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4:11-26 / 사마리아 여인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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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 2001년 11월 7일 18강
본문 말씀: 요한복음 4:11-26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방인이죠. 따라서 이방여인의 마음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요즈음 식으로 따지자면 비종교적인 현실주의자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상대한다고 간주해 봅시다.
우리가 알다시피 평소에 사람들이 생각하고 구상하는 모든 개념이 두뇌 세포의 활동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이라든지 지옥이라든지 천국이라는 개념도 모두 이 머리부분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게 되면 인간의 신체는 흙과 더불어 섞여 분해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동안 인간의 머리 활동의 산물인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천국과 지옥이라는 같은 생각도 죽는 순간에 순식간에 날라 가 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반면 만약에 인간의 신체말고 따로 소멸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칩시다. 이것을 영혼이라고 불러야 될지 아니면 자의식이라 불러야 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뭔가 남아 있는 것이 있어 그것만이 따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했을 때 과연 이러한 가정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일상적인 일과는 상관없이 그 영혼이라는 부분만 따로 관리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즉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느껴질 때에 집중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성의를 보이면 될 것입니다.
어쨌든 이래나 저래나 종교라는 것은 평소에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도 불확실한 판에 그 모호한 것에 신경을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이러한 비종교적이고 설사 종교적이라고 하여도 현실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 서 있어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발전적인 말씀을 가지고 여인과 대화하십니다. 첫 번째는 현실적인 것에 집착하는 여인의 한계성과 두 번째는, 여인의 개인적인 인격 문제를 거론하여 그 인격성의 한계와 세 번째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인간을 찾으시는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 대화를 통해서 나타난 여인의 관심사는 내세에 관한 것도 아니요 천국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저 일상적인 관한 것입니다. 물을 계속 뜨는 것이 너무 번거러우니 좀 더 편하게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까 하는 겁니다. 두 번 째로 넘어가면 여인은 자신의 인간 됨됨이에 대해서 어떻게 회복할 기회를 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세 번째로 넘어가면, 인간이 어떤 식으로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느냐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인간만을 찾으시냐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인간 세계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지저분한 개인사 문제를 거쳐 정말 하늘 나라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를 제공합니다.
이런 절차가 단지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육적에서 영적으로 넘어가게 하시는 그 과정을 이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궁극적으로 개인의 구원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찾고 있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바입니다.
예수님의 출발점은 인간들의 구원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무리 사마리아 여인의 처지가 다급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선입니다. 불신자들이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천국 가봤습니까? 죽어봤어요? 장례식에 가보세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종교를 가졌던 간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으면 그만입니다. 저도 제사 드리지만 죽은 귀신이 와서 내 아내가 차린 음식을 먹는다는 이야기는 본인도 믿지 않습니다. 제사란 그저 가족끼리 오랜만에 만나는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천국 지옥이 있다면 왜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안 다니고 있는 겁니까? 그만큼 신빙성이 없다는 겁니다. 천당, 지옥 이야기는 소수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허약하고 의지력이 강하지 못해서 나온 발상에 불과합니다. 겁이 많거나 자기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감이 상실해 있는 사람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방책에 불과합니다. 즉 자신의 마음이나 편해보자는 이기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겁니다. 실제로는 죽으면 모든 것이 그냥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과연 천국, 지옥이 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저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천국 가기 전에 천국을 만드신 분이 이미 2000년 전에 먼저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인간의 틈바구니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사람이 죽어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진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2000년에 오신 그 분이 하나님 당사자인 줄을 저는 믿습니다. 어떤 이들은 알라신을 섬겨야 한다, 어떤 이는 석가모니의 말이 맞다. 어떤 이들은 공자 말이 옳다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잠재우고 실제로 하나님 그 자신께서 사람이 되셔서 오신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사람들이 천국에 못 가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믿는다 할지라도 천국에 못 가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해도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먼저 하늘 쪽에서 누군가가 오셔서 그 사람을 데리고 가주어야 구원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을 만졌고 떠밀고 같이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죄가 있기에 못 가는 겁니다. 천국, 지옥이 있다는 이야기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구원해 줄 수는 능력까지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의 이름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렸던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본인이 대신 받겠다는 겁니다. 대신 채찍을 맞는 사랑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완벽한 법만 있으면 그것을 해독하고 지켜서 천국을 들어가겠다고 나섰지만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 대해서 그들은 그 하나님을 사형시키는 것으로 처리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고 했습니다. 요한 복음 1:17에 있는 말씀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한 것, 올해 수능시험에 나올 이야기입니까? 정말 중요한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논외로 제쳐두는 그런 세계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여러분은 자부심을 느끼고 절대로 남들에게 꿇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겁니다. 끝이 나쁘면 아무리 신나고 멋진 경험을 했더라도 파멸입니다. 끝을 잡았으면 모든 것을 잡은 겁니다. 마치 누구처럼 말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말입니다.
