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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 복음 2:1-11 / 가나에서의 표적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 복음 2:1-11 / 가나에서의 표적

정인순 2013. 12. 28. 10:43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1091210.WMA

 

 

 

가나에서의 표적

2001년 9월 12일

 

본문말씀: 요한 복음 2:1-11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2: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2: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2: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기적이란, 인간들이 예상치도 상상하지도 못할 때 일어나는, 그 때 붙이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마술사나 요술쟁이들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기적을 베풉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요량으로 베푸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겠다든지 사람들의 요구 조건을 부응하기 위해 기적을 베푼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세상 적인 기적과 차이나는 점입니다.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고? 이 예수가 왜 왔겠는가. 자... 기적이나 베풀어 줄께"라는 심정으로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다 기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기적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아쉬운 점을 의논하려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하시면서 인간들이 요구하는 것을 도리어 퉁겨버립니다. 바로 이 거부하는 마음으로써 기적은 기적대로 베푸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 그런 기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이 원하는 기적과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은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인간들이 제시하는 기적의 방식 안에서 인간들이 계속 답답해하고 근심스럽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내가 그 기적을 행한 임무 같은 것은 나에게 없습니다."라는 취지로 예수님은 마리아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0절에 보니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이것은 연회장이 신랑보고 칭찬하는 겁니다. 이 대목은, 주최측의 근심이 주최측 내부에서 예상한 식으로 근심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게 전혀 예상하지 않은 칭찬이 날아오는 방식으로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점이 예수님의 기적의 핵심입니다. 즉 처음부터 나중에 더 좋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도 않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지금부터 우리의 삶이 더 월등하다는 것과 연관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예상 치보다 더욱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우리가 예상한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다룰 때는, 우리로 하여금 근심에 잠기게 합니다. 근심이 있어 분수를 알고 주체를 압니다. 걱정이 생길 때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돌아보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풍요를 구가했던 미국에 지금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평화로움이 당연히 늘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건방진 사고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이 생길 때 겸손해지게 됩니다. 즉 걱정, 근심이 진짜 우리의 본질이고 걱정과 두려움과 고민에서 벗어나는 것은 순전히 외부 은혜입니다.

 

이번 뉴욕 참상을 놓고서 하나님과 사람들의 죽음을 연관시켜 시켜봅시다. "설마 하나님이 계신데 개인적인 신앙심과 상관없이 수 만 명을 한꺼번에 죽이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만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중에는 참되게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종이 있을 수도 있기에 아마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이 재난을 당하기 전에 기적으로 딴 데로 빼돌릴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실제와 일치될 때 그 때 우리는 하나님도 계시고 따라서 그 분의 은혜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수 만 명 중 아무도 이번 테러를 몰랐다는 것은,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없다!"라는 전제를 가질 때만 이번 뉴욕 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만약 살아 계신다면 그 수 만 명중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바르게 살 사람과 죽지 않아야 될 사람과 인류와 이웃과 가정을 위하여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재앙이라는 것이 닥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에게는 피할 길을 주시는 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이기에 신자에게 전혀 낌새조차 없이 불신자나 악한 자와 더불어 동일하게 파멸 당하게 하실 하나님은 아니라고 봤는데 실제로는 같이 죽고 말았습니다.

 

자, 이런 시점에서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점이 전혀 확인 될 수 없고 도리어 '확실하게 하나님은 없다'라는 점에 더욱 더 확인되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예 없을뿐더러 하나님을 더 이상 필요로 할 필요조차 없다는 겁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힘입니다. 이번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 일가 친척들 중에 늘 이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 오던 목사나 장로나 집사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들도 하나님으로부터 구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미국이 하나님 믿다가 큰 코 다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 찾지 말고 인간들의 힘만 믿어야 함을 더욱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 믿는 나라이기에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한다는 하나님 믿는 신앙이 헛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이처럼 힘만이 믿을 만하고 불신만이 확실한 진리인 이 세상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믿던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고 내 아버지만이 진짜 하나님이다"고 했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보고 싶어서 3년 동안 같이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맥없이 무너져 버린 겁니다. 마치 110층 쌍둥이 빌딩이 맥없이 무너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 어떤 도우심도 거부당한 채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힘 앞에서 굴복 당해 죽고 말았습니다. 이미 이러한 사태를 예감한 가롯 유다는 미리 예수님의 권위의 그들에서 벗어났습니다.

