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아모스 8:5-8 / 안식일에 대한 태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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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본문 말씀: 아모스 8:5-8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이한례 22강-암8장5-8(안식일에 대한 태도)1204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8장5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82 페이지입니다. 아모스8:5-8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제대로 안 지키는 것 때문에 천지자연이 변한다. 그리고 반응을 나타낸다. 상당히 이것은 미신적인 느낌이 많이 들죠.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서 대자연이 변하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그들은 어디 안에 들어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놓여 있는 나라고 그 언약에 의해서 그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들이 쓰여 지고 사용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중심을 유지하는 한 그들의 모든 행동들은 이 대 자연과 상관이 있고 관련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천지가 달라진다는 그 최종적인 근거가 어디 있느냐.’라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어두워졌다는 것 있죠? 해가 어두워지고 그리고 땅이 열려서 이미 죽었던 시체들이 일어나서 활보하고 있고, 그런 이야기는 곧 이 세상에는 중심 되는 인물이 계시는데 그 중심 되는 인물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이 그동안 이 자연세계가 지탱하고 유지했던 사실은 근원적인 힘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흔들리니까 예수님께 어떤 일이 벌어지니까 대자연이 같이 동반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마야라는 그런 왕국이 현재 멕시코에 있거든요. 거기 달력에 보면 2012년 12월 달이 이 세상이 마지막이라고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2012년 12월 달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벌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세상은 이미 마지막에 돌입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다시 생각할 것은 아모스의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도록 돼 있는 언약의 대상자가 안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때에 그 여파가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주변에 있는 나라도 다 뒤집어진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일이 이 대자연의 운명과 직결돼 있다는 것과 같은 겁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취미생활 하는 줄 알았죠. 뚝딱, 뚝딱, ‘저 사람은 배 만드는 게 취미인가 보다.’ 하지만 배가 2월 10일에 완공되고 난 뒤에 2월 17일 날 일주일 후에 비가 왔고 그 다음부터 40일 동안 홍수 내려서 150일 동안 물이 찼고, 10월 17일 날 아라랏 산에 도착했고, 11월 달에는 비둘기를 한번 내보냈다가 그 다음에 1월 달에 드디어 배가 정착되었고 물이 마르고 그 다음에 2월 27일 날, 1년 10일 만에 그들은 한 쌍의 짐승들과 함께 땅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옛날에는 물로써 이런 시나리오가 짜여서 이렇게 일이 진행됐다면, 앞으로는 물이 아니라 불로써 다 멸망당하고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설마 그럴 리가.’ 하겠지만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해가 어두워지고 땅이 갈라졌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 중심으로서는 세상이 백날 갈라진다고 해도,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 나와, 한바탕 붙어보자.’하고 객기를 부려도 별 변화 없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더 이상 세상은 복음 전파하기 위해서만 유지되는 그러한 환경으로서 이게 결정 났습니다. 복음으로 살지 않고 복음과 무관하게 살면 그 사람의 직업의 여하에 상관없이 그 사람은 저주의 부활로 지옥 가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이 확신이 들 때 오는 희열과 기쁨이라는 것은 이 건희 회장만큼 돈이 있더라도 이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진행 되는가, 확신 있게 이걸 알게 되는 그 기쁨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돈 주고도 이것을 바꿀 수 없는 그 기쁨이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럼 안식일,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야기라면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제대로 못 지켰다면, ‘그러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제대로 지키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마련인데요. 그런데 그 질문 자체가 잘못 된 겁니다. 왜냐 하면 언약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이런 질문조차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저 사람들은 안식일을 못 지켜서 이스라엘은 망했구나. 그러면 우리는 제대로 지키자.’ 이건 지가 마치 언약 안에 있는 것처럼 지가 행세하는 건데, 그런 것은 허락한 적이 없어요.
따라서 이렇게 질문해야 됩니다. ‘아니, 그들이 안식일을 제대로 못 지켰다면, 우리가 그 자리 가도 결과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도 안식일 제대로 못 지키고 우리도 제대로 안식일 못 지키고, ‘그럼 누가 제대로 안식일 지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서 그래서 의인이 되어서 구원받느냐.‘ 그런 질문으로 발전돼야 되겠죠.
그런 질문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이 여기서 비로소 새롭게 개입되는 겁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왜 예수님이 친히 나서셔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모든 율법과 성경말씀이 예수님 중심으로 깔아놓은 그림자요.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그들은 그만큼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모형과 그림자가 예수님과 직결되는 걸 가지고 자기가 그걸 실천에 옮겨보겠다고 그래서 그걸 자꾸 교회에서 찾고 있고 목사는 거기에 고객 만족이라고 거기다 지시와 명령을 해서 ‘당신은 이렇게 함으로서 당신은 복 받는 사람 됐습니다. 아이쿠, 기분 좋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거짓말을 유발하게 하죠. 자꾸 거짓말 해대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 거짓 것을 굉장히 맘 편하게 받아들이고.
