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 45-51 / 나다나엘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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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 2001년 9월 5일
본문 말씀 : 요한복음 1: 45-51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 복음 1장 초반에 보면 빛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어두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가 궁금해지는 것은, "빛과 어두움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어두움 속에 있는 하나님 자녀는 빛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여주느냐 하는 점입니다. 빛의 자녀가 분명히 있다면 빛의 자녀다운 어떤 특징을 빛 되신 앞에서 보여줄 것이 분명하다 이 말입니다. 물론 어두움의 자녀는 빛 앞에서 나름대로의 거부반응을 보이겠지요.
자, 이 둘 사이를 우리가 어떻게 가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바를 밖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빛의 자녀와 유사한 내용을 밖으로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천 사람, 만 사람이 와서 나보고 "주의 자녀이다"라고 확인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빛의 자녀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있는 목적은 바로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다나엘이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빛의 자녀가 빛이 왔을 때, 그리고 빛 되신 분이 빛의 자녀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시는지 눈여겨보라는 겁니다.
흔히 길가에서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이들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코미디 프로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덩치 크고 힘깨나 쓰는 폭력배 두 패가 각각 두목을 대령하고 마주쳤습니다. 마약이 든 가방과 현찰이 든 가방을 교환하다가 아마 우리가 예상하기에는 칼부림이 생길 것이고 주먹다짐이 오고 갈 거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예상대로라면 그것은 코미디가 아니겠지요. 그 코미디에서는 두 깡패집단이 만나는 대결을 벌리는데 어떤 놀이를 하게 됩니다. 그 놀이는 다름 아닌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려 왔단다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겠니 찾겠니 찾겠니?" 라는 놀이를 합니다. 서로들 만나서 하는 놀이가 덩치에 맞지 않는 놀이를 하니 그것이 코믹하게 보이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만남, 빛과 빛의 자녀의 만남에서 이런 농담과 코미디는 용납이 안되겠지요. 과연 이들은 무슨 대화를 주고받을까요? 아마 평소에 각자 속에 담겨 있었던 마음들을 숨김없이 드러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한 그 기대치가 낱낱이 소개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47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특히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씀은 우리들에게 큰 것을 느끼게 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 교인 수가 많고 동조자가 많은 것은 우리의 구원이나 하나님이 기뻐하심과 전혀 상관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단 한 명이라도 그 사람 마음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면, 빛으로서 빛의 자녀 건지기에 대 성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같이 동조하고 우리말에 협조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결코 외로운 우리에게 위로거리가 못된다는 겁니다. 설사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된다할지라도 우리 예수님의 마음과는 전혀 무관한 바입니다.
빛 되신 분이 이 땅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빛의 자녀가 풍성하게 움집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간사한 바가 없는 자를 찾는 일입니다. 간사한 자 천 명이 모여서 교회 한다고 해봤자 자기들끼리 덜 외로워서 기분 좋을지 모르겠지만 주님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 집단들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빛의 자녀 됨의 기준 안에는, "너 왜 너만 외롭고 구원받고자 하느냐? 너는 네 친구 몇 명 데리고 왔어?"라는 사항이 포함이 안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대하고 있는 대화는 창작한 것이 아니라 참된 빛과 참된 빛의 자녀의 대화를 엿보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기준을 내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백 만 명을 목회를 하고 우리가 천 명을 전도를 했든지 간에 예수님이 살펴보는 것은 우리 마음 안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우리가 소홀히 했다면 이는 주님의 참된 뜻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맥 빠진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너무 쓸쓸하고, 너무 외로워서 우리는 맥이 빠진 겁니다. 하지만 나다나엘과 직접 대화에 나서신 예수님 앞에서는 그런 외로움이 흠이 되지를 않습니다. 마태복음 7:13-14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나다나엘의 친구가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다음과 같이 추궁했습니까? "나다나엘아, 어떻게 네 혼자서 기도하느냐? 그래, 외롭지도 않더냐? 이 답답한 인간아" 라고 했습니까? 설사 나다나엘의 동조자가 숱하게 있다 할지라도 나다나엘이 거기에 의존했을까요?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찾는 지를 이미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요. 49절에 보면,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자, 평소에 나다나엘의 머리 속에 가슴 속에 뭐가 가득 담겨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임금을 기다렸다는 이야기이죠. 