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아모스 8:11-14 / 영적 기갈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8:11-14 / 영적 기갈

정인순 2012. 4. 8. 15:58

 

 

영적 기갈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4월 8일                            

 

본문 말씀: 아모스 8:11-14 

 (암 8:11, 개역)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2, 개역)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암 8:13, 개역)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암 8:14, 개역)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언약이란 폭파하는 속성을 지니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늘 축복과 관련된 말씀이기를 고대합니다. 오늘 본문 끝에 보면 ‘엎드려진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면 결코 인간들이 고대하는 좋은 일을 보장해주시지 않습니다. 일방적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일방성이 말씀 내막에 의해서 주어지는 지를 알면 됩니다. 광야 시절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적인 갈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가 되면 다른 차원의 갈함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양식이 없거나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참된 말씀이 없어 갈함을 느끼는 시대가 되고 그 갈함의 결과로 사람들이 죽게 되고 엎드려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의 죄의 깊이를 염두고 두고 변화있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준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의 변화에 대해서,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느끼는 요구사항과 일방적으로 연결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되니 멸망하는 겁니다.

이는 언약의 변화는 곧 사람 자체와 그들의 죄도 날이갈수록 점점 깊어진다는 사실을 감안하라는 말씀입니다. 옛날 범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인간들이 아닙니다. 새로운 양상으로 그 도가 짙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극악무도한 죄를 짓지 않는다 할지라도 달라진 언약에 비춰보면 극악무도한 죄보다 더 큰 죄들이 세상에 난무하게 됩니다.

바로 그 죄란, 지난 날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야심을 만족시키는 우상으로 전환시킨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는 챙길 것을 챙기기 위해서 믿어서는 안되고, 도리어 나는 어떤 새로운 죄에 물들여져 가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조치에 맡겨야 하는 겁니다.

자기 딴에 제대로 복음을 안다고 하는 순간, 집안에 난데없이 사랑하는 가족이 처참하게 낯선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때, 불쑥 숨김없이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자비로운 하나님이 왜 이런 엄청난 사건을 저에게 안기는 겁니까? 참으로 불만스럽고 원망스럽습니다”고 본심을 털어놓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양식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말씀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갈함입니다. 계속 해서 자기 자신이 유리하다고 여기는 상황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브엘세바란, 아브라함이 그 지역의 추장인 아비멜렉 사이에 체결한 ‘언약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브엘세바에 우상에 세워지고 사람들 사이에 유명해진 것은, 그 브엘세바의 계약으로 인해 영원히 이 유다 땅에 유다 사람들의 소유로 확정했노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보장한 증거가 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아브라함 자손’이 선조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은 혜택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브엘세바의 언약은 새언약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마감되고 철폐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자기네들을 혈육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것을 근거로 브엘세바에서 발생된 땅 소유권을 계속해서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의 이라크 땅인 갈데아 우르 지방을 떠난 아브라함 가족은 하란을 거쳐서 이곳 브엘세바까지 옵니다. 문제는 이러한 땅들이 주인이 없는 무주공산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흔히들 하나님의 구원이 ‘무에서 유’로의 구원이라고 말들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게 되면 ‘없다’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되기 전에는 그냥 여타의 인간들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지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냥 생존해서 살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발적인 언약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순전히 ‘언약’에 준해서 모든 사태가 번지고 진전되고 정리됩니다.

