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 6:49-59 / 예수님의 살과 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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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예수님의 살과 피
2002년 2월 6일 31강
본문 말씀 : 요 6:49-5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성경 책을 들여다 보고 있다고 여기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직접 이 설교단에 서서 이 말씀을 입으로 그대로 외치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가 당장 이 말씀에 수긍이 가고 믿음이 갈까요? 아니면 옆에 서 있는 저보고 해설을 부탁하게 될까요?
실제로 이런 상황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황당하게 들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들과 같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완전히 다른 바탕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바탕이 과연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점검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같은 바탕이면서도 자칭 "예수님을 믿고 있노라"라고 오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51절부터 터져 나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어야 합니까? 만약 우리가 대꾸하기를, "주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살을 먹고 영생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나온다면 우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사실상 바탕이 똑같은 겁니다.
52절에 곧바로 유대인들의 대꾸가 나옵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하겠느냐" 즉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마치 광야에서 떡을 주워 먹어 자신의 몸을 살리듯이 예수님의 살을 자기 손으로 먹을 수 있다면 먹어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요구는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단호하게 거부됩니다. 5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일방적인 예상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진정 자신의 살을 먹게 할 의사가 있다고 한다면 그 다음 말씀에는 인간들이 자신의 살점을 먹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언급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술 더 떠서 이번에서 자신의 피까지 거론하십니다. 자신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대화를 끌어가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전면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재 규정하시려는 겁니다. 즉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어도 죽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도 인간을 살릴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유대인의 조상들은 그것을 먹음으로서 자신을 살리려 한 것입니다. 정말 살 수 있기 때문에 만나를 주셨다면 그것을 먹는 자는 결코 죽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어도 그들은 죽었습니다.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가 생명인 것을 거론하면서 그 살과 피를 먹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추가적으로 하지 않는 것인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무엇을 먹어도 죽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지금 자신을 산 자로 여기고 죽음은 단지 저만치 삶의 끝 자락에서나 만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릴 때까지 살아 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바로 이와같은 의식 자체가 죽음이라는 겁니다.
즉 살아 있으니 살겠다는 의식 자체가 사실상 죽어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생각이고 도저히 살 수 없는 자이기에 나올 수 있는 발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살과 피를 언급하신 것, 인자의 살과 피가 없는 자는 그 누구라도 이미 죽은 자라는 선언입니다. "살아 있는 자들아, 어서 와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고 더 살아라"가 아니라 "누구야? 인자의 살과 피도 없으면서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자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자의 살과 피를 먹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무엇이 없는가를 말씀하시므로 모든 인간은 사실상 죽은 자며 더 나아가서 살 권리 조차 없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소위 신앙 생활이라고 한답시고,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이 기본이고, 일단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평소에 원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받아내야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들에게 있어 구원의 기쁨이란 사실상 미진한 겁니다. 충족되지 못한 구원이기에 모자라는 부분을 더 채워나가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이들은 완벽하게 죽어 있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는 겁니다. "너희들에게 인자의 살이나 피가 있기는 있나? 없으니까 무엇이라도 더 채워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인자의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자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예수님, 완전히 죽은 자를 이렇게 졸지에 살게 만들다니요. 오,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라고 하다가 그 다음날도 꼭같이, "예수님, 완전히 죽은 저를 어찌 갑자기 살려 내십니까. 정말 주의 능력은 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다음날도 꼭 마찬가지 고백을 할 뿐입니다. 즉 살 자격도 없고 살 권한도 없이 그냥 한없이 죽어 있는 것이 당연하고 지극히 합당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무조건 살려주시는 이 은혜가 놀랍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으로 더 채울 필요도 없고 더 원할 입장도 못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런 식으로 소개합니다. 빌립보서 4:3에 있는 말씀입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에 보면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편지하는 심정은, 각자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으면 더 이상 더 바랄 필요조차 없다는 겁니다. 인자의 살이 어떻게 생겨나며 인간의 피가 어떻게해서 생겨납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셔야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광야의 너희 조상들도 만나를 먹어도 죽었다는 겁니다.
광야 때의 사람들은 지금 유대인을 대표하고, 지금의 유대인들은 인간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또한 죽습니다. 이로서 예수님도 죽고 인간도 죽는 그런 죽음의 세계에 함께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죽음의 세계에서 자신의 죽음을 마땅한 것으로 인정해야지 왜 살려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살아있는 몸이 아직 살아있으니 이제 더 살아보겠다는 심사로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우리가 먹을 수 있느냐?" 라고 의심을 가지고 다툰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죽음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온 태도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죽음의 세계인 것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의 세계에서 아무리 몸부림치고 무엇을 먹어도 죽습니다.
이 점을 예수님은 그들에게 알리고자 자신의 살과 피를 거론하신 겁니다. "너희들은 살 수가 없느니라"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영생을 얻고 구원받은 자들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인데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 죽음의 세계에서 살아났습니까?
그들은 어떤 식으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게 된 겁니까? 혹시 유월절날 최후의 만찬에서 먹은 음식이 효과를 봐서 그러합니까? 아니면 그 뒤 정기적으로 성만찬을 벌려서 거기서 먹은 떡과 포도주 먹는 식으로 생명을 얻어 챙겼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은 다 미신이요 마술이요 주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고 영생은 얻은 것일까요? 요한복음 20:37-39에 보면, 도마라는 제자가 예수님의 손에 난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 자국을 만져보고 난 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본 것으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31절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자신의 죄와 관련있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지 않고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인자의 피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말씀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아직도 우리들이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자신의 죽음이 이해못하는 상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무관한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자신과 다 같이 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죽음으로 끝장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추가적으로 더 원해서는 더 큰 구원의 기쁨을 얻었노라고 말 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죽어 있어야 하고 당연히 멸망 당해야 하는 것이 우리 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오늘 본문 54절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날에 살려낸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겁니다.
자, 만약 여러분들이 요한복음 20:31절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참 생명을 얻은 자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 본문을 바라보세요.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되십니까? 아니면 그 당시 유대인들처럼, "그런데 예수님, 우리가 어떻게하면 예수님의 살점을 먹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질 것입니까?
우리의 바탕은 이미 예수님의 살과 피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아, 나를 위한 십자가 죽으심이구나"라고 믿게 되는 겁니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가 그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된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에서 일방적으로 살림을 받은 것으로 성이 안차서 세상 것으로 기쁨을 보충하려는 이 자체가 죄악된 것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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