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4:1-10 / 사마리아의 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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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사마리아의 길 2001년 10월 31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4:1-10
4: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4: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4: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육시쯤 되었더라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모든 만물에 관한 권한을 가졌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분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 영생을 주고 안 주고는 순전히 예수님에게 달렸습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이 사실을 사람들은 안 믿으려고 합니다. 대단히 거북스러워합니다. 차라리 "내가 어느 교회에 30년 간 충실히 섬겼더니만 결국 구원이 되더라"하는 사실에 더 친밀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은 끝까지 가도 구원이 성사되지 못합니다. 기본은 끝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영생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소관입니다. 우리 중에 영생 받은 분이 계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거저 받은 사람입니다. 요한 복음 6:38-39절에 보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내게 주신 자'가 따로 있습니다. 이들은 구원에 있어 탈락되는 경우도 없을뿐더러 더 나아가 이 사람에게만 구원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이 된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늘 유동적이 것이 됩니다. 물론 확실치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님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신학을 하는 이유는, 이 기본적 진리를 확인하기 위함이 되어야 합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주셔야 만 하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기본을 잡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나 3장까지의 이야기라면 4장부터의 이야기는 이 기본이 실제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실시하느냐 관한 겁니다. 공짜로 영생을 주는 그 과정이 어떠하며 어떤 상황을 만들어 나가느냐는 겁니다. 물론 제자들도 오해하고 주변의 사람들도 오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에 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세례 요한 활동에 대해서 큰 곡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신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사람들이 점차 예수님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란 말입니다. 그들 보기에는 세례 요한의 세례나 예수님의 세례나 모두 인간 쪽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따내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도 나름대로 구원을 위한 노력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은 토를 붙입니다. 2절에 보니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즉 바리새인 식의 구원 방식을 세례는 별거 아니라는 말씀을 세례를 통해서 구원을 따낸다는 발상 같은 것은 예수님에게는 아예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성경에서는 미리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세례 받았습니까? 혹은 사전에 세례 받으려고 애를 쓴 적이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세례 요한 편이었는데 예수님 편으로 귀화했습니까? 예수님과 제자 무리들이 왔을 때 이 여인이 환대했습니까? 아닙니다. 설사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영생 주시는 분 인줄 알았더라도 예수님이 직접 영생을 주지 아니하시면 그 여인은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예수님 소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 복음 3장에서 언급한, 모든 만물이 다 예수님에게 맡기신 여파요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 걷어치운다 할지라도 여전히 변치 않을 진리는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주님만이 영생을 주신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이 진리만으로 충분합니다. 걷어치운 진리를 아까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3:7절에 보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이 아무리 해도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전권을 쥐고 계신 분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해야 오늘 본문이 해석됩니다.
사마리아라는 지명은 우리들에게 좀 낯설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체 땅이 종교의 땅이요 신앙의 땅이요 계시의 땅입니다. 곳곳에 하나님 자신의 계시를 발생시켰습니다.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리고 또한 그 하나님은 일관된 원리와 원칙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사마리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 배제된 땅으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버림받은 땅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시므로 여기에 새로운 계시가 담기게 됩니다. 즉 버림받은 땅에도 영생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그 어떠한 배제나 거부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어떤 의도에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사마리아 여인을 만남으로서 다시금 확인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구원의 반열에서 탈락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족속이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시비 걸고 나서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차별화를 받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열왕기하 17:24에 보면,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들은 정책적으로 여호와 종교를 반대하기 위해 외부에서 이민 온 자들입니다. 뿐 만 아니라 에스라 4:10절에 보면,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전을 새로 개축하는데 방해나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과 전통적 유대인들 사이에는 감정이 퍽 좋지 않습니다. 앙숙 관계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한 대꾸를 들어 보세요. 9절에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 이러라"
이렇게 보니 사마리아 여인을 싫어하는 유대인이나 유대인을 싫어하는 사마리아인이나 다 마찬가지 태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땅으로 접어들었고 왜 일부러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먼저 관계를 열었을까요?
그것은 마태복음 10:5-6절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전도 대상은 분명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각처에서 이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니까 이 복음 적 구원의 취지를 누가 거부하고 있느냐 하면, 바로 스스로 이스라엘 집에 속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애초에 구원의 반열에 속하지도 않는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 뿐 만 아니라 자칭 잃어버린 양이라고 알고 있는 이스라엘인들도 또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친히 찾아내어야 될 잃어버린 양이라면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할 리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싫어하는 이유나,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 싫어하는 이유나 모두가 '잃어버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자아상을 갖고 있는데서 비롯됩니다. 참된 '잃어버림'은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찾아들 때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들 착각하기를 누가 뭐래도 자신들은 구원받은 정통 천국 백성이라고 자부할 것이 뻔합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땅을 찾아가서 여인을 만난 것은 그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구원될 만한 자격자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더 나아가서 영생은 순전히 예수님이 주시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그 어떤 자격과 무관하게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 앞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특권이나 유대인 앞에서 사마리아의 자존심이 모두 다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받을 만한 특권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즉 아예 찾아가지도 말아야 될 사마리아 땅에나 예수님이 친히 찾아갔던 유대 땅이나 모두 다 영생 받을 만한 인간이 못된다는 점에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똑같이 보는 데서 영생을 안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이, 그리고 신학을 했다는 것이 하등의 특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마리아 여인으로 남아야 합니다. 타인과 나를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 하등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영생이 우리의 선입감으로 흐려지지 않게 해주시고, 아무런 값도 없이 예수님으로부터 그냥 받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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