하나님의 아들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두고 예수님은 평가 내리시기를 '네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을 욕심만 먼저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내 마음 속에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멍청하게 아무런 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것을 가지고 그 점을 부각시켜서 예수님께서 간사함이 없는 증거로 삼을 리가 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 밑에서 하나님을 향한 어떤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 당사자이신 예수님이 이 점에 강조하신 겁니다. 즉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밑에서 어떤 대상을 향해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을 터트린 겁니다. 아무도 주위에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이 무엇인지는 예수님이 오셔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공개해 버린 겁니다. 그 터뜨린 마음씨가 간사한 것이 없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의 마음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여 어서 임하옵소서"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원이 바로 이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무화과나무 밑에서 이 점을 놓고 하나님을 향하여 대화합니다"
그런데 그만 그 대상이 직접 육신이 되어서 나다나엘 앞에 나타나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찾기 전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평소부터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도 만약 간사하지 않는다면 간사하지 않다는 증거로 무슨 고백을 내놓을 것입니까? 주님하고 우리가 만나서 대화할 때 주고받는 내용이 적어도 나다나엘 정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구세주만 있으면 족합니다"라는 마음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겁니다. "너도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말입니다. 참 이스라엘이니 이스라엘의 임금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상해 볼 수 보건대, 이 나다나엘의 마음이 대단히 안정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혼자 있어도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이 말은 늘 타인을 의식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임금이신 하나님의 아들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 겁니다. 남에게 굴릴 필요도 없고 기죽을 필요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이런 대화 가운데서는 인간들이 주는 그 어떤 협박이나 공포, 미래의 불안이나 어두운 그림자가 개입될 수 없습니다.
비록 나다나엘의 어두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는 어떻게 이처럼 대범하게 살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자녀는 이 세상 어두움이 주는 협박이나 위협보다는 메시야과 더불어 사는 안정감을 더 크게 느끼며 삽니다. 왜 일부러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신 겁니까?
그것은 앞으로 예수님이 하실 대상의 기준이 바로 이런 모델이라는 겁니다. 즉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찾아 나서기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처럼 나다나엘의 속마음을 예수님이 오셔서 직접 나다나엘에게 통보해 주니 나다나엘 입장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처럼 놀라는 나다나엘에 보고 예수님은 더 놀랄 정보를 하나 던져 줍니다.
그것이 50-51절에 나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8:12절에 보면, 야곱이 형의 위협으로부터 피신하여 광야로 도망 온 장면입니다. 거기에서 야곱은 돌 베개 베고 잠을 자는데 자기 머리맡에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사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구원의 통로가 야곱 하나로 지정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야곱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야곱으로 인하여 구원도 되고 야곱으로 인하여 세상은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사다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이 사다리 외에 구원받은 길이 없는 겁니다.
그 지명이 바로 '벧엘', 즉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늘과 땅과 유일하게 통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야곱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야곱의 이야기를 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언급하는 것일까요? 확실히 구원의 길이 하나로 지정된 것에 대해서 여러분의 마음은 편안합니까 아니면 기분 상합니까? 성도 같으면 평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두 다 불 확실 적인 진리는 아예 붙잡을 수 없는 것인데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구원만큼은 하나로 고정이 되어버린 더욱 예수님을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의 이러한 새로운 정보를 듣고 얼마나 나다나엘의 마음이 안정되었겠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그 야곱의 사다리가 이제는 인자되시는 예수님 머리 속에서 생겨나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게 되니 이 구원의 안정성이 얼마나 더욱 더 확실해지겠습니까. 교인은 교회에서 확실한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교회 공간으로 잠시 자신의 몸을 이동시킨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겁니다. "내 교회 있다. 내 교회는 크다"가 하늘로 가는 사다리입니까? 아닙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야곱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이 지금은 누구 머리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가를 확실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간사함이 없는 사람의 반응입니다. 이것이 인간 승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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