우선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들이 왜 안식일을 잘못 지킬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한계가 어디 있었느냐 하는 거죠. 그것부터 한번 봅시다. 여기 4절에 보면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월삭이라 하는 것은 월초에 늘 행사를 지냈습니다. 이건 우리 조선시대 사람들도 항상 일 잘되면 명절에, 또는 2월초에, 3월초에, 항상 한 달에 한번 씩 이렇게 어떤 특별 행사를 했죠. 노래도 그런 노래 있어요. 7월이면 망종이라, 5월이면 단오라, 하여튼 계산해보니까 농사짓는 사람이 365일 동안 농사짓는 것은 170일 밖에 안 되고 반 이상 노는 거예요. 그러니 옛날에는 국민소득이 낮았죠.
지금의 산업 역군들 보세요. 그야말로 잔업 있으면 토요일고 반납해서 회사 가서 잔업 해야 됩니다. 지금 수출해 달라는 주문서가 오면 제품을 계속 생산해야 되죠. 그러니까 노동시간이 일주일에 엄청나게 많아지죠. 그런데 농사짓는 사람은 고생, 고생한다고 하지만 일 년을 반 이상 노는 겁니다.
“월삭을 지나서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월삭 때 뭘 하느냐 하면 잠시 하는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늘 월 초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소위 안식일이죠. 그래서 여기 안식일은 노동을 멈추게 되는 거예요. 안식일은 노동을 멈춘다는 말은 다 같이 논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도 놀고 우리도 논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쉼으로써 우리 자신의 일을 중지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나름대로의 일을 찾고 바라보고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는 날로 정하는 겁니다. 인간은 일을 쉬어도 하나님은 쉬는 날이 없어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씀이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나오죠. 그러니 이건 늘 일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안식일을 늘 쉼으로써 그들 이스라엘이 발견할 게 뭐냐 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 소유라는 것, 자기 인간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거죠.
사람은 자기가 노동을 하게 되면 노동한 그 만큼은 자기 것이고, 하나님도 손대면 안 되고 오직 나만의 것, 나만의 노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이만큼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거든요.
욥기 41장 11절에 보면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예요.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했어요. 니가 그걸 나한테 바칠 때만 내 것이 아니고, 오해들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집에 있는 것을 교회 갖다 바친다고 바친 것만 하나님 것이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걸 제가 20년 전에 극동방송에서 이걸 한 거예요.
‘여러분의 집에 있는 것을 교회 낸다고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여러분 것이 아니라, 집에 있으나 교회 내나 있는 것 자체가 다 하나님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이빨조차도 하나님 것이라 말이죠. 이빨 속에 사는 세균, 박테리아도 하나님 거잖아요. 우리 세포 속에 있는 DNA도 하나님 거예요. 전부 다. 하나님의 것인데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악마가 들어오고 난 뒤에는 내 것 아니면 일 안 할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 것이니까 내 것은 아니라는 말이고, 그럼 내 것은 없으니까 내 것을 찾아야 되겠다. 이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의 후유증입니다. ‘이걸 따먹으면 너는 네가 되고자 하는 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자로 하면 ‘하면 된다.’ 아닙니까? ‘뭘 하면 되는데요?’ ‘니가 노력하면 니 것이라 여기는 것을 가질 수 있다.’ 그 말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욥기 41장 11절에 보면 온 천하는 다 하나님 것인데요. 우리교회가 누구 것이냐?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교회 말고 남의 교회는 누구 것이냐? 하나님 거예요. 배탈 난 내 자식은 누구 것이냐? 하나님 것입니다. 배탈 안 난 남의 자식은? 그도 하나님 것이죠.
안식일에 노동을 멈추고, 멈춘다는 말은 처음부터 내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재삼 확인시키는 하루를 정한 겁니다. 그러면 여기 이 사람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하여” 에바라 하는 것은 사람 한 사람 들어갈 만한 부피를 말합니다. 이걸 작게 해서 부당이득을 챙기는 거죠. 그 다음에 “세겔을 크게 하며” 세겔은 무게 다는 건데 이것도 저울을 속여서 사람을 속여먹는 거죠. 장사하는 사람들.ㅎ 이건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의 행동의 출발점이 내 것을 어떻게 키우느냐, 내 것을 키우고 거기에 하나님이 내가 내 것 키우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추가적으로 도와주시면 그거서 어떤 이문이 남으면 ‘우리 반반 갈라먹기 합시다.’ 이런 식으로 인간들이 교회 나오는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말씀 듣는 시간에 전부 다 집에 가서 말씀 다 듣고 있겠습니다만 내 것이 없는 한 나는 살 의미가 없고, 내 것이 있는 한 나는 살 이유가 발생되며 그것, 내 것이 커지면 나는 살고 싶어 하고 내 것이 작아지면 나는 자살하겠다. 뭐 한강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고, 수면제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내 것이 없어지겠다는데.
