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 복음 3:1-8 / 거듭남 본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1092612.WMA
이근호
거듭남
2001년 9월 26일
본문 말씀: 요한 복음 3:1-8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실 까요? 어두움으로 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과연 철저하게 어두움 그 자체라고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적당하게 어둡다고 보십니까? 만약 전적으로 어둡다고 한다면 그 어두움 속에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면 빛은 어디 있습니까? 빛은 빛이 들어올 때만 빛입니다. 따라서 빛이 오지 않는 그곳에는 어두움 그대로입니다.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자동적으로 빛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도 또한 어두움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 우리 인간 세계가 어두움입니까? 만약에 사람이 어둡지 않고 빛이라면 구태여 빛 되신 분이 이 땅에 내려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말씀이 던져 주시고 "그 말씀대로 잘 지켜 날 찾아오너라"하면 그 뿐일 것입니다. 인간에게 선을 행할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간은 어둡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완수할 능력도 없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제대로 해석할 능력도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어두움인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어둡다'고 할 때는 평소에 인간들이 어떤 것에다 의존해서 살아가는 지를 똑바로 보라는 겁니다. 거기서 튀어나는 모든 것은 빛이 될 수 없고 어두움에서 어두움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요한 복음 1장에서 말씀하신 어두움은, 요한 복음 2장, 3장, 4장 계속 넘어오면서 "왜 어두우냐?", "어디서 어두움이 드러나는가?" "어둡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 이렇게 해서 우리 힘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빛의 능력으로만 구원되는구나"를 절감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떻게 하면 이 어두운 나를 빛으로 바꾸어 볼까?"를 생각하신다면 전혀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없는 사고방식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밤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2절에 보면,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라고 자기 고백을 합니다. 니고데모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출발부터 잘못되고 있습니다.
질문 자체에 이미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라는 말이 얼른 듣기에는 칭찬 받을 만한 훌륭한 고백으로 보이겠지요. 그러나 토대가 잘못되었습니다. 왜 이 고백이 잘못 되었는가요? 요한 복음 2:23-25절을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여기서 보면, 예수님은 사람의 증거를 받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속마음을 낱낱이 읽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님은 이러 이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분명하다"는 그 확신들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보고 느낀 점을 모두 수집해서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들인 지를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다른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신자입니다. 니고데모는 기껏 2:23-25절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추종하는 부류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병이 들었을 때에 꿈에 허연 도포 입은 분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 예수인데. 기도하면 병 낫게 해줄게"라는 계시를 받고 기도하니까 그 즉시로 병이 나았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그런 증거들을 버려야 합니다. 하등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경험들입니다.
인간들은 이런 경험을 계속 모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확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두움의 한 조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두움의 연장에 불과합니다. 어두움의 견해와 지식과 느낌과 체험은 빛과 연결이 안됩니다. 연결된다는 어두움이 아니라 빛일 것입니다. 어두움은 아무리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어두움에서 못 벗어납니다. 한 때 유행하는 것 중에 전생 경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딴에 솔직하게 무의식 가운데서 생각나는 대로 고백했다고 하지만 그 나오는 것은 자신이 선택해서 골라잡은 체험일 뿐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별된 것 중에 선택할 뿐입니다. 즉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선택이든 사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제한된 것입니다. 그래놓고도 마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자기 인생을 끌고 가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런 한계를 갖고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인줄 알아봅니까? 그저 자기가 상상한 인물로 삼을 뿐입니다.