이로 인해 평범하게 있는 주변은 반(反)-언약적 성질을 보여줍니다. 갑자가 자신들의 행함과 믿음과 자랑거리 같은 것들을 역사적으로 나열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자존심을 들고서 복음에 반대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성도는, 자신이 바로 그런 속성을 품고서 암 생각없이 살아왔다는 사실을 차후에 알게 됩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성에서 자신의 충족성 쪽으로 구원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잘난 나를 더욱 잘난 나로 바꾸어주시면 그런 하나님을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말하는 잘난 조건이란 과거에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 것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 ‘간직함’이 말썽거리가 되는 겁니다. 아비멜렉 족장은 아브라함에게 다가와서 “소문에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분이던군요. 당신을 위해서 이 우물을 제공하겠습니다”고 나온 겁니다. 아비멜렉이나 아브라함이나 ‘산다는 것’은 물과 양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내민 사례마저 아비멜렉은 거절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제안합니다. 이 시대 우리들 끼리 맺은 호의로 머물수는 없고, 자자손손 이 우물이 아브라함 가족의 소유임을 증명하는 그런 계약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이는 곳 ‘아브라함 자손’이 나타날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아비멜렉 추장으로부터 아브라함이 우물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양식이나 물로서 생각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역사가 지속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해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그런 물이나 양식의 비축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것을 노리면서 옛날 은혜 받은 장소를 성지로 바꾸는 그 사고방식이 곧 영적으로 어둡고 갈한 증거가 됩니다.

사람들은 옛날 육적인 은총이 지금도 계속되리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그곳을 우상 섬기듯이 섬김겁니다. 바로 이것이 언약의 진전에 의하면 저주받을 일이 됩니다. 언약에서 말하는 진정한 양식은 예수님 위주이지 자기 위지가 아닌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늘 십자가 앞에 세워서 새롭고 발전된 죄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이한례

23강-암8장11-14(영적 기갈)1204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8장11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83 페이지입니다.

아모스8:11-14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은 이렇게 하면 너희들은 추가적으로 이런 것을 챙길 수 있다. 이 말씀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엎드러지고 망하고 피곤하고 죽고 하는 하나님이 만든 그 상황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엘리야 시대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6개월, 6일 동안이 아니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을 때에 그 비가 안 온 원인이 그건 바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그 말씀 속에는 ‘까불면 맞는다.’가 포함돼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주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 속에 필히 그 저주와 심판과 멸망 이런 것들이 거기 포함이 돼 있다는 겁니다.

 

이번에 5월 5일 날 예정됐는데 청도의 어떤 깊은 산골에서 특강을 하는데 주제가 ‘언약’ 가지고 주제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제가 글을 쓰고 있습니다. 노아언약 같은 경우에는 홍수가 난다는 거죠. 금을 준다든지 은을 주는 게 아니고 홍수가 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언약이 임했다는 이 말은 ‘이 세상은 이제 망했다.’ 라는 말과 같은 말로 취급하면 됩니다.

 

언약이 떴다. 아! 좋아라가 아니라 위기다. 이렇게 보시면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시는 게 되겠죠. 시편 127편 같은 경우에도 하나님이 세우지 않으면 다 허물어버린다. 그런 말씀도 나옵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니까 오늘 본문에 ‘엎드러진다.’ 할 때 아! 그걸 아주 실감나게 다행스럽게 여겨야 됩니다.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있구나. 그렇게 보시면 되죠.

 

그러면 그 다음 문제는 이렇게 풀립니다. 뭘 어떻게 잘못했기에, 뭐 어떻게 문제가 있기에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인데 그들이 엎드러질 수밖에 없느냐. 그렇다면 ‘어떻게 잘못했기에?‘ 한다는 말은 도대체 언약이 무엇이기에, 다른 말로 하면 숨어있는 말씀이 어떤 식으로 숨어있었기에 그들은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는가, 이렇게 보면 되죠.

 

