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 6:30-40 / 광야와 생명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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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와 생명
2002년 1월 23일 29강
본문 말씀: 요 6:30-4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 는 일이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현대인들에게 듣기에 난감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늘에서 뭐가 내려온다는 겁니다. 우리들은 알지요. 겨울철에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여름 장마 철에는 하늘에서 비가 옵니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서 뭔가 내려 온다고 하니 우리는 늘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난처함은 오늘날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뭔가 내려와야 한다니까 유대인들에게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은 경험한 적은 없지만 들리는 이야기와 성경에 의할 것 같으면 옛날 조상들은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뭔가 부합되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늘에서 만나라고 하는 양식이 실제로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과연 그 때 그 모세와 같은 분이라면 그 모세처럼 실제로 하늘에서 뭔가 내리게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모세와 같은 분이라고 간주하는 표적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뜻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그 당시 사람들과 예수님과 핀트가 어긋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뭔가 내려오면 자신들은 우르르 쫓아가서 그 떨어진 것들을 자기 손으로 긁어모아 입으로 집어넣어 배 부르면 그런 것이 곧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간다', 혹은 '하나님에 의해 생명을 얻었다'하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생명의 떡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39-40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듯이,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넘겨준 자를 반드시 영생주고 다시 살려 내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명의 떡이란, 일단 하나님이 하늘에서 뭔가 떨어뜨려주시면, 자기 손과 발로서 뛰어다녀서 먹을 것을 챙긴 후에 그 떡으로 자기가 사는 식이고, 예수님의 뜻은, 예수님이 알아서 택한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자기가 축적해 놓은 지식에다 더 중첩해서 지식을 더하면 신앙이 그만큼 증가한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있는 것도 비워야 합니다. 자꾸 축적해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주부가 쓰레기차가 올 때마다 집안에 있는 쓰레기를 말끔히 비우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믿기를 원하는 바는, 바로 예수님 자신만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자신이 믿는다는 사실을 의지하는 것으로 자신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의 고유의 능력으로 알아서 우리가 구원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아는 것에다 또 아는 것을 보태어 그것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마치 만나를 자기 손으로 긁어모아 먹고 또 먹고 하는 식으로 살려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그것은 또 믿고 추가해서 더 믿고 하는 식으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 차이를 여러분은 잘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순전히 예수님에 의해서만 구원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같은 원리가 하늘에서 '만나'라고 하는 양식이 떨어질 때도 같이 해당되는 걸까요?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지 그 당시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고 안 믿고 있었을 뿐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사람들이 안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광야란 죽음의 세계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꼭 숨이 끊어질 때만 죽음이라고 여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틀렸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보면 아담이 이마에서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죽음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행복이 넘쳐나도 그 가운데도 역시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이 죽음이 기운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죽음에서 저만큼 멀어져버렸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광야로 보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네들과 함께 있기에 이제부터 무척이나 편안하고 신나고 행복한 나날이 이어질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상 죽음의 세계인 황량한 광야로 내몰자 그들에게 있어 이제 죽음이란 무관한 것이 아니라 곧 자기 현실의 전부였습니다. 마실 물도 없었고 먹을 양식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이 곧 죽음과 함께 있는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구원이라는 현실이 죽음으로 찾아온 겁니다. 그 죽음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죽음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최소한의 생존 조건만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이 아닌가 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처럼 광야란 죽음의 조건 뿐만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속내까지 숨길 수 없게 만드는 공간이었습니다. 곧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하나님이 마련해 주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대들었던 그 광야이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에게 대들고 죄짓고 원망해도 만나라는 하늘의 양식은 줄기차게 중단없이 일관성있게 계속 내려주셨다는 겁니다. 그 일관성은 인간들의 태도와 전혀 무관하게 이어졌습니다. 결코 모세가 기분따라 주고 말고 한 양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32절에서는 그 하나님을 예수님은 '내 아버지'라고 하는 겁니다. 즉 전에 일관성 있는 만나를 내려주시듯이 이제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일관성 있게 영생을 주기고 마지막 다시 살리는 일을 아들인 예수님 자신에게 맡겼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자신에게 연결시켜도 사람들은 그 의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6절에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사람들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도저히 예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본질이 죽음인 것을 알게 해 주시고 늘 그 자리에 서서 영생주시는 예수님의 공로만을 뚜렷하게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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