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5:10-18 / 안식일과 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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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안식일과 죄
2001년 12월 5일 22강
본문 말씀 :요한복음 5:10-18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5: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 사는 세계에 들어오셨다는 것은 큰 충격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그냥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의도적으로 내려오신 것만 생각해도 인간은 그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라야 합니다. 그냥 구경 삼아 오신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일일까요? 그것은 그동안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온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여주러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 섬기는 방식에 대해서 자신 만만했습니다. 누가 와서 섬겨도 자신들의 하나님의 섬기는 방식에 대해서 의의를 걸 사람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책에서 시키는 대로 다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기존 인간이 상상조차도 못할 방식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나타나시므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둘로 구분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의 방식을 채택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요청 받는 입장에 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하나 지키는 것도 그동안 인간들이 지켜 왔던 방식과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이해하는 방식과 구분됩니다. 어느 쪽이 옳은 방식일까요? 물론 우리는 겉으로는 예수님의 방식을 따른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려면 기존의 우리가 살 던 세계를 포기해야만 하는데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예수님 방식을 따라간다고 큰 소리를 쳐놓고서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한 비난이 걱정된다면 이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이다'는 진리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 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당장 사람의 동태가 더 두렵다는 고백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간단한 논리가 성립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맞는 말인가?" "하나님이라면 그 말씀이 옳은 줄 인정하는가?" "그 뜻을 인정한다면 그 노선대로 갈 것인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주장만 늘어놓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과연 내 생활을 편하게 해줄까?" 혹은 "남들에게 비난받으면 나만 손해지 그런 노선은 안 간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38년 된 병자가 하필이면 안식일에 병이 나은 문제가 거론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생각 같으면 "안식일이나 다른 날이나 병 고치는데 무슨 장애가 될 수 있겠는가?" 하시겠지만 유대인 생각은 그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행위는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날에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14에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회당 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그러면 안식일은 그들 이론에 의하면 무엇 하는 날인가? 그 날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씻는데 주력해야 될 날이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누가 듣더라도, 심지어 하나님께서 보시더라도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만을 순종하는 갸륵한 신앙 그 자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들의 최고 수준의 신앙이 이 정도라는 것을 아시고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쳤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섬기는 방식에 있어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을 다 버리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인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 대해서 스스로 떠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들이 모여서 유대교 식의 하나님의 섬김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그 중의 하나가 안식일에는 병을 고쳐서는 아니 된다는 규칙이 생겨난 겁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이런 자칭 순수한 이러한 신앙심을 옹호해 주실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 14절에 나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 고침을 받았던 그 환자는 나중에 성전에서 건강한 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그 환자나 주위에 있는 유대인이나 사람들은 그 환자의 병이 나은 것으로 간주하겠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그 환자의 죄를 씻어주신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의 하나님 섬김에 의할 것 같으면 안식일을 죄 씻기 위해 일상적인 병 고치는 행위까지 금지해야 하는 것에 비해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섬김은 죄 씻음이 예수님 자신의 능력으로 그냥 나와 버리는 겁니다.
무엇을 금지하고 무엇을 행하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어 주시는 그 무엇으로 인하여 인간은 죄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달리 이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해서 예수님이 부여하신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시대가 되었음을 알리는 겁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성도는 기존의 모든 아이디어를 버려야 하는 그런 수모를 예수님과 더불어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8된 병자도 그런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병을 고쳐주지 않았으면 그는 안식일도 제대로 안 지키는 나쁜 자라는 욕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기존의 방식으로 죄 씻음 받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은혜로 죄 씻음 받아 병을 고쳤으니 더 이상 인간들의 방식이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이와 똑같은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씻어주고 예수님께서 병 고쳐 주시고 하는 것만 좋아 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새로운 핍박과 수모와 오해와 곡해를 당할 수밖에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제가 한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7:12-15에 보면,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지금 이미 청년은 죽어서 관속에 갇혀 무덤으로 이동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아예 관에다 손을 되니 무덤으로 가는 도중에서도 그 청년은 다시 살아나 버렸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예수님은 필요하지요? 참으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소중한 분이라는 것을 절감하겠지요?
그렇다면 누가복음 9:59-60의 말씀은 어떠합니까?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여기에 보면, 예수를 따르는 자는 아예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까지 내 팽개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당혹스럽습니까? 예수님이 좋다, 예수님이 귀하다는 할 때는 언제이고 이런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이고 뭐고 간에 도망치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섬김 방식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남에게 자랑거리를 갖고 싶을 때는 천하에 하나님 잘 섬기고 싶다가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때는 나 몰라라 합니다.
바로 인간들의 이런 성향을 확실하게 지적하는 대목이 누가복음 10:20에 나옵니다.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사단이 자기에게도 굴복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기쁨은 제자들이 행한 그 행함의 성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이 부여하는 그 자비, 즉 그들의 이름을 생명 책에 있게 하신 일방적인 사랑에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혜택은 결코 기존의 인간들의 하나님 섬김 방식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고 얻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 기쁨이 있는 자라면 주위로부터 당하는 수모나 혹은 아버지의 장례식보다 주의 복음 전파가 더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낫게 될 때에, 그가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건강을 회복은 이 환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수모를 받고 있습니다. "왜 안식일을 안 지키느냐?"고 말입니다. "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느냐?"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수모를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자랑하려는 것은 그 행위로 구원받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한 사람의 자유인이 되었기에 자유를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름을 생명 책에 일방적으로 적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것을 일부러 부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자유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결코 죄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한 것이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섬김 앞에서 기존의 방식을 버리지 않는 그것 말입니다. 끝없는 되풀이, 지루한 반복, 이것이 그들 유대인들이 하나님 섬김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어쩔 수 없는 반복 속에서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위로부터 오신 능력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꾼 이 질서, 이 원리를 세상 사람들은 알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우리는 그들의 한계성 있는 원리를 따를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은혜를 주신 그 사랑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비교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 책에 기록된 것만으로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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