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4:46-54 / 두번째 표적 / 2001년 11월 21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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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01년 11월 21일 20강 - 요 4:46-54 (두번째 표적) 두 번째 이적
2001년 11월 21일 20강
본문말씀: 요한복음 4:46-54
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4: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건져주기 위함입니다. 건져주신다는 말은 인간이 스스로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건져주신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어떠하기에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가를 우리 자신부터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이 전에 많은 선지자나 제사장들이 있었지만 그들조차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 이외의 인물은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 행하심은 우리인간이 어떤 처지에 있기에 우리 힘으로 구원될 수 없는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는 왕의 신하입니다. 그가 평소에 염두에 두고 있는 바가 하나님 보시기에 곧 그가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처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그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습니다. 난감해진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빌려보기로 합니다. 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전갈을 보내어 어서 오셔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아들이 죽기 전에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죽고 나 버리면 제 아무리 용하다는 예수님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끝에 보니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표적'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누구 시며 그 하시는 일의 내용을 알려주고자 하는 기적이 표적입니다. 자, 예수님이 누구 신가를 알리기 위해 인간이 병들어 죽어 가는 일과 마주 칩니다. 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가 있었다면 스스로 구원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왜 인간은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가?"에 초점을 두고 예수님이 하신 일과 연관시켜야 합니다. 왜 인간은 스스로 생각을 다듬어 천국에 이르지를 못하는 겁니까?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요구한 것은 자기 아들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모든 힘이 소진되는 것을 말합니다. 건강할 때는 펄펄 살아 있던 그 힘이 이제 빠져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이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자기 아들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에 얼른 예수님이 찾아주셔서 그 빠져나간 힘을 되돌려 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오늘 본문 49절에서 아들이 죽기 전에 와 달라는 것이 이런 마음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전에 내 아이가 안 아플 때, 튼튼할 때 그 때 누렸던 생명의 힘을 다시 채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힘을 다시 주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줘봐야 또 빠져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소용없는 짓입니다. 제가 한 예를 들겠습니다. 콜라 공장에는 콜라들을 실어 나르는 움직이든 선반 같은 것이 길게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콜라들이 늘어 늘어서서 조금씩 선반 따라 이동해 나가고 있습니다. 상표 붙이는데도 가야되고 뚜껑 덮는데도 곳에 들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콜라가 말을 하기를 "노동자 아저씨 난 뚜껑 덮는 것은 싫어요. 저를 전에 있는 지점으로 옮겨다 주세요"라고 요구했다면 직공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콜라야 그래봤자 소용없는 얼마 안 있어 또 이 지점까지 끌려오게 되어 있단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란 어차피 인간에게는 몰락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사라져 가는 생명을 왜 연장시켜 보려하는 겁니까? 없어져 가는 힘을 왜 도로 달라는 겁니까? 예수님도 다음과 같은 섭섭한 심정을 토해 놓으셨습니다. 48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찾는 그 사고방식이 글러 먹었다는 겁니다.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평소에 세상에서 배웠고 또 자신이 품고 있었던 의식을 들고 나와서 "예수님, 이대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하고 들이미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들이 달라고 하는 그 생명의 힘이 과연 진정한 생명의 힘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전에 그 아들이 가졌던 목숨과 생명력을 아무리 건강하게 지니고 있어도 그것으로 구원 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즉 구원되지도 못할 것을 달라고 예수님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예수님도 소용없다"는 그 아비의 생각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구출되어야 될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이런 엉터리 생각 밖을 전혀 빠져나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병들어 죽어 가는 아들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문제입니다. 죽음으로 몰락해 가는 아들을 보면 아버지는 그저 과거의 삶만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과거 자신이 알고 있는 방식을 따라 주는 조건 하에서만 예수님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따라 구원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을 문제성 있는 자기 세계에 합류시키고자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방식에 예수님마저 끌어당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예수님을 모독하는 짓들입니까! 이런 정신 자세로서 이 세상에 백년을 살아 봤자 자기 힘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지요. "내 아들을 낫게 해달라"는 요구에서 벗어나야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전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물동이를 버려 두었습니다. 물을 퍼먹고 사는 일상적인 문제가 예수님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그 여인은 알았던 것입니다. 물동이와 연결된 예수님은 아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얻고자하고 찾고자 하는 것과 예수님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겁니다.