아침에도 언급했지만, 국가라는 것은, 대통령이라는 것은, 내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걸 되찾아주는 일을 할 때, ‘나는 당신들에게 세금내고 당신들에게 나는 복종할 의사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 것을 되찾아주지 못하면 나는 이민 갈 거야. 나는 뉴질랜드나 호주로 이민 갈 거야.’
그런 마음 자세로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에 늘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이스라엘을 자기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만이 주체가 돼야 되는데 왜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심기어져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 주체, 나라는 주체를 뽑아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같이 망하게 하는 겁니다. 망하고 난 뒤에 진짜 이스라엘은 맘속에 진짜 간사한 것이 없는 것, ‘주여,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집합 이예요.
그렇게 하려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주체가 불로 확 싸질러져야 돼요. 완전히 우리 죄를 인식하고 그 죄를 주께서 어떻게 미리 앞당겨서 마지막 불 심판되기 전에 미리 앞당겨서 불 심판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 됩니다.
마태복음 3장 10절에서 11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어떻게 설교했는가가 나옵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이 설교하는 것을 듣고 싶죠? 제가 대신 말씀드릴게요. 우선 나무 나오고 도끼 나옵니다. 심상치 않아요. 도끼가 나무의 뿌리를 작살낸다고 합니다. 야! 과격한 설교입니다. 이거 1부 예배, 2부 예배 같은 설교 했을 거예요. 찬송 부르고 난 뒤에 세례요한은 이런 식으로 설교합니다. 그리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신데 ‘그분은 성령과 불로써 확 싸질러 버린다. 그래서 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눈에 보이는 세상이 이게 아니고 나중에 구분되는 세상이 있다는 거예요. ‘지금 섞여 있는 세상을 전부로 여기지 마라. 마지막에 구분될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로, 가라지와 알곡으로. 그런데 알곡은 뭐냐, 성령과 불로써 미리 태워진 사람은 알곡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라지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결국은 우리가 안식일을 제대로 못 지키게 된 것이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내 것이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언약 백성이 아닌 우리 이방 민족이야 마땅히 있는 거죠. 그러면 내 것 없애고 하나님의 의를 지켰을 때 그럴 때 오늘 우리들에게 마귀에게 속한 이방들에게 안식이란 의미가 과연 무슨 의미냐 하는 것,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혹시 알려주는 게 없어요?‘ 라고 물으신다면,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안식일과 구원과 복음에 관해서 연관을 시켜놓은 대목들이 나옵니다.
그러니 사도바울한테 예수님께서 말씀의 계시를 주실 때는 다 우리가 구약의 안식일과 관련돼서 궁금한 점을 익히 아시고 그 해답을 다 준비해 놓으신 거예요. 아까 제가 세례요한 설교할 때 도끼 등장하고 나무뿌리 등장해서 작살내는 이야기하죠. 그 사도바울도 못지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설교할 때 사람들 꼬이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한 줄 알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편지 자체가 그 당시 설교였고, 설교 대신에 사도바울의 편지가 이렇게 전달되어서 그들이 영생 얻을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지는 그런 방식을 채택한 거예요.
그러면 성경 속의 현실을 들어가게 되면, 오늘날 교회에서 노인들 어떻게 해서 붙잡아 보려고 문화시설 만들고 하는 이거하고 성경 속의 교회의 모습하고 이거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완전히 달라요.
제가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동안거(冬安居), 동안거라 하는 것은 중들이라는 특수 계급이 일반 신도들에게 우리가 이만큼 아주 대단한 영적인 도 닦는 사람이라는 것을 폼 내기 위해서 그들만의 리그에서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11월 달부터 1달인가, 석 달인가 지 맘대로 정해서 깊은 산 속에 가서 벽에다 점 찍어놓고 그거 쳐다보면서 도 닦는, 수양하는 그런 게 있어요. 부처님 닮아서 우리가 해탈해서 중생들을 해탈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를 불어달라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다 잠 오면 죽 대라 해서 대나무로 만들어 진 소리 나는 것을 가지고 이쪽 어깨도 저쪽 어깨도 치고 성부 성령 성자 흉내 내는지 모르지만 쳐서 잠 깨고, 그러니까 그게 남자 여자 구분 없이 머리 깎고, 그런데 보세요. 그게 무슨 소꿉놀이입니까? 이게 우리가 익숙해졌으니까 우리가 용납되지만, 간난 아이가 시력이 있다면 그걸 보고,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냐.
