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6:1-15 / 오 병 이 어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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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병 이 어
2002년 1월 9일 27강
본문 말씀: 요한복음 6:1-15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성경 출애굽기를 보면, 수 십만이 되는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무진 고생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먹을 것이나 마실 물도 변변치 못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을 통과했습니다. 인간들 생각같았으면 성사되지 못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성경을 보고서 압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그 광야를 통과 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우리들도 그런 광야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조건 하나만 달랑 가지고 그런 광야에 뛰어들어 볼까요? 신앙 생활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 이런데서도 들어납니다. 옛날 이야기나 영화를 보게 되면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고생하는 것을 우리가 쉽게 관람하고 몇 분만에 쭉 읽어내려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아마 길겁을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광야 생활을 그냥 이야기로 읽고 동의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라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러한 상황이 그대로 우리에게 찾아오면 우리는 총력을 다하여 하나님에게 대들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찾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나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믿고 나왔는데 이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할 것입니다.
물론 직접 하나님보고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옛날 광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원망을 눈에 보이는 모세보고 퍼부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자신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주장한 모세의 말만 믿고 나왔기에 이 고생의 책임을 몽땅 그에게 돌리려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있음을 믿으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주장하는 특정인을 말을 참고로 하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꼬이면 "당신이 믿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손해봤다"하는 식으로 대들기 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하나님께서는 그런 광야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으로 우리들을 의도적으로 던져 놓으므로 비로소 우리에게 참 신앙을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림이나 이야기 속의 여호와와, 그림 속의 출애굽으로 참 신앙을 배우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런 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출애굽 때의 사람들은 모세와 더불어 있었을 뿐이지 하나님과 더불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나오는 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옛날 사람들이 모세를 만난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손에 잡힐 만한 성과를 쥐어 줄 때 그 성과를 분석해서 계속 믿을지 아니믿을 지를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님을 대하면서 그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예수가 자기네들에게 뭔가를 해 줄 때만 "하나님과 함께 있는 예수"로 인정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 모세 때와 마찬가지로 만약 그들이 아쉬운 것을 채워주지 아니하면 예수님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예수를 배척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흔히 신앙에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열매'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이란 얼마든지 자기를 변명하는 입장에서 흉내내고 모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열매가 아니며 눈에 보이는 계시는 계시가 아닙니다. 아직도 그런 것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믿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 뿐만 아니라 모세를 따라 나왔던 사람들도, "오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면 모든 것이 안심이요 정상이다"이 믿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였습니다. 적군은 장대같이 크고 자기네들은 적들에 비해서 메뚜기 같은 줄을 알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적들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음을 드러내게 만든 것은 모세 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는 것에 대해서 네가 책임져야 한다!" 보세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 이처럼 광야라는 절망 속에서 가려지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도 일종의 광야입니다. 남자만 해도 5000여명이 되는 무리들이 광야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있다는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모세 때와 같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여부를 보고 따져서 믿어 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그 자체 만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광야 때를 재현하십니다. 배고픈 그들에게 뭔가 먹여야겠다는 마음을 미리 갖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상식 같으면 아이 도시락 가지고 축복하시고 기적을 베풀어서 그냥 먹이시면 될터인데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인간들은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는 자들이 아니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부터 끄집어 내고자 하십니다. 빌립에게 묻습니다. "어떻게하면 저 많는 사람을 먹일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물으시는 저의는 따로 있었습니다.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빌립에 대한 시험을 먼저 하시면서 떡을 나누어 주시려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이 절망 가운데서 자신의 한계성이 여지 없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이 대목을 단순히 과거 이야기로 듣지 마시고 실제로 우리가 이 상황 속에 잠입했다고 여기고 또한 나중에 예수님께서 내린 조치를 전혀 사전에 몰랐다고 칩시다. 그렇게 되면 이 빌립의 대안에 그 어느 인간인들 동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절망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성도를 다루시는 것이 꼭 이런 식입니다. "앞 일을 예상치는 못하지만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만해도 저는 충분합니다."라는 태도를 갖는 것만 신앙입니다.
흔히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이것을 주시옵소서. 그러나 제가 이것을 달라는 것이 저의 욕심에서 나온 마음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아시겠지요"라는 식으로 토를 답니다. 그러나 이런 토를 달았다고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던가요? 아마 얻었다면 악마한테 얻은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의 기도는 허용하시면서도 그 기도대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절망의 상황을 극복할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또 하나의 한계성을 드러내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안드레의 의견입니다. 안드레는 어린애의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 역시 사람을 떡으로 먹이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떡 먹이심을 하나의 표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떡을 주시면서도 그 떡을 배부름이 아닌 다른 것을 알리고 겨냥하는 식으로 사용하신 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2-13절에 보니,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떡을 단지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으로 목적 달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떡을 가지고 12광주리의 떡 바구니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먹는 떡은 배 속에 들어가서 사라져 버리고 남지 않는 겁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이 지상에 남기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떡 12광주리로 묘사되는 참 이스라엘의 출현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겁니다. 요한복음 6:39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진정 예수님이 남기고자 한 것도 바로 이런 참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사람들이 먹어 없에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사람들 앞에 남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참 백성들 뿐입니다. 그 떡은 인간들이 원하는 그런 떡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목숨입니다. 곧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원토록 남는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겁니다.
12광주리의 떡을 거두어라고 명령하신 것은, 배나 채워주겠다는 취지로 떡을 나누어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산으로 떠나 가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배고픈자의 임금님이 아닌 겁니다.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게 될 그들 만의 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진정 참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무엇으로 눈치채야 합니까? 배부르게 할 떡입니까? 그들은 배반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종적인 증거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피만이 생명이요 양식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영원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합니다.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는 떡도 먹지도 않았고 물 위를 걷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십자가 죽어가는 몸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만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같이 십자가 달려 놓고서도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이 십자가 형틀에서 내려오게 하면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하겠소"라고 말입니다. 그 사람은 지옥갔습니다. 신앙은 참으로 이렇게 불가능한 것이기에 참 백성만에게만 이 은혜가 돌아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다움과 예수님다움을 확인하려 하지 않게 해주시고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참으로 구세주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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