뿐만 아니라 41-42절에 보니,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났던 마을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친히 듣고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을 듣고서도 믿고 구원받는 것에 충분합니다. 이적과 표적이 동반되어야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을 통해서 제대로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왕의 신하는 죽어 가는 아들 앞에서 엉뚱한 정신 자세를 지니고 예수님과 상관하려고 합니다. 자기 아쉬움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구원입니까? 자기가 살아온 인생 속에다 다시 예수님을 집어넣으려고 하니 이것이 무슨 빠져 나옴입니까? 아들의 죽음 앞에서 눈에 뵈는 것 없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곧 자신의 몰락으로 받아드렸습니다. 무너져 가는 자기 인생이라는 거대 댐을 땜질하고 수선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수능 수험을 대비한 특별 기도회를 열었다고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예수님께서 수능 점수를 올려주러 이 땅에 오신 분입니까? 바로 오늘날 교회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모독하면서 그 가짜 예수를 널리 전파하여 복음을 막는 악의 집단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다른 예수를 전파하는데 더욱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전에 첫 번째 표적을 행했던 가나 동네에서 일어난 두 번째 표적입니다. 첫 번째 표적은 포도주가 물로 변했던 표적이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 마리아는 예수님을 오해해서 그들의 아쉬워했던 포도주를 보충하는데 있어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책망하면서도 결국 물로 좋은 포도주로 변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본래의 사명은 이 세상이 예상치도 못하는 놀라운 기쁨을 이 땅 주러 오심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은 포도주가 아니라 생명과 목숨을 가지고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오셨습니까? 마태복음 8:17에 보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과 죽음을 대신 지러 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목숨을 대신지시고 그 대신 내어 놓는 것은 우리의 목숨이 아니라 다름 아닌 영생입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건강도 이 땅에서의 목숨을 연장을 주시고자 오신 분도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만들어내시면서 결코 예수님은 포도주를 만들어주러 오신 분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그 마을 사람은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이 말씀만으로도 예수님을 받아드렸습니다. 동일한 말씀이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들도 영생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0:3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생명을 얻었으면 다 얻은 겁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안 믿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예수님의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만져 보고하는 말이 "예수님의 나의 주시며 하나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도마가 예수님에게 이런 고백을 하고 난 뒤 자기 건강이 회복되었습니까 아니면 부자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자기 아들이 목숨을 건졌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오래 오래 살았습니까? 전혀 그런 것 없습니다. 도리어 순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죽음으로 미끄러져 가는 그 죽음의 선반 위에 예수님도 뛰어 들어와서는 같이 껴안고 기꺼이 죽음 속으로 들어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들 죽는데 같이 참여 있으니 이제는 너희도 나와 같이 죽고 다시 살 때는 너희들 목숨이 아니라 나의 생명으로 영원히 누려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만으로 영생 얻는데 충분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점을 보여주는 도구로 왕의 신하의 태도를 예수님이 도리어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아비가 믿고 집으로 내려가는데 중도에서 종들을 만나게 됩니다. "내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가?"하고 물으니 종들이 하는 말이 "열이 떨어져서 죽을병에서 나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언제 열이 떨어졌는가?"하고 물으니 "어제 7시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시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부활이 되시고 언제는 영생이 되시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교회 다니면서도 안 믿고 신자라고 자처하면서 안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 6명이 되는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못한 자들이 되지 마시고 또한 보고 믿으려고 하지도 마시고 지금 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불 신앙이 언제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까? 같이 죽자고 하시는 말씀을 도리어 구원이 되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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