사람의 모든 어떤 이미지나 문화 활동은 반복학습입니다. 반복적으로 학습이 돼서 습관화 되면 그것이 마치 이것이 진실인양 영상 되게 돼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사교춤과 운전입니다. 사교춤은 한번 길 들으면 그 다음부터는 직장에 가도 책상에 앉아도 발가지고 연습 한다고, 이걸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면 춤이 돼요. 이건 운전도 마찬가지고, 자전거도 마찬가지고. 반복해서 몸에 익히면 그것이 무슨 진리인양 여겨진다 이 말이죠.
수양하는 것이 그겁니다. 머리 깎고 자라면 또 깎고, 자라면 또 깎고, 누가 보면 머리카락하고 싸움하는 것 같아요. 계속 머리 깎고 옷도 장삼 입고 동안거 하게 되면 그들만의 어떤 일치감을 느끼는 집단을 형성하게 되면 그건 하나의 권력행위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세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주인공이 누구겠어요? 자기 자신이죠. 바로 그것이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악마적인 자기 것, 자기 수행, 내 영혼, 자기 것만 챙기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그런 것이 고객들이 만족하지 않으면 종교단체 자체가 유지가 안 돼요. 그러니까 오늘날 불교가 하는 것을 성당이 따라서 다 했고, 지금 성당이 하고 불교가 한 것을 지금 기독교가 그것을 따라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안식일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설교를 이렇게 한다고 보면 돼요. “너희들은 이제는 어떻게 다시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는 것이 편지도 있고 설교도 그렇게 한다 이 말이죠. ‘너희들이 무슨 날을 지켜? 안식일을 지켜?’ 골로새서 2장 16절에 보면 안식일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안식일을 왜 지키는데? 그걸 왜 지키는데.’ 그건 반복 학습에 지나지 않아요.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안식일을 못 지킨다는 게 판정 났어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있는 한 안식일을 지켜봐야 ‘하나님, 안식일 지켰습니다. 주일 지켰습니다. 내 것 돈 벌게 해 주세요.’ 만날 이럴 것이 뻔한데, 자기 것이 따로 없다고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생각은, 우리 머리는 도대체 내 것이 없다는 것을 도대체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내 것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망발이냐. 그게 무슨 횡포냐,’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내 것이 있다는 것은 이건 습관이고 반복이었습니다. 타고나면서. 마귀가 그렇게 습관적으로 한 거죠.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불교고 기독교고 종교 다 때려치우고 딱 세 마디가 사람을 살린다 싶어요. 그게 뭐냐 하면, ‘파이팅’ 이 파이팅을 종교적으로 하게 되면 ‘할렐루야, 믿습니다.’ 다른 표현할 수 있지만 그걸 압축해 보면 한마디예요. ‘파이팅’ 내가 나한테 힘을 부여하는 거예요. ‘파이팅, 난 할 수 있어.‘ ’뭐? 누굴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위하여.’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지키지 말라.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 주일도 마찬가지, 이런 걸 지키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그냥 지키지 말라고 하면 가서 안 지키면 역시 자기 것이 남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지키지 말라는 이유가 내가 너희의 모든 운명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께서 안식일을 다 지킨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따로 ‘나’라는 영역을 잡아서 안식일 지킨 주체자로 나설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이미 주께서 안식일 지킨 그 혜택을 듬뿍 받아라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이 주시는 귀한 날들을 우리는 허락받습니다. 모든 날이 안식일이 되는 겁니다. 모든 날이 안식일이 되고 모든 날이 은혜로 유지되는 날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고민하고 낙담할 경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반드시 내 것이 있고 내 것을 키우려는 기대가 있으면 거기에 악마는 거기에 반드시 빨려 들어와서 ‘조금만 하면 니 꺼 커지는데.’ 우리의 기대를 부푼 가슴을 더 부풀게 만들다가 거기에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는 낙담을 해버리죠.
그러면 목사님, 처음부터 내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낙담 안 하면 될 게 아닙니까? 어느 인간이 지 것이 없는데?? 어느 인간이. 누가요? 성령이 충고하지 않는 방식 아니면 인간은 돌아서면 다시 내 것을 챙기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내 것 챙기는 그 인간을 통해서 예수님이 주가 주되심을 사용한다는 그것을 믿으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 때문에 재밌고 인생사는 것이 행복을 느끼는 저희들, 옛날 이스라엘과 똑같습니다. 내 이익 위주로 모든 성경말씀을 해석하는 것도 멸망했던 자들과 똑같습니다. 그런 우리들의 죄를 찾아내 주시고 지적하시고 십자가와 연관시켜서 예수님의 공로가 얼마나 고마운 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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