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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3:31-36 / 아들의 힘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3:31-36 / 아들의 힘

정인순 2013. 12. 28. 10:51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1102416.mp3

 

 

 

아들의 힘

2001년 10월 24일

본문말씀: 요한 복음 3: 31-36절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신약을 보기 전에 구약이라는 것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구약은 방대합니다. 하지만 그 방대한 내용을 전체로 조명할 수 있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로 인한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앞세워 세상 각종 민족들을 상대로 해 전쟁을 벌여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에 있는 여러 민족들과 늘 전쟁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징벌을 받았습니다. 제대로 전쟁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자는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비록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멸절 당했습니다. 바로 이런 전쟁 이야기로 인해 구약은 방대한 기록입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시기를, 이런 전쟁은 과거 구약 시절에만 생긴 일이라고 볼 실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러한 영적 전쟁이나 종교 전쟁은 이미 사라졌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전히 말하기를, 자신의 싸움은 세상에 속한 전쟁이 아니라 하늘의 권세를 잡은 영적 대상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교회 가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국가 권력 기관으로부터 압력을 받지 않는 시대가 되니 더 이상 하나님으로 인한 전쟁은 없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때의 육체적이고 힘에 의한 전쟁이라면 신약 때의 전쟁은 마귀의 전략이 영적 차원으로 하나님에 도전하는 전쟁입니다.

 

즉 사회 구조상의 전쟁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하여 공격하는 전쟁을 지금도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전쟁 통 그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아직도 전쟁중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즉 땅에 속한 자들과의 싸움을 지금도 하나님은 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스스로 땅에 속해서 땅의 속한 내용밖에 모르는 자들은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 느낄 수가 없겠지요.

 

하나님의 적과 이미 한 통속이 되었는데 어떻게 자기 패끼리 갈등이나 다툼이나 전쟁을 벌리겠습니까. 자신의 본질은 땅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종교적으로 예수 믿기를 결정했다고 하면 영적 전쟁이란 일어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예가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어떤 가정에서 동생 되는 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나름대로 예수님은 사리에 밝은 분이고 뭐든지 정의롭게 일을 처리하시는 훌륭하고 공정한 분으로 알고 왔겠지요. 동생 되는 자가 말하기를, 형이 이 동생에게 돌아올 유산까지 몽땅 다 가져가 버렸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억울한 경우를 예수님께서 좀 나서서 해결해 주고자 찾아온 겁니다. 동생이 생각하기에는 당연히 예수님은 자기편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의 편도 아니요 동생 편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지금 동생은 단순히 돈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는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문제일 뿐입니다. 동생이 돈과 예수님을 연관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 믿음 자체가 예수님 보시기에 마귀에게 지고 있는 증거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찾아온 동생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생명이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자... 여러분, 예수님은 동생과는 달리 다른 차원으로 바라보고 있지요. 동생이 생각하기에, "형은 나쁜 자이고 나는 선한 자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둘 다 똑같은 부류에 불과합니다. 둘 다 하늘에 속한 것을 모르기에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전쟁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앞장세운 전쟁입니다. 그 전쟁은 동생이 생각하는 소유의 힘으로 벌리는 전쟁이 아닙니다. 소유와 무관하기에 오히려 승리가 되는 전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더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어떤 농부가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면서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농산물이 너무 많이 생산된 겁니다. 그래서 그는 창고를 더 크게 지었습니다. 그래놓고 그 농부는 스스로에게 만족합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라고 말입니다.

 

이 농부는 영적 전쟁을 모릅니다. 단지 자기의 생존 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생존과 생명은 자신이 획득한 소유와 무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비 걸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 이야기를 하면 속으로 "압니다, 압니다"를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막상 신약 시대에 살면서 기껏 예수님을 찾아온 동생 수준의 이해에 머문다면 과연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자입니까? 동생이 스스로는 예수님의 사랑하고 믿는다고 자부했기에 일부러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땅의 일과 하나님의 아들과 연결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신앙입니다. 영적 전쟁을 못 느끼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을 "땅에 속한 일"이라고 단정지어 버립니다. 땅에 속한 자는 땅의 일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래 가지고 무슨 영적 전쟁의 전사입니까? 땅의 속한 일과 하늘에 속한 일도 구분 못하면서 말입니다.

 

구약 때나 신약 때나 한결 같은 전쟁은 바로, 땅의 것과 하늘의 것과의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다 두 발을 몽땅 옮겨놓겠습니까? 하늘과 땅은 서로 대치 관계에 있기에 양다리 걸치기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아까 누가복음 12장의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생명은 소유와 무관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 보면 아들에 관해서 하나님은 소유로 설명합니다. 3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하시기 전에 먼저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았지요. 그 때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습니까? "나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력을 네게 주겠다"는 거지요.