행실이 옳지 못해서 남편 다섯을 갈아치우고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사귀고 있는 여인입니다. 동네방네 소문나면 이런 웃음거리도 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여인도 구원이 되었다면 우리가 구원될 수 있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일까요? "누가 뭐래도 예수님은 하나님 그 본인인 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인 줄 저는 인정합니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할 때는 우선 심판을 전제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심판이 없다면 구출이라는 말 자체로 생겨날 수 없겠지요. "그래 그래 다 들 각자 잘 살아라"하면 그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구원자 이전에 이 세상에 대한 심판 주이기에 구원자의 뜻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에 천사가 왔을 때 롯이 천사와 함께 한 집에 계속 살면 되는데 왜 롯은 그 동리를 떠나는 겁니까? 그것은 그 천사는 심판의 천사이기 때문에 롯 만을 특별히 거기서 구원해 주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할때 만 롯이 거기서 나와야 될 이유가 성립되는 겁니다. 롯의 입장에서 이것보다 더 큰 중요한 명령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천사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택한 자에게 찾아듭니다. 그 단계가 3단계입니다. 첫 번째,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한계성 지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 다니고 "주여, 주여"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우리는 일상적인 문제에서 한발자국도 자유로운 적이 없습니다. 내 편한 것, 가족의 안정, 안락한 미래, 여유 있는 환경, 인기 높은 것, 궁극적으로 나의 자존심 유지하는 것에서 매달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직접 만난 그 현장에서는 물 뜨는 문제의 편리함을 중점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일상성의 한계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15에 보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여인의 답변이 핀트가 잘 안 맞지요. 여기서 예수님은 핀트를 제대로 맞추기 위해 이번에는 여인이 보기에 핀트가 안 맞는 요구를 하십니다. 즉 "남편을 데려오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남편과 생수 운반하고 문제 상관이 있습니까? 남편을 생수 운반책으로 사용하겠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대화의 핀트 안 맞음의 원인이 여인은 계속 자신의 죄악을 숨기고 있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모르니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의 의미도 모르고 먹는 자연수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이나 돈이나 생의 행복이나 편리함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예수를 찾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택함 받은 자녀는 예수님으로부터 개인적인 지적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즉 "네가 과연 물 확보 정도로 괜찮아질 인생을 살았느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생활을 문제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이 여인의 총체적 하자가 무엇이냐 하는 점을 알리고자 하시는 겁니다.
여인이 보기에 예수님은 도사입니다. 정말 선지자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인은 단순히 자신이 비밀이 들켰다는 것뿐이지 그 흠집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또한 이 여인의 한계입니다. 동시에 모든 종교인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면 된다하고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꼭 가서 예배드려야 하나님이 받는다는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미 물 문제는 건너갔습니다. 자신의 행복 문제도 이미 건너갔습니다. 정작 이 여인에게 닥친 문제는 과연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 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귀착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여인은 근본 문제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구원받는 쪽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받고 싶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예배를 드렸다는 근거로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매정하게도 그리심 산의 예배와 예루살렘에서의 예배 방식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이로서 인간은 자신의 구원받는 방식은 의미가 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 쪽에서 출발해서 구원받을 길이 완전하게 끊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애초부터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려 주러 오셨습니다.
구원이든 예배든 모두 하나님 소관입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 중의 하나가 되어야 되지 인간이 벌리는 일이 되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입니다. 이제 사 예수님이 나서실 차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데 그 때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과 진리의 예배는 메시야가 와야 비로소 밝혀지는 상황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이 여인도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묻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메시야가 먼저 와야 그 다음에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그 메시야가 달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당사자가 바로 메시야라는 겁니다.
마지막 심판이 오기 전에 먼저 심판 주께서 이 인간 세계에 개입하셨습니다. 모든 내막과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에 쉽게 관심 둘 인간들이 아니겠지요. 예수님은 일상적인 문제로 오셔서 그 일상성에 묶여 사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시고 그 한계성은 곧 욕망과 죄로 인한 한계성이며 이 한계성을 극복할 그 종교적 묘책이나 비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메시야가 홀로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것도 없는 주제에 그래도 자기 잘 난 맛으로 겨우 겨우 버티고 살아가는 저희들의 한계성을 깨닫게 하옵소서. 미리 심판 주를 만나고 그 분이 우리 대신 행하신 사랑을 더욱 더 깊이 알아가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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