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아모스 7:1-9 / 다림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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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줄
본문 말씀: 아모스 7:1-9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이한례 19강-암7장1-9(다림줄)1203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 7장1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81 페이지입니다. 아모스7:1-9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황충을 지으시매 황충이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이에 내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청컨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대화가 신약시대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만의 대화가 되는 겁니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에 사람이 끼어들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데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를 네 자로 이야기하면 중보기도입니다. 우리 인간은 중보기도는 못합니다. 기도만 할 뿐이죠. 중보기도는 중보자만이 하는 기도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것을 배제시키는 이유가 사람들은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심판의 대상이라고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인간자체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냐. 그럼 천국 갈 사람도 따로 있는데 왜 천국 갈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왜 자꾸 지옥 가는 사람들만 염두에 두고 심판의 대상이라고 그렇게 한배만 그렇게 강조하느냐 이렇게 또 나올 겁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천국 이라든지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원래 우리가 관여할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가 늘어난 것이 천국 이예요. 그냥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면 지상의 천국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오셔서 작업을 하게 되고 일을 하게 되면 예수님이 보여줬던 작업과 일의 폭과 넓이가 그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그게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천국 갈 사람이라고 그걸 우기는 그런 나쁜 버릇들이 있어요. 마치 우리가 천국에 가야 될 자격이나 권한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다 말이죠. 이것은 종교적인 욕구에 해당되고 자기 존재에 대한 욕구에 해당되지만 성경에서는 그런 건 허락되지를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천국이나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홀로 하신 일이 번져서 확대되어서 그게 팽창되어서 그 팽창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초청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천국 안에 들어올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든 뭘 하든 항상 천국에 살든 간에 반드시 조건이 붙는데 그것이 뭐냐, 예수 안이라는 겁니다.
예수 안이라는 말은 ‘그동안 너는 아담 안에서 살았잖아. 니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니 조상이 잘못됐기 때문에 그 조상이 잘못되어서 번진 그 범주 안에서 너는 못 벗어났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아담이 아담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담보다 더 센 악마가 아담을 지배하고 있었어요.
세상 신이 우리로 하여금 진노의 자녀로 그렇게 만들은 겁니다. 그리고 자기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그 악마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거기서 아무리 천국과 극락과 이런 것을 구상해 낸다 할지라도 그건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고 허구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딴에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자기 아이디어를 끄집어냈지만 그 끄집어 낸 아이디어가 결국은 예수님의 하는 작업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충돌을 야기 시킨 원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거들 문제는 아니고 장차 예수님과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속닥거리던 그 대화를 미리 당겨서 본다는 겁니다. ‘쟤를 어떻게 할까요?’ ‘내가 벌주겠다.’ ‘아유, 그렇게 하시면 저들은 미약해서 넘어집니다.’ ‘그래? 그래~? 그렇다면 내가 돌이키지.’ 하는 그런 이야기예요. 그러니 여기에 정작 당하는 이 사람들은 끼어들 수가 없는 겁니다.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황충을 지으시매 황충이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이렇게 하니까 아모스가 있다가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청할 수 있는 자격자는 이 순간에는 아모스입니다. 그런데 아모스 속에 예수님의 영이 들었기 때문에 결국 아모스가 이런 식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아모스의 고유의 자격이 아니라 아모스 속에 있는 성령이 있어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사하소서.”
그래서 아모스가 이야기하는 이것이 하나의 그림자 돼서 이것이 온전히 성취된 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하고 주고받는 그런 협상, 또는 거래, 이것에 의해서 그 하나님의 협상대로 주께서 이 땅에서 지상의 예언을 펼쳐서 우리를 구원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보면 ‘야곱은 미약하다‘ 이 말은 ’하나님, 저들에게 율법 줘서 율법 지켜서 구원받을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정도로 그들은 미약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면 그 근거에 의해서 그들은 천국에 갈 것입니다.‘라는 것을 미리 예언해서 앞당겨서 우리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럼 여기 2절에 보면 “청컨대 사하소서 ( )이 미약하오니” 미약하오니 앞에 뭐가 나와요. “야곱이 미약하오니“라고 돼 있습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집단적 개념이라는 거예요. 개인의 개념이 아니라 야곱이라는 집단을 구원하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유다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들 줄 세워놓고 ‘여기서 착한 사람 나오고 나쁜 사람은 지옥 가.’ 이게 아니라 개인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그 개인을 물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여기에 새로운 야곱, 미약하지만 용서받은 야곱을 여기다 들이댐으로써 그 자리를 장악하고 장착함으로써 못나든 잘나든 상관없이 그 안에서 야곱 안에서 그 야곱을 건지면 다 같이 구원을 받는 그런 식으로 구원시키는 겁니다.
