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요한 복음 3:22-30절 / 세례 요한의 믿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 복음 3:22-30절 / 세례 요한의 믿음

정인순 2013. 12. 28. 10:50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1101715.mp3

 

 

이근호

 

세례 요한의 믿음

2001년 10월 17일 15강

 

본문 말씀: 요한 복음 3:22-30절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 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하늘 나라에 대해서도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제자가 세례 요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됩니다. 이 질문을 남의 질문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질문자의 질문은 그 질문자의 실체를 말해줍니다. 답변자의 답변도 마찬가지입니다. 답변자의 실체를 드러내게 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질문과 답변을 소개함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이 질문과 답변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이 속물적이라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이 제자들의 질문처럼 오늘 우리도 매일의 삶을 살고 있음을 자인해야 합니다. 막연하게 하늘 나라에 대한 공상만 한다면 해답도 일방적으로 자신이 내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오류를 성경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무엇 때문에 답변이 나와 있겠습니까. 모두 다 철없는 우리들에게 확실한 천국의 비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는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궁금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아쉬운 것이 있어야 성경은 그 미흡함을 채워줍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원리로 이루어집니까?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속이 시원하게 뚫리십니까? 아니면 뭔가 꽉 막아 버린 답답한 심정입니까?

 

우리의 상식은 우리 쪽에서 떼를 쓰고 애쓰고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세상 만사가 다 그러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든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든지 상관없이 하늘이 주시면 그 주신 것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천국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보통 손님을 모실 때는 청소해야 된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청소가 잘 되지 아니하면 손님이 잘 안 들어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담임 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하면서 모범생이나 말썽꾸러기나 상관없이 다같이 실시하게 되면 모범생의 가정보다 도리어 애를 먹인 학생의 가정에서 다 반기고 ,고마워하고, 감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냥 다가오시고 그냥 복을 주시는 겁니다. 조건 없이 말입니다.

 

27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땅에서의 애씀이 하늘에까지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겁니다. 구원하고 안 하고는 땅의 사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주면 그냥 주시는 것이고 땅에서는 그냥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답변은 제자들이 무엇이 궁금해서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일까요? 제자들의 질의가 과연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그들이 어떤 질문을 했기에 이런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까? 제자들이 질문한 그 꿍꿍이속과 세례 요한의 답변의 취지는 전혀 맞지 않았다 하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성경은 질의와 답변이 다 나와 있는 겁니다. 즉 땅에서 인간들이 궁금해하는 것과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는 전혀 상반된다는 점을 성도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설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런 질문을 했는가 하는 점과 또 하나는, 거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하늘의 계시를 받아 어떻게 답변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썩어빠진 인간적인 생각이고, 세례요한의 생각은 하늘의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제자들의 생각은 아예 보지도 않고 세례 요한 생각만 가지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안됩니다. 제자들의 사고방식을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도 못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사고 방식인 점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답변은 너무나 드높은 천상 적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경험을 다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질문을 했습니까? 26절에 보면,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 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이런 유의 이야기를 평소에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즉 "원래 우리 단골 손님이었던 사람들이 새로 개업한 가게로 많이 몰려가더이다. 주인님 무슨 조치라도 내려야 되지 않습니까?"라는 유의 대응책 말입니다. 누구도 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질문을 제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원래 우리가 전도한 교인들이었는데 앞에 개척 교회가 들어서고 난 뒤, 그곳으로 가더이다. 무슨 대책이라도 세워야 되지 않습니까?"라는 심보도 동일한 심보이지요. 바로 라이벌 의식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더럽고 어두운 인간의 본성 안에서 바로 이런 경쟁 의식이 들어있는 겁니다. 심리학자들이 밝히는 인간의 불행의 원인에는 비교의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남에 대한 질투와 미움으로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는 것은 정작 본인일 뿐입니다.

 

비교를 해도 십자가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비교해야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다 가진 그런 자들과 비교하니까 맨 날 고통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 사람이 가진 것을 내가 못 가진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이 미워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품성은 공격성으로 나타납니다. 전쟁이란 일종의 게임입니다.

 

청년이 군에 가기 전에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나 부모님을 몹시 그리워하지요. 하지만 일단 전쟁이 터지고 그 게임에 몰입하면 가까이 있는 전우애가 고향에 있는 가족 애를 능가합니다. 고향은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신이 싸워 이기고 싶은 게임에만 몰두합니다. 환경에 대한 적응이지요.

 

이처럼 인간은 자기가 소속된 세계에 쉽게 적응하고 그것을 사수하고 그것 밖에 모릅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심정도 이런 심정입니다. 비교한다든 것, 경쟁한다든 것에 몰두하는 순간은 예수님을 믿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실로 예수님을 믿었던 막달라 마리아나 세리와 창기는 아무에게도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우리 교회 앞에 해인사가 있더라도 그것을 이기려하거나 비교해서는 아니 됩니다. 쓰레기가 많이 모여있어도 그냥 쓸모 없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신앙은 세상에서 준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것하고도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27절의 말씀처럼 하늘로부터 뭔가를 받으셨다면 세상 어느 것하고도 비교도 안 될 최고의 것을 받은 겁니다. 떼써서 받은 것도 아니요 하늘에 대고 뇌물 바쳐서 얻어낸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신 거예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겁니다. 뭘 더 바라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에도 마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세상 것과 비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만을 생각했습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물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쪽으로 가버리니 그러면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존재 가치가 흐지부지 된다고 여길 만 합니다.

 

여기에 대한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답변합니까? 제자들 편들었습니까? 28-29절에 보면,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제부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해야 될 임무와 사명은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자신을 추종의 진짜 대상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이나 목사 자랑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증거하고 거기에다 덧붙여 자신의 교회나 당회장도 함께 증거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증거 해야 될 대상을 하나로 삼는 것이 교회의 유의할 점입니다.

 

세례 요한은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자신은 신랑의 친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자신이 망해가면서도 기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기쁨에는 전혀 손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원천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삽니다.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가 자신의 기쁨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랑만 기뻐할까요? 아닙니다. 신랑의 친구들도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들에게는 친구가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쇠할 것을 바라보지 말고 흥할 것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자신이 유명해지고 날로 흥하는데서 기쁨을 얻는다면 이는 사람은 사명이 없는 자에 목적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닫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쇠해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자라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 사람은 예수님의 참된 증거 자요 종입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내막이요 하늘의 뜻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온통 경쟁의 세계입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부딪치는 사람마다, 긴장과 갈등이 유발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틀에서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늘에서 거저 받은 것이 있기에 이런 틀말고 다른 차원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늘이 주시는 기쁨과 사랑만을 내놓고 자랑하는 우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쇠하는 사태가 일어나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속물 근성으로 남과 비교하게 하지 마시고 하늘에게 거저 주신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남에게 이기는 것이 신앙의 힘이 아니라 져도 무방한 것이 신앙인 줄 압니다. 세례 요한이 봤던 원리가 우리의 삶의 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