 

이러한 유혹은 지금 인간들이 마귀로부터 날마다 받는 유혹입니다. 따라서 이 인간 세계의 내막이요 실체이지요. 모든 사람들은 소유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동생도 예수님을 자신의 소유 문제 해결과 관련 있다고 단정하고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5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아들 되시는 예수님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어느 주장이 옳습니까? 우리는 이 둘의 주장 안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주장이 옳기를 내심 바라고 계십니까? 예수님에게 모든 만물이 있고 마귀에게는 하나도 없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하늘의 일을 아는 자이고 더 나아가서 이 하늘의 일에 확고하게 목숨까지 바칠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체득한 경험과 판단력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주장이 되레 비현실적으로 비칠 것입니다. 성경은 주장은 도저히 못 믿을 것같이 보이시지 않습니까? 왜 사람들이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만 말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평소의 우리들의 상식이라는 것이 모두 땅으로부터 주어지고 배운 것이고 그것이 강함의 원리로 힘이 제 구실을 하는 그런 인생을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생각해도 평소에 생각한 힘의 강함과 연관시킵니다. 힘이 이 땅의 기본 원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것을 힘과 연결시키는 우리들에게 하나님도 힘으로 찾아오십니다. 아들에게 모든 힘이 다 가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주장을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의 몰골이 전혀 힘과는 상관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지상의 아이디어는 이렇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아들에게 주었으면 태어나실 때부터 그 강한 힘의 흔적을 지녔으면 하나님의 일이 수월케 되리라는 겁니다.

 

태어나실 때 구유에서 초라하게 태어나 실 것이 아니라 하늘의 모든 무사들을 총동원해서 이 세상에 건장하게 나타났으면 누가 감히 메시야를 무시하겠습니까? 그리고 돌아가실 때도 그 직전에 하늘의 천사장이 천군 천사를 대령해서 쳐들어와 왔어 "암행어사 출두요!"하는 식으로 세상을 힘으로 평정했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를 알아보는데 있어 보다 효과적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 죽으실 때 아무도 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세상 만물을 아들에게 주었다는 주장을 과연 믿을 만한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를 놓치면 아니 됩니다. 하나님은 왜 만물을 다 주신 아들을 초라하게 이 땅을 살게 했을까요? 분명히 옛날 시내 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는 온 천지가 그 하나님의 위엄을 감당을 못해서 후들후들 떨었습니다. 산도 떨고 백성들도 떨었습니다. 산에 불꽃이 피어오르고 어디선가 천상을 울리는 나팔소리까지 들려 왔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강림은 너무나 장엄했습니다. 그 앞에서 누가 감히 힘으로 나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왜 아드님이 나타날 때는 그런 장엄한 힘이 동원되지 않는 것입니까? 그 시내 산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안 되는 일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폭력적인 힘으로는 인간 내부에 들어있는 죄의 실체를 전부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강제로 무릎 꿇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너무 큰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 내부에 있는 죄는 속속들이 들추어내는 힘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신 희생하시는 힘입니다.

 

얼마나 인간이 추악하고 더러웠으면 우리 아드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하게 찢겨야 했을까요! 바로 천국이란 힘으로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정으로 감사하고 은혜를 아는 마음으로 사는 세상입니다. 겉으로 힘의 위세에 늘러 복종하지만 마음 속에는 반발심이 더 가중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대신 희생당하심은, 진정으로 그 사랑을 사랑으로 알고 믿는 자에게는 자신이 죄까지 알게 되는 힘입니다. 이 힘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은혜에 대한 영원한 감사를 생산하는 힘이 됩니다. "네 대신 내가 죽었다"는 그 사랑이 우리 마음 속까지 들이닥치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죄인이며 그 중에서 괴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천국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고 인간이 이미 알고 있는 땅의 힘을 마치 축복이라고 믿고 그것을 얻기 위한 힘을 달라고 하는 것은 마귀에게 그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중입니다. 비록 예수를 들먹이더라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힘 가지고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행세께나 하겠다는 그 마음가짐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은 곧 자기 의를 확보하는 증거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목사 시킨 대로 십일조 꼬박꼬박해서 마음에 켕기는 것이 없이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은 지금 교회에서 힘을 행사하는 중입니다. 과연 이런 교회가 지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자기 의를 자기 힘으로 여기면서 사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에 의해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드님의 죽으심을 허락하신 겁니까? 그래야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어떤 악에 잠식되어 있느냐를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하늘의 힘입니다. 인간의 죄를 죄대로 드러나게 만드는 이 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이 아들에게 다 넘겨주신 이유가 우리의 죄를 밝혀내는 데 그 힘을 사용하시라는 겁니다.

 

그러나 악마가 쥔 힘은 우리의 죄를 지적해 내는 힘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긍정해주고 가치와 의미를 격려해서 영원히 이 땅의 사람으로 붙잡아 놓기 위한 힘입니다. 돌을 떡 되게 하는 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안 다치는 힘, 세상 권력을 넓히고 출세케 하는 힘, 이 힘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바로 악마가 당회장으로 있는 교회입니다. 악마의 전도 방법이 이것입니다.

 

방주 안에 탄 사람이 몇 명되지 않더라도 구원의 방주는 물 위에 떴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현실입니다. 사람의 숫자보다 더 중요한 사랑의 힘으로 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6절에 보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종'이란 자기 자신을 더 중요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름대로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과연 예수님의 의 앞에서 그것을 부술 용의가 있겠습니까? 도저히 그런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영생과 저주의 갈림길은 이처럼 아들에게 순종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진노가 머리에 머물러 있다'는 말씀, 아들에게 순종 안 하는 이상 계속 그런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구원의 실태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코 성경 한 구절 가지고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오로지 아들에 관한 이야기로 집약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현실임에 결코 다른 현실을 따로 생각하지 않는 그런 우리들이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무엇과 싸워야 될지, 왜 싸워야 될지, 무슨 기준으로 싸워야 될지 제대로 감 잡고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