 

가롯 유다의 생각은 이겁니다.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었다!. 단지 메시야 흉내를 낸 광신자이다. 나는 이제 정신 차리고 손떼겠다." 가롯 유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마저 굴복시킬 수 있는 권력의 힘이었습니다. 힘이 전부이지 예수님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모든 인간에게 사실상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맥없이 무너지고 망가지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부터 신앙을 새로 시작합시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현상보고 기적보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까? 아닙니다. 110층 빌딩이 무너지듯이 나도 무너지고 빌딩도 무너지고 예수님이 무너지고, 다 무너지게 하시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것을 믿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110층 건물로 멋있고 튼튼하게 우뚝 솟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무 괜찮은 존재인데 더 괜찮은 존재로 변모시키기 위해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110층 건물이 허물어지듯이 허물게 하시므로 구원하시는 겁니다. 어떻게요? 근심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기뻐해야 될 결혼식 잔치에서 근심에 잠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은 겁니다. "예수여, 나는 지금 걱정이다. 신랑하고 나하고는 서로 잘 아는 친척인데 포도주가 떨어져서 잔치 분위기가 깨어질 위기에 있다. 예수여, 나 어떻게 할까? 나 체면을 봐서라도 무슨 조치를 취해다오"하고 걱정스럽게 예수님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해 줍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근심스러워요? 근심하세요. 답답해요? 답답하세요. 괴로워요? 계속 괴로워하세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마리아의 놀라운, 참으로 기적같이 놀라운 신앙이 튀어나옵니다. 5절에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목사가 갖추어야 될 덕목은 오직 하나라고 봅니다. 그것은 바로 시킨 대로 사는 겁니다. 110층이 무너지듯이 우리 교회가 무너지든지, 교회에서 추방당하든지, 교인들로부터 욕을 얻어먹든지 어떤 경우라도 꿈쩍하지 않고 오로지 주께서 시키신 대로 사는 생활을 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도 못한 일을 하시면서 우리를 영생이 있는 쪽으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이 점을 마리아를 수용한 겁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인보고 지시했지만 실은 마리아 본인이 예수님 앞에서 이런 마음가짐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가 감히 예상치도 못한 일만을 하십니다. 늘 우리 앞에서 늘 근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또한 하나님이 늘 예상치도 못하게 그 속에서 우리를 더 좋게 만드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기적의 핵심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전보다 더 좋은 결과"이잖아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근심을 우리 식으로 내놓은 해결책 같은 겁니다. 만약 마리아가 말하기를, "예수여,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옆 동네에서 포도주를 꿔 와서 해결하면 안될까?"라는 식으로 나왔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대꾸했을 것입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다. 체면이 무너지고 근심이 됩니까? 그렇다면 무너지세요. 계속 근심하세요"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예상한 대로 일이 척척 잘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도록 유도하려고 합니까? 헛된 하나님 전하지 말고 무너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지키시는 미국이 되어 사람들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리고자 한다면 그 미국이 전하는 가짜 하나님이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시킨 대로하겠다는 마리아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안에 아무 것도 들어있는 것이 없는 돌 항아리 6개에다 물로 가득 채우게 했습니다. 왜 처음부터 포도주를 채우게 하시지 않는 겁니까? 물이 없이는 포도주를 만들기 어려워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전적인 변화에 있습니다. 쓸모 없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아직 그 때는 되지 않았지만 때가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물이 극상품의 포도주로 변화는 것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겁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나 오늘날 우리들에게 감히 상상할 리가 없는 그런 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감히 인간들이 예상치도 못한 일을 하신 겁니다. 이처럼 구원의 길도 이러합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구원의 길이 따로 있고 주님이 실제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길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는데 이는 우리가 생각한 구원의 길이, 주님이 인도하시는 구원의 길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근심입니다. 자기 주제 파악을 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이 주는 폼과 위신과 체면을 중요시하는데 바로 이런 행동에 대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근심거리를 주시면서 주제 파악에 나서게 하십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십니다. 주님만이 하시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시키는 대로만 살면 됩니다. 하지만 '시킨 대로'의 신앙이 없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신봉함으로서 구원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시킨 대로 안하고 도리어 배반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생각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는 이러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뜻은 이것입니다. 즉 "이전 것 보다 나중 것이 낫다"는 겁니다. 이전 것이란, 우리가 늘 예상하고 싶어하고 상상하고 싶어하는 멋진 일들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허물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좋은 것에 대한 아이디어나 구체화는 오로지 주님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표적입니다. 흔히들, "십자가가 뭐가 좋은가?" 하시지만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이 뭉개지고 주저앉게 만드니 진정 좋은 것입니다. 신랑은 난데없이 졸지에 연회장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신랑 본인도 예상치 못한 것이고 마리아도 예상치 못한 바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하신 일은 비록 우리 인간들이 예상치 못한 거지만 정말 예상을 뛰어넘게 되는 극상으로 좋은 것으로 되 갚아 주시는 것이 주님의 오신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비유요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이렇게 표현하더란 말입니다. 쓸모 없는 물이 극상품의 포도주로 변해서 잔치 분위기가 천국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로입니까? 아닙니다. 순전히 주님의 공로입니다. 이 안 좋은 시절에 마음껏 근심하시고, 두루 두루 걱정하시고 염려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이 주님에 의해 친히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먹은 대로 안되어야 하고 내 뜻대로 안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주님이 시키신 대로 살 수 있기 마음이 남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되 우리 원대로 베푸신 것이 아니라 감히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더 좋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기적인 줄 알았습니다.

시킨 대로하고 군말 없이 하고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