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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5:1-9 / 38년된 병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5:1-9 / 38년된 병자

정인순 2013. 12. 28. 10:59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1112821.mp3

 

 

38년된 병자

2001년 11월 28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5:1-9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비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비의 흔적을 간직하고 인정하고 싶어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이 연못은 가끔 물결이 움직이는 연못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비의 천사가 내려 왔다는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자비가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먼저 이 자비를 낚아 챈 사람이 아니면 여분의 자비조차 돌아가지 않습니다.

 

즉 자비의 지점은 한 곳에 정해져 있고 그 지점까지 가는 것은 인간의 몫으로 남습니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기는 베풀지만 그 자비를 자기 것으로 삼는데는 여전히 인간이 해야 하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이 애써서 노력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비는 나의 자비가 되지 못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해 십자가 지신 것까지만 하시고 그 십자가를 믿고 아니 믿고는 순전히 인간의 책임으로 떠넘겨져 있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베데스다 못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자비의 혜택을 입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자신들도 이런 사고 방식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를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38년 동안 환자로 지냈다는 것은 끔찍합니다. 12살 때부터 아팠다면 50세까지 아픈 것입니다. 22세부터 아팠다면 60세까지 계속 환자로 지내는 셈이 됩니다. 사람의 생명이 몇 년 안되기에 38년이라는 세월이야말로 그 사람의 황금시기를 대부분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몸 아픈 정도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의 혜택을 입는 것에 대해 인간이 행할 몫이 남아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신앙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베데스다 못 가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자비와 그 전달 방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베데스다 못에 천사가 찾아오는 방식과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나타나신 방법입니다. 아마 우리들은 지금 몸이 건강하기에 이 두 개의 자비 제공이 지금 필요치 않고 여길지도 혹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38년 병자가 몸 소 느낀 예수님의 자비를 우리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38년 병자의 심정으로 돌아가 있어야 합니다. 이 38년 환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그저 저 연못 수면이 움직일 때에 거기에 자신을 넣을 줄 수 있는 사람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나는 국가와 민족과 교회에 큰 일꾼이 되어야지"라는 포부라든지 꿈이라든지 비젼 같은 것이 아예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장래를 위해 예수님의 능력을 어떻게 얻을 볼 수 있을 가를 아예 생각조차 안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몸이 튼튼하고 38년 째 몸이 안 아프고 있으니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저 세상을 향한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 주십사 라고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 건강 한 것말고 다른 종류의 자비를 예수님에게 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생각이 하나님이 자비를 먹칠하는 탐욕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우리가 그것을 이용해서 뭔가를 얻을 수 있는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우리들의 엄청난 큰 죄가 예수님의 자비로 녹아져 있는 상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모르니 자비도 곡해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진정 자비가 무엇인지를 원하신다면 이 38년 병자의 자리에 같이 누워 계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저 움직이는 연못에 스스로 못 들어가는 신세가 된 것에 대해 절망하고 또 한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38년 된 병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7절에 보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절망입니까? 자비를 눈앞에서 놓치는 것이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과연 하나님이 내려준 자비를 인간이 찾는 식으로 우리가 자비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비가 직접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자비의 연못이 성큼 성큼 걸어서 꼼짝 못하고 있는 이 환자에게 찾아와 덮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자비는 무엇까지 덮어주는 자비의 물결입니까? 38년 된 환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마치 자신의 찾아가서 가져오는 식의 잘못된 신앙 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오류 마저 예수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베푸시는 자비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곡해와 잘못된 견해까지 몽땅 이해하고 용납하고 그 죄를 씻어주는 배려도 함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가 치과에 가서 치과의사에 자신의 어금니가 아픈 것에 대해서 하소연합니다. "위에 아프고요 옆도 아프고요 잇 몸도 아픕니다" 그러나 마치 주사 맞고 한 숨 자고 일어나니 아무데도 아픈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것은 아예 그 이 전체를 뽑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면서 대속하러 하신 그 죄 속에는 이처럼 택한 자의 온갖 거짓된 선입감과 곡해와 무지와 음흉함까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38년 된 병자에게 있어서는 자비의 연못을 늘 지켜보면서도 그는 늘 절망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몸이 점 점 죽어가고 있고 말입니다.

 

이런 절망의 밑바닥에는 자비에 대한 잘못된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즉 "아무리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도 내가 획득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담"이라는 의식 말입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이런 무지까지 극복 할 수 있다는 것은 38년 된 병자의 절망적 자리와 그의 선입견에 같이 있어봐야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마 보다 더 절망 적인 상태는 역시 죽음의 상태입니다. 과연 인간이 죽어도 다시 살 수 있을까요? 로마서 6장에서는 예수님의 자비가 같은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6:3-4절에 보니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즉 예수님의 빈 무덤을 나의 빈 무덤으로 여겨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됩니다. 옛날 왕이나 귀족들은 순장제도가 있어 죽을 때 부인이나 하인을 산 채로 같은 묻어 죽게 했습니다. 하인이나 부인의 입장으로 볼 때 참으로 큰 절망입니다. "과연 이 인간이 나를 다시 저 세상에서 부활시켜 줄 수 있을까? 그만한 자비심이 발휘가 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정말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의 자비심 발휘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우리가 알아야만 합니다. 그 엄청난 혜택을 말입니다. 쓸데없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겠노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우지 말고 38년 병자 이상으로 절망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나는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무리 나를 설득해도 나는 당신을 안 믿을 거예요"라는 반발심까지 예수님이 용납하심으로 녹아진 그 죄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우리들의 보편적 죄입니다.

 

마가복음 9:1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즉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앞으로 펴 칠 종교 사업에 꿈이 부풀어있었습니다. 가족과 직업까지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니 예수님께서 이 꿈을 이룰 만한 그만한 배려는 해 주실 거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엉뚱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아니겠어요? 자신이 고난 받고 죽어야 된다고 하셨고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만 제자들의 관심사가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화제가 달라졌습니다. 전혀 그들이 예상한 미래상을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본인은 죽어야 되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겁니다.

 

이 일이 38년 병자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38년 된 병자의 잘못된 신학과 거기에 오는 절망까지 예수님이 다 담당해서 결국 자비심으로 그런 절망과 죽음에 이르는 병까지 극복해 주기 위한 죽으심이요 부활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자비를 받아 부활에 동참된 자가 되었으면 뭘 더 바랄 것이 있습니까? 부활의 생명을 받았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다 받은 겁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도저히 예상도 못할 자비의 내용과 그 범위의 크심과 깊으심을 더욱 알아 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예상치도 못할 자비로 찾아오십니다. 그 원인은 우리도 우리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채 이유 없는 깊은 절망감으로 상처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는 도리어 이 깊은 절망가운데 그동안 미쳐 깨닫지 못했던 예수님의 자비심을 더욱 무게 있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건강한 몸이 되었다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와 인류와 교회에 봉사할 생각하지 말게 하시고 늘 38년 병자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자비 안에 무슨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보다 많이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