오늘 본문에 보면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 기근이 아니고 물이 없어서 기근이 아닌 것을 보내겠다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 때문에, 말씀이 그리워서 굶주린다는 이 말은 이건 다행스러운 사람입니다. 아니 물 있고 양식 있는데 뭐가 아쉽겠습니까? 물 있고 양식 있는데, 그게 전부인데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좀 이렇게 난해하더라도 이해를 해주셔야 될 것은 언약이란 진국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어렵게 그렇게 분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뭐가 어려우냐 하면 옛날 광야에서는 물이 없고 양식이 없어서 갈함이었습니다. 목이 말랐어요. 그런데 이것, 언약이 발달하면서 물이 있고 양식 있는데 목마른 사람을 등장시키게 하는 것이 언약의 그 다음 차례에 등장할 언약의 본래 모습이 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니까 20대 여성이 내몽고 지방에서 살던 한국에 돈벌이 왔던 사람한테 성폭행 당하고 살해됐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여성이 혹시 직업여성이 아닌가, 밤늦게 돌아다닌 거니까  몸 파는 그런 여성이 유락시설에 종사하는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는데, 어제 보니까 그 여성은 회사 다니는 사람인데 아버지의 카드빚을 갚기 위해서 잔업까지 추가적으로 일 하다보니까 늦어서 오다가 걸려서 살려달라고 7분 동안 하다가 죽었다 말이죠. 동생들 용돈 주고 그야말로 전형적인 굳세어라 금순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아가씨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무슨 죄가 있는데 그런 도둑놈, 그런 정신 이상자한테 걸려서 청춘을 꽃봉오리도 피우지도 못한 채 남들 다 가는 시집도 못가고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자기애를 가져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인생을 도중에 접어야 될 때, 하늘도 무심하시지, 무슨 죄가 있어서 그 사람을 처참하게 당해야 됩니까? 그 아가씨가 만약에 우리 여동생이고 우리 일가고 가족이라면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어 나갈 때 그 때 약식이 없어 갈함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니가 평소에 말씀에, 약속에서, 언약에서 관심조차 없었었기 때문에 ‘주여 무슨 그 착한 아가씨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게 죽이십니까?’라는 반발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 안다. 뭐 십자가 돌아가시고 뭐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뻔질나게 잘 아는데, 막상 가족 중에 여동생이나 조카가 만약에 당하면 ‘하나님이여,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렇게 당합니까?’라고 툭 나올 때 ‘니가 평소에 말씀과 언약에 관심 없었잖아.’ 이렇게 대꾸해서 나오시는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주의 말씀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우리 관심사나 추구하는 바가 전혀 딴 동네 이야기예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느 교회 늙으수레한 여자 분들이 얘기를 하는데 옆에서 들었어요. 교회 이야기하는데 늙은 권사님들인 모양이죠. ‘우리교회 요새 햇 권사 생겼기 때문에 그들은 일 많이 해야 돼.’하고 할 때 햇 권사라는 용어가 상당히 나로서는 처음 듣는 용어예요. 아! 요새 저런 용어를 쓰는구나. 햇나물, 햇밥, 햇 권사, 방금 권사 된 사람을 햇 권사. 신권사보다고 햇 권사가 훨씬 더 용어가 와 닿는 거예요.

 

자, 햇 권사들이 일을 한다는데,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이게 주의 일이냐, 교회 일이냐, 하는 말이죠. 그 늙으수레한 권사님들은 ‘우리는 일 많이 했으니까  햇 권사들 일 해라.’ 아! 이게 주의 일하고 상관없구나. 햇 권사 일하라 하는 것은 교회 일이지, 주의 일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이 교회 자체, 그리고 밤늦게 다니는 일상적인 잔업 하는 모든 것이 이게 목마른 상태, 말씀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들을 이 세상에 대해서 펼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오해들에 대해서 그럼 성경에는 오해가 있었느냐, 있었어요. 있었던 것이 오늘 14절에  용어 하나 나옵니다. 지명 나옵니다. 브엘세바.

 

자, 브엘세바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브엘세바란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이 언약과 관련돼 있습니다. 브엘세바란 뜻은 7개의 우물,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맹세의 우물, 언약의 우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브엘세바라는 것이 지명 중심으로서 여기서 언약이 향기처럼 향처럼 피어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브엘세바의 진정한 뜻을 잃어버릴 때는 브엘세바를 세상적인, 세속적인 야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죄악 된 품성이고 저주받을 품성이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교회를 햇 권사가 등장해서 봉사하는 것처럼 ‘교회 잘 다니는데 왜 내 딸은 이렇게 처참하게 성폭행 당하고 죽습니까?‘라고 따지는 것처럼, 전부 다 브엘세바에 담긴 진정한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겉으로만 껍데기만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들이 발생되는 거죠.