가롯 유다 같은 경우에는 귀신까지 쫓아내고 병까지 고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서 예수님을 팔아먹었던 인물입니다. 그전까지 그는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그저 자기 욕심과 일방적인 자신의 경험한 바에 의해서 해석된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두움 세계에서는 어두움만 나오게 되어 있지 빛이 나오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빛, 그 자체의 능력으로 어둠에 있는 자를 끄집어 낼 경우에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고백한 그런 고백말고 다른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주님의 능력으로만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느낌이야 늘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은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늘 구원해주시고 계시니까 말입니다. 차 사고 날 때만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라 차 사고 없을 평안할 때도 그 때에도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잠 잘 때에도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시면 내일 아침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나름대로 자신이 판단한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당신의 표적은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칭찬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그 니고데모의 의견과 단절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니고데모 그 개인에게 돌립니다. 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즉 네가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곧 아직 거듭나지 않았기에 나올 수 있는 고백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니고데모는 다음과 같이 의아해 합니다. 4절에 보면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다시 태어난다'는 뜻을 이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가 평소에 생각한 메시야 관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기 곤란합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니고데모는 예수님도 모르고, 하나님 나라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나 여타의 사람들로부터 증거를 얻을 필요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니고데모가 먼저 손을 내 밀었지만 예수님은 그 손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5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생각하기를, "현재 내가 다시 안 태어나도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바라도 예수님을 아는 데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그 마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냉정하게 반박하고 계십니다. 즉 "네가 하나님의 나라를 모른다"는 겁니다 진정 하나님 나라를 아는 자는 기존의 것을 포기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어느 쪽에서 말입니까? 네 쪽이 아니라 하늘 나라 쪽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태어나게 해 준 사람만 구원받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어둡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이 제가 알아서 빛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구태여 예수님이 이 신약 시대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 성경만으로 충분합니다. 홍해 사건이나 노아 방주를 믿어서 구원받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되지 못합니다.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태어납니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하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과 성령이란, 인간의 힘으로 구원되는 것을 전적으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의사표시입니다. 요한 복음 1:12-13절에 보면 이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취지가 나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다시 태어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바로 이점을 보여주는 표적이 됩니다.
여기서 4절을 다시 봅시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여기서 니고데모는 여전히 자신의 육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세례 요한의 물세례의 의미를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세례란, 기존의 육을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나름대로 안다고 주장했으니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의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지요. 니고데모가 '어떻게'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라는 표적을 준비하신 겁니다. "내 쪽에서, 내 몸을 가지고 모태에라도 다시 들어갈까요?"라는 생각밖에 못하는 자들을 겨냥해서 하나님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일으키신 겁니다.
허황되고 신비로운 관념이 물과 성령에 의한 거듭남이 아니라 실제로 물세례와 성령 세례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보면서도, "나는 다시 태어나야 돼"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으면 되지 뭐. 주님 믿으면 되지 뭐" 이렇게 생각하더라 말입니다. 그래놓고도 예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 사건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물세례와 성령 세례도 이미 일어나 버린 사건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모두가 어둡다는 것을 말씀하는 사건입니다. 그 어두움의 증거 하나가 오늘 본문의 '니고데모의 찾아옴'입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난 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성령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세례나 성령 세례나 모두 이 어두움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거듭남의 솜씨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의 생활이 어떠해야 합니까? 매사에 하나님의 거듭남의 은혜가 끊어질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특별한 생활의 위기 때만 예수님이 거듭남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위기가 아니고 얼마든지 우리 힘으로도 살 수 있다고 여기는 평온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거듭남의 은혜는 여전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같이 죽고 매일같이 다시 태어나는 일생을 보내는 것이 됩니다. 주님의 힘에 의해서 말입니다. 매사를 보면서 주님의 살리시는 기적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이 어두움 세계에서의 빛의 자녀입니다. 그렇지 않고 경험했던 신기한 것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근거하여 자신이 구원된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자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여전히 자기 수완으로 구원되려는 사람이지 결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돼"라는 점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결코 "이런 이런 식으로 하면 구원돼"라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모르고 니고데모는 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표적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표적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야 된 다는 것, 이것뿐입니다. 육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의미뿐입니다. 표적을 니고데모는 보기는 보았지만 그 의미 파악에 있어서는 완전 어두움이라서 깜깜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늘 표적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바로 이 늘 상한 심령 되게 만드시는 것이 거듭난 빛의 자녀의 특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물 사건, 십자가 사건이 이미 터졌기에 이 사건의 의미를 바로 깨닫게 하옵소서. 어두움이 바로 우리 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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