‘나무꾼과 선녀’라는 옛날 동화에서 나무꾼이 하늘로 올라갈 때 ①번, 선녀 옷을 입었다. ②번 도약했다. 줄넘기 했다. 이게 아니죠? 제가 다른 퍼즐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두레박이 내려와서 두레박 타고 올라간 거예요. 그 두레박 앞에 이름이 ‘야곱’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냥 야곱이 아니고 미약한 야곱, 미약한 야곱 그 뒷면에 용서받은 야곱, 앞면에 미약한 야곱, 뒷면에는 용서받은 야곱, 그냥 앞뒤로 자력으로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닌 단체 안에서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안에서 늘 미약하고 늘 용서받아야 된다는 사실, 항상 새로운 사건들이, 용서받아야 될 새로운 이유들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계속해서 그 안에서 생산되는 겁니다. ‘아! 이래서 용서받아야 되겠구나. 아! 저래서 용서받아야 되겠구나.’하는 겁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게 합니다. ‘목사님, 이스라엘은 어떻게 만듭니까?’ 물으면 저는 이렇게 ‘다 이루었다.’ ‘어떻게 만듭니까?’란 말을 질문하기 전에 ‘어떻게 다 구원이 되었습니까?’란 말로 바꾸어서 질문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식으로 ’어떻게’를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어떻게 설치면 구원됩니까?‘라는 쪽으로 제발 질문을 안 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우리는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집단 구원은 반드시 그 전제가 뭐냐, 니는 니 개인적인 노력과 투쟁으로 구원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일러주는 그러한 환경을 같이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미약하다는 것을 누누이 절감하는 남은 인생을 살게 하는 거예요.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얼른 들었는데 어느 날 자기 목소리를 녹음한 걸 들은 적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도 이 방송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이 오십 중반쯤 돼서 평소에 자기 목소리 듣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기 목소리를 오랜만에 녹음한 걸 들어보니 도저히 혐오스러워서 못 듣겠다는 거예요. 저도 저 설교 못 듣습니다. 아휴~, 이거 사투리에다가 참, 이걸 듣는 사람은 보통 인내를 갖고 계신 분이 아니구나. 나도 못 듣는 걸 좋다고 듣는지는 모르겠지만, 아휴, 이걸 어떻게 듣지? 좀 아나운서처럼 목소리가 안 되나 싶은데, 목소리가 아나운서처럼 되면 백발백중 사기꾼입니다. 그러니 그것도 안 돼, 자기 자신의 모든 조건에 대해서 우리는 혐오감을 느끼면서 사는 그것이 미약한 자리 유지되는 그게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자기 모든 것, 내가 자녀 교육하는 것, 지는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돌아서면 ‘내가 미친 주부지, 이래서 말이 안 돼.’ 이런 식으로, 돌아보면 모든 게 미친 짓이 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구원은 질질 끌고 가는 방식입니다.
니 개인적인 자질에 집착하지 말고 거기서 미련을 버려라. 니 개인적인 집착과 주특기, 쉽게 말해서 남과 비교할 모든 것을 다 절단해 버리죠. 남과 비교할 모든 꺼리들을 전부 다 제거해 버리란 말이죠.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어떻게 되느냐, 환경이 같이 우리에게 따뜻한 게 아니고 매서운 환경이 주어지는데 그 환경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세 가지 환상으로 이야기합니다.
세 가지 환상! 첫 번째 환상은 뭐냐 하면 풀이 움트기 시작할 때에 황 충이 와서 그 풀을 다 먹어버립니다. 이게 첫 번째 환상.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큰 불이 나타나서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삼키는 큰 불이 일어나는 것, 이게 두 번째 환상. 세 번째 환상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담 곁에 다림줄을 들고 측정하는, 다림줄이라 하는 것은 꺾이거나 구부러들지 않는 줄을 말합니다. 빡빡한 줄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측정해 가면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지 않는 이 세 가지의 환상을 줍니다.
