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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4:27-38 / 추수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4:27-38 / 추수

정인순 2013. 12. 28. 10:56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1111419.mp3

 

 

 

추수

2001년 11월 14일 19강

 

본문 말씀: 요한복음 4:27-38

 

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4: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추수'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추수란 이 세상이 이제는 끝장났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종결되는 과정에 돌입했다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참으로 겁나는 용어를 예수님께서 내 뱉고 계시는 겁니다.

 

이 세상에 기대를 걸고 이 세상에 희망을 거는 자에게 있어 추수란 그런 희망조차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남은 일은 알곡과 가라지 골라내는 일입니다. 추수하기 이전에는 알곡이나 가라지가 같이 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추수는 이러한 공존의 시기를 멈추게 만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 선다는 것은 세상을 끝에 서서 본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추수라는 용어를 끄집어내시는 것은 새로운 관점 갖기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셈입니다. 사도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이분들이 가혹한 고생을 하면서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세상을 보면서 추수 때라는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요 자신은 그 일에 뛰어든 추수꾼 이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에 보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즉 '함께 즐거워 한 것'이 있기에 견뎌낸 겁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7: 30-31에 보면 사도 바울의 견해가 나와 있습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추수 의식으로 사도 바울은 일관했습니다. 사도는 끝 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올 때까지 다 왔다. 지금까지는 봐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일로 인해 이제부터는 추수시기에 돌입했다"라는 겁니다.

 

빈 라덴이 불쌍한 점이 무엇일까요? 국제적인 범죄를 저질러서 불쌍합니까? 아닙니다. 이 시기가 추수 때라는 것을 감 잡지 못하기 때문에 불쌍합니다. 그렇게 보면 빈 라덴 뿐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교회 안 다니고 제멋대로 사는 그들을 새심 부러워하고는 있지 않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추수 감각이 없이 교회를 다니면 골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유흥업소나 노래방 정도의 취급밖에 안 하는 것이 됩니다. 외롭고 마음이 허전할 때 위로 받기 위해 잠시 들리는 식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좀 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는 시대 관으로 바뀌라는 겁니다. 제자들 눈에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라고 여기겠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벌써 계시매 그것 자체가 곧 추수라는 말씀입니다. 그 증거가 사마리아 여인의 돌아옴입니다. 택한 자인 사마리아 여인이 돌아온다는 것은 곧 심판 날이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택한 자를 건지는 일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을 두 자로 말씀드리면 곧 '추수'입니다.

 

이러한 세상 것에 전혀 미련 두지 않는 예수님의 자유분방함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 자유 함에 참여되는 즐거움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그냥 교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의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추수의 현장에 부재중에 있도록 조치하면서 사후에 그 상황을 가지고 가르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추수 할 때는 제자들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안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추수 일에 그 어떤 인간들의 협조도 필요치 않는다는 겁니다. 단지 나중에 심지 않는 일과 노력하지 않는 일에 참여하여 거두는 그 재미만 누리는 방식만 허락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제자들을 빼돌리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묻는 질문을 통해서 파악 할 수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제자들이 말을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소 엉뚱하신 응답을 나타내십니다.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갖다 주지 않는 양식을 그 새 누가 갖다 주신 겁니까? 바로 사마리아 여인 자체가 예수님에게 있어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양식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고 온전히 성취하는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제자들은 알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먹을 양식을 사러 갔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여인과의 상황을 그들이 모르는 처지에게 마주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그들에게 알리려는 겁니다.

 

즉 추수와 양식을 바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양식이란 추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빵이라는 양식은 넉 달이 지나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얻고자 하시는 양식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제자들이 사다 주는 양식이나 먹으면서 이 세상을 살고자 이 곳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갖다 주는 것과 전혀 다른 양식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34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6절에 보면, 그것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입니다. 제자들의 부재중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마리아 여인만큼은 예수님의 양식을 알았습니다. 이제 그 사마리아 여인의 자리에 제자들이 들어와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의 한계를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양식을 자기들이 생각한 수준의 양식으로 잘못 해석해서는 안되고 그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추수는 아니 됩니다. 양식은 왜 먹습니까?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그러면 왜 삽니까? 양식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이런 세상 적인 입장을 대변해주는 자가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시는 이유는 그런 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것이 양식입니다. 즉 일하시기 위해서 사시는 것이지 먹기 위해 사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양식 작업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참여하기를 요청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수고해서 뿌린 씨앗의 열매에 제자들이 아무런 노력 없이 참여하는 겁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을 얻을 때 그들은 빵 사러가서 부재중이었던 상황과 같습니다.

 

우리는 추수라는 의식으로 세상을 보면서, 누가 예수님에 일방적인 은혜에 의해서 구원 되었가를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추수 때라고 여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추수하는 삶을 살기에 추수꾼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됩시다. 이럴 경우에만 예수님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끝을 알았다는 즐거움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게 하옵소서. 세속적인 즐거움 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