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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지자 아마샤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3월 18일
본문 말씀: 아모스 7:10-17
(암 7:10, 개역)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암 7:11, 개역)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고』
(암 7:12, 개역)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암 7:13, 개역)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암 7:14, 개역)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암 7:15, 개역)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암 7:16, 개역)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계하지 말라 하므로』
(암 7:17,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참된 선지자와 가짜 선지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 인간이 그 판정을 내릴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어떤 선지자가 “나는 가짜요!”라고 나올 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봐야 하는데 그들 주장이 ‘자기 붕괴’로 이어지지 아니하면 가짜 선지자입니다.
목사라는 직책으로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면 ‘회목’이요 병원에서 일하면‘ 원목’이요 군대에서 일하면 ‘군목’이요 학교에서 일하면 ‘교목’이 되겠지요. 또한 정치판에서 굴러다니면 ‘조찬기도회’나 주관하겠지요. 그런데 이들이 하는 짓들이 모두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일이라면 모두 가짜 선지자들 노선에 해당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참된 선지자 아모스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자신이 몸담아 일하는 곳은 엉뚱하게도 과수농업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과수농업의 판로를 위하여 기도한다든지, 번영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물제비 놀이가 있습니다.
어릴 때 많이들 해봤을 것입니다. 납작한 돌을 집어다가 호수가에서 수면을 향해 던집니다. 그러면 그 돌은 중력과 물의 부력과 바랜스를 이루면서 물이 빠질 듯이 안 빠지고 통통 튕기듯이 뻗어나가게 됩니다. 참된 선지자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야 될 자들입니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처럼 푹 자기 인생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빠져들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속해 있는 단체나 조직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충성, 봉사하는 일을 못하게 만듭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경우 같으면 그는 주변으로부터 매국노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는 예언들을 쏟아놓았습니다.
따라서 누구의 심기를 건드려놓겠습니까?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이 반응을 나타냅니다. 즉 자신들이 외치는 것과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샤는 벧엘이 왕의 성소요 왕의 궁이라는 구실로 그곳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즉 벧엘의 제사가 합법적이라는 겁니다.그들 거짓 선지자들은 나라와 왕과 국가에 충성하므로서 자신이 속한 나라의 무궁발전을 위해 기도하고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봐서는 참으로 성가시는 존재가 참된 선지자인 아모스입니다.
하지만 참된 선지자는 자기 자신에게 빠져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모스에게 내려진 계시는, 거짓 선지자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야 비로소 터져 나오는 계시입니다. 바로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는 시키시는 겁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평범하고 보통사람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평범하고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을 도리어 참된 선지자로 곡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참된 선지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사는 삶의 내용들이 너무나도 자기 자신만의 안정적인 세계 속에서 파묻히고 싶어하는 내용이기기 때문입니다.
어느 대중가요 가사에 보면 이런게 나옵니다.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서로 엉켜있는 사람인가봐 나는 매일 네게 갚지도 못할만큼 많은 빚을 지고 있어 연인처럼 때론 남남처럼 계속 살아가도 괜찮은걸까 그렇게도 많은 잘못과 잦은 이별에도 항상 거기 있는 너 날 세상에서 제대로 살게해줄 유일한 사람이 너란걸 알아 나 후회없이 살아가기 위해 너를 붙잡아야 할테지만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난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너에게서 떠나줄꺼야 너를 위해 떠날거야....”.
임재범의 ‘너를 위해’라는 노래입니다. 즉 사랑해야 하면서도 결국은 자꾸만 자기 챙기기, 자기 사랑으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목사나 교인들 같으면 말씀을 사랑해야 하는데 자꾸만 말씀을 빙자해서 자기 이득을 취하려는 심보를 버릴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들은 어떻게 하면 나를 사랑하는 교인들을 확보해서 이 세상에서 사람 사는 것처럼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을까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찾아보기 힘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참된 선지자들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거짓 선지자는 참된 선지자보고 하는 말이, “도망이나 쳐서 이 동네에서 나가라”는 겁니다. 이런 대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결코 참된 선지자편을 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선지자들의 삶이 자신들의 생에 불안감을 조성하고 안겨줄 것만 같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다른 현실을 언급해야만 합니다. 유다 나라의 경우 같으면 네 번에 결쳐 부도를 맞게 됩니다. 하나는 기원전 605년, 다니엘과 왕족 및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잡혀가고 그 다음은 기원전 597년에 여호야긴왕을 포함한 일반백성들로 모든 방백들과 군사들 1만명과 많은 기술자들이 잡혀갑니다.
그 다음으로는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이 망하게 되고 시드기야왕을 포함해서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기원전 581년에 마지막 남은 유대인들을 사로잡아 갑니다. 이것은 곧 유다나라의 무너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무너뜨리시는 이유는, 지금 그 땅의 원리와 그 땅 위에서 사는 사람의 원리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천국을 간다고 교회마다 우기는데 문제는 천국의 원리와 교회 유지 원리가 맞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선지자는 무너져야 한다는 것을 외치고 거짓 선지자는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이 번영하고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죽음이야말로 참된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는 매일같이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죽음의 세력 빼놓고 또 다른 현실이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기껏 환상에 불과합니다. 참된 성도의 기쁨이란 예수님에 의해서 물제비처럼 날마다 죽음의 바다 위를 마당처럼 여기고 살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사적 복수심에 붙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악마의 종들을 의도적으로 참된 성도에게 붙여주십니다. 그럴 때는 바로 세상 멸망을 증거하시면 됩니다. 참 쉽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만이 가장 확실한 현실인 것을 도리어 반기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