왜 이렇게 환상을 주느냐, 왜 환상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환상이라 하는 것은 그 단어 하나를 독립해서 놔 버리면 앞, 뒤가 안 맞는 겁니다. 의미가 소통되지 않는 난사 판, 정돈되지 않는 혼돈적인 언어들을 그냥 마구잡이로 연결시켜서 문장을 만들어서 제시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환상이란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뭔가 우리의 정상적인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정상적이라고 이야기했죠? 첫 번째 두 번째 환상과 세 번째 환상의 차이점이 있어요. 첫 번째, 두 번째 환상은 뭐냐 하면 아모스가 아직도 이스라엘에 미련을 가지고 ‘하나님, 우리나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셨잖아요?’ 처음에 이스라엘 만들 때 언약 줄 때, 율법 줄 때, 다른 나라는 버리더라도 너희만큼은 건지겠다는 약속 하에 이런 걸 줘버렸는데 지금 와서 그렇게 무서운 자연적인 재앙을 줘버리면 우리는 미약해서 주저앉아버립니다. 주의 뜻대로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처리해 달라고 해서 제안된 거거든요. 첫 번째, 두 번째 환상이 그래요. 그래서 주께서 철회해 버립니다.
첫 번째, 두 번째 환상을 통해서 여전히 아모스는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느냐 하면‘ 주께서는 다른 나라는 버려도 우리나라는 버리면 안 됩니다.’라는 자기 미련을 여전히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환상은 뭐냐 하면 8절에 보면 “내가 용서치 아니하리라” 돼 있어요. 첫 번째 두 번째 환상은 뭐냐 하면 ‘그래, 그래 내가 용서해 줄게. 그래 취소할게.’ 첫 번째도 그렇고 두 번째도 ‘취소할게.’ 해놓고 세 번째는 취소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뭣을 요구하는 걸까요? 이것은 하나님과 대화할 때 내 쪽에서 움직이지 않을 경우와 움직이게 될 경우를 구분하는 겁니다. 설명할수록 어렵습니다. 정말 어려운데 우리가 고정돼 있으면 우리의 바깥의 일의 모든 것은 움직이는 게 돼 버려요. 내가 고정돼 있으면 바깥에는 날 위해서 돌아가는 겁니다. 지구가 움직이면 하늘이 움직이고 하늘이 움직이면 지구도 따라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되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개인적인 구원에 집착하다 보니까 우리는 내가 나의 중심점으로 삼고 그 다음에 ‘주님은 나한테 뭘 해줄 것이고, 예수님은 뭘 해줄 것이고, 성령은 뭐 해줄 것이고, 교회는 뭐 해줄 거요?’라고 중심이 아닌 나를 내 중심으로 계속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겁니다.
바로 그럴 경우에 주님께서는 이 집착하게 된 그 이유자체를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하면서 세 번째 환상에서는 그 중심점 자체를 이건 허용하지 않는 겁니다. 세 번째에서는 주께서 직접 다림줄을 가지고 측정해 버리죠. 첫 번째, 두 번째는 환경을 가지고 조지시다가 세 번째는 주께서 직접 중심축에 나서서 주님이 고정돼 있고 너는 나를 위해서 너가 존재한다는 것을 세 번째 환상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첫 번째 두 번째에서 ‘아이쿠, 미약합니다.’하고 슬슬 도망치듯이 이렇게 주께 협상에 나서려는 것을, 아직도 여전히 중심점은 이스라엘 중심점 이예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환상에서 첫 번째, 두 번째는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가 아직도 존속돼야 되지만 결국은 세 번째 환상의 지점에 와서는 이스라엘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그것이 이스라엘을 만드는 방법이다.
‘하나님, 우리교회에 어렵게 하시면 어떻게 복음 전합니까?’ 아휴, 처리 하소서.‘ ’처리해줄게.‘ ’하나님, 저번에 처리했는데 이러면 우리교회 무너집니다. 처리해 주소서.‘ ’처리해줄게.‘ 세 번째, ‘하나님, 이렇게 나오시면 우리교회 무너집니다.’ ‘벌써 측정해 놨어.’ 이 말은 니가 무너지는 그것이 너 속에 잠복돼 있던 참된 교회의 등장에 절차가 된다는 거죠.
