는 소리니 우리가 간여할 필요가 없지요"라는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취지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측은하게 보자는 안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얼마나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고 계신가에 대해 소위 예수의 제자라는 우리들이 같이 통감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진영에서 지금 이슈가 된 것은 다음 아닌 "예수가 누구인가?"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소위 예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이 과연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시되는 문제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자에 대해 봐주고 아니 봐주고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심각하고 무엇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시는 가에 대해 우리가 같은 느낌을 갖느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한발국 한 발자국이 모두 사생결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한 일로 끝날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도 계속해서 일어나야 될 일입니다. 그 일은 주의 종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을 전하는 일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상급은 딴 것이 아니라 이 귀한 복음을 전하는 것, 그 자체라고 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심각함을 같이 심각함으로 동참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까?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하는 그런 일에 종사하고자 뽑혀 나온 자들이 우리들입니다. 이 어찌 영광스러운 직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느 의사가 감히 천국의 복음을 전할 고상한 사명을 받았단 말입니까? 천국의 내용과 소식을 전하는 이 일은 직분은 미국 대통령보다 더 고귀한 직분입니다.

 

이 막중하고 고귀한 일은 우리 자신들이 사랑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저 남의 일처럼 취급하지는 않습니까?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소중합니까? 정말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된 성도라면 이 지구라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대범함이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또렷하게 세상을 봐야합니다. 복음을 개입해서 확실하게 세상을 요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허무와 결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장난 삼아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닌데 우리가 도리어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 무관심 할까 염려됩니다. 특별히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이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