교회가 무너질 때 그 교회 안에 있는 진짜 교회가 솟구쳐 올라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무너질 때 내 안에 주께서 만들어 놓은 새로운 피조물이 무너진 나를 뚫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는 소멸돼야 되는가, 소멸 하는 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불교의 무아론이고요.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내가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항상 우리는 ‘좋다, 나쁘다.’를 구분해서 나쁜 것은 멀리하고 좋은 것만 끌어 모아서 내 안에 장착해서 나를 장식해서 그런 나를 귀한 나로 전환시키는 노력을 매일같이 아침에 눈 뜨면 매일같이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왜, 내가 너무도 아까워서. 왜, 내가 너무도 소중하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 그러한 정신이 너무도 확고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챙기지 않고 내가 나를 관리 안 하면 이 세상에 누가 관리해 줍니까? 누가? 여러분? 그건 윤복희가 하는 말이고. 아무도 우리를 위로하지 않아요. 그래서 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지옥 가면서도 어깨 톡톡 두드리면서 ‘걱정하지 마, 지옥 가도 너는 승리자야, 너는 잘했어.’라고 위로하는 것은 지옥 가는 나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지옥 가죠.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지금 모든 천국은 뭐냐, 예수님과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 그 사이에만 천국이 있어요. 다른 데는 없는 거예요. 지금 그 천국을 어디에다 박습니다. 박아서 그 박아놓으면 박은 데서 예수님과 아버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박아놓은 그것이 드디어 실체가 확 팽창하면서 확장되면서 천국이 이루길 원합니다. 그 방향 과정에 세 가지 환상이 집어 들어간다 말이죠. 너의 존재에 집착하고 너의 가치에 집착해 버리면 그것은 내가 다림줄로 그것은 새로운 건축 작업에다 하겠다 말이죠. 그러니까 현장 감독이란 말이죠. 건설 감독해서 노가다 해서 이걸 직접 만들어서 현재 있는 것 파 없애버리고 거기서 주님께서 만든 새로운 가치에 준한 새로운 피조물을 현재 니가 나만 사랑하는 그 현장을 현장으로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나 빼놓고 다른 데 측정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나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 죽을 때까지 이기주의, 그 현장을 주께서 천국 가는 사람의 현장으로 직접 그 현장을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접수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망가진다는 것이 내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 내가 전에 ‘좋다’하는 것이 이게 수상하다는 거예요. 내가 ‘나쁘다’하는 것도 잘못된 가치관에서 나온 뭔가 착오현상이라는 거죠. 나는 내 중심으로 살다 보니까 내 좋으면 뭐든지 축복인 줄 알았는데 그건 주님 십자가 앞에서 피 앞에서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신 그분 앞에서 이게 엄청난 착오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가치관 자체가 거꾸로 된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어요. 우리 보기에 얼마나 대견합니까? 장로님 기도말씀대로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이 얼마나 대견하고 착한 행동입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냥 ‘그래, 따라 와, 그래, 아이쿠, 착하구나.’ 이러면 아무 문제없는 걸 가지고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 천국이라는 것은 예수님 혼자 작업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하고 작업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갑자기 자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만들어요. 장례 치르고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따라 가고 난 뒤에 장례 치렀다 소리 듣는 것도 아니고 따라 가려던 그 찰나에 그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했어요. 그때 ①번, ②번, ③번 환상이 나온 겁니다. ‘예수님, 따라가려고 했는데, 맘먹었는데, 아이고, 그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내가 안 따라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일단은 아버지 장례 치르고 그 다음에 예수님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보세요. 사흘 뒤에 돌아가실 수도 있고 사흘 전에 돌아가실 수도 있는데 그 타이밍이 아주 멋진 타이밍 이예요. 딱 예수님 제자 되려고 따라가려는 그 순간, 아버지를 딱 죽게 만들죠. 그 촬영장면이 합천 세트장에서 하는지 모르지만, 멋진 촬영장면 나왔어요. 그렇게 하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 그럼 다른 사람은 먼저 가고 니는 사흘 뒤에 따라 와.’ 이렇게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도 효자 소리 들으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니까 영광 돌릴 것이고, ‘아이쿠, 착한 자식, 효도까지 하는구나.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네.’ 이래서 그 사람이 자기 동네에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허락하지 아니하고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고 니는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를 죽게 하신 그분이 누구냐 이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 아닙니까? 지금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천국이 있는데 그 천국을 확장하는 방법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죽이 맞는 거예요.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니 아버지가 니 아버지인 줄 아느냐?’ ‘아버지입니다.’ ‘그게 정상인 줄 아느냐?’ 정상이 뭡니까? 죽은 자만 죽은 자가 아니라 죽은 자도 죽은 자고 죽은 자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그들도 죽은 자고, 그러면 다 everybody 다 죽은 자인데, 산 자라는 것은 뭐냐, 지금 니가 나를 따르면 그 순간에만 산 자가 되지, 만약에 니가 장례에 거기 참석하면 너도 같이 죽은 자가 된다는 거예요. 천국은 없다는 겁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새로 만들 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들 때 있는데 지금 너는 내가 만든 천국에 니는 나는 죽은 자로서 가담돼야 되고, 산 자로서 가담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산 자로 가담돼 버리면 그건 니가 계속 옛날과 동일하게 나는 옛날의 가치관도 옳았고 지금도 예수 안에서 옳다고 변화 된 것이 없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없이 옛날에 구원받고자 천당 가고자 하는 그 심보가 진짜 천국 안에서는 착오가 일어난다 이 말이죠.
옛날에 구원받고자 했던 그 심보는 거짓된 심보고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 자기 일방적인 자기주장에 불과한 거예요. 그건 이스라엘이 아니고 가짜입니다. 그 이스라엘을 불러서 진짜 이스라엘을 그 사람 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 와중에서 뭐냐, ‘니는 죽은 자 이거든.’ 이걸 분명히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환상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 기존의 언어들은 이미 인간들이 자기가 산 자라고 여기고 우기는 사람들끼리 소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언어기 때문에 그 언어를 다 깨어버리고 다 깨어진 언어를 조각들을 임의로 맘대로 조립해서 자기가 죽은 자일 경우 나는 나쁜 자라는 것을, 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납득이 되는 새로운 문장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게 하신다 말이죠.
그러면 ‘내가 이걸 이해했다’가 아니라 ‘이해 못하는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죽으셨구나.‘라는 쪽으로 그 환상을 완벽하게 중심점을 잡고 해석이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모든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 때문에 죽으셨구나.‘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죽어야, 그 죽음이 하나의 밀알이 되어서 그것이 열매로 맺힐 때, 그것이 하나의 확장될 때 그 확장된 안에서만 이 모든 말씀은 비로소 그 실체를 얻는 겁니다.
우리 자신은 이러한 주님의 계획에 현재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아주 긍정적으로, 아주 기쁘게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교회를 만들 때 천국 사람을 만들 때 7인, 7나팔, 7대접이 나옵니다. 시간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 현장이 7인이고, 그 현장이 7나팔이고, 그 현장이 7대접입니다. 깊이를 더해가는 겁니다. 깊이를 더해가면서 그 밑바닥에 있는 그것이 까발려짐과 동시에 구원됨이, 예수님의 피의 능력이 이렇게 큰 사랑인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만들죠.
이거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지구의 중심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지하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지각, 그 다음에 맨틀, 그 다음에 외핵, 그 다음에 내핵에서 끝납니다. 맨틀 온도만 해도 표면이 4000도 올라가요. 태양 표면과 비슷합니다. 안에서 불처럼 끓고 있어요. 그걸 내려갈 때 그 엘리베이터 창문 밖에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하지만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너희 몸 죽인 자를 두려워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 불에서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그 주님의 피의 고마움이 세상을 깊이 알고 자신이 이 세상의 가치를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점점 더 기쁨과 환희가 그 사랑의 높이와 넓이가 점점 더 풍성이 다가오는 거예요. 자기의 착오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래서 우리의 남은 인생은 착오와 착시가 유효한, 계속 이어지는 그런 여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늘 착각이었어. 늘 착오였어. 늘 내 중심이었어.’라는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환상이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공로 중심인 것을 깨닫는 그 정답을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모스가 받은 것이 모든 인간이 배제된 대화내용이었습니다. 주께서 다 이루었는데 우리는 꼼수를 쓰면서 내 가치까지 살리려고 부질없는 짓들을 해왔습니다. 이제는 내 공로, 내 가치, 내 존귀함, 내 사랑, 그거 없어도 구원됐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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