 

이 브엘세바란 지명은 어떤 지명이냐 하면, 하여튼 성경에 나오면 지명부터 알고 있어야 되는데 이스라엘 지도에 뾰족한 사해, 죽음의 바다,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지역, 지금은 바다가 되었죠. 소금 끼가 많아서 사람이 뜬다는 바다. 그 사해 바다가 이 동네 대구 지묘동이라면 그 브엘세바가 어디냐 하면 서쪽으로 거창, 50키로, 60키로 거창쯤 됩니다. 그 브엘세바가 어떤 취지가 있느냐 하면 현재 이라크에 살고 있었던 그 아브라함 아버지 가족이 바로 브엘세바가 있는 이 땅, 현재 있는 이스라엘 땅이죠. 그 옛날에는 이스라엘이 없었고 이방인 땅, 아비멜렉 땅 이예요. 원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언약이란 뭐냐 하면 이런 게 설명하기 힘든데 설명해 볼게요. 언약이란 비어있는 공터를 내가 차지하는 게 아니고 현재 바탕이 있는 반 언약, 비 언약, 하나님께 대드는 세력이 있는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사건을 일으켜 버리면 그 사건과 더불어서 없던 성도가 발생되는 것, 그게 언약의 위력입니다. 없는 데서 만든다 하면 우리는 존재로 생각해서 ‘아무것도 없는데.’ 이러는데 그게 아니고 없기는 뭐가 없어요? 있어요. 어둠이 있고 다 있는데 분명히 여기서는 성도라든지 천국 갈 백성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어떤 사람도 천국이고 뭐고 전부 다 지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천국 갈 인간도 못 되는데, 거기 낯선 웬 우발적인 사건이 터져 버리면 그중에서 다 같이 지옥 갈 사람인데 지옥 가는 중에서 몇 몇이 몇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으로 바뀌는, 그럴 때 그게 바로 언약의 위력이라고 보는 겁니다.

 

언약의 위력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사건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뽑아져 나온 사람은 천국 가지만 그 사건의 의미를 모르고 남겨져 있는 사람은 필히 지옥 간다. 요 양면을 보여줄 때 그게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 구원받는다.’ 해서 한쪽은 이야기 안 하고 한쪽만 자꾸 이야기해서 사람들이 지적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노력만 자꾸 했지, 실제로는 구원이 안 되는 상태에 있습니다. 반드시 나라는 인간은 지옥 가야 되는데, 그 다음에 사건이 나서, 쉽게 말해서 나란 인간은 지옥 가야 되는데,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러면 그건 사건이 아니고 니가 만든 지가 조작해 낸 사건이기 때문에 그건 언약이 아닙니다. 자기가 공부하고 교육 받은 것이지, 수련과 학습을 받은 것이지, 구원받은 게 아니고 너는 지옥 가야 되는 인간인 것을 사건이 터질 때 알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 나 지옥 가야 되는구나.‘라는 걸 안 그 사람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이 어렵죠. 지옥 가는데 무엇을 행하면, 내가 예수 믿는 행함을 행하면 지옥 가는 인간이 예수 믿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게 되어서 그래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아! 내가 예수 믿어도 지옥 가야 되는구나.‘ 라고 아는 사람이 사건을 일으킨 분 때문에 사건을 받아쥔 나 때문이 아니고 내가 나 때문에 작업과 잔업을 시켜서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는 아무 작업도 해도 소용없는데 그걸 소용없게 하게 하시면서 까지 주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손으로 건져내는 사건, 그것이 바로 언약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브엘세바에 있는 사람들은 브엘세바 사건을 알아요. 그래서 어떤 우발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 됐다는 걸 아는데 문제는 그 사건을 자기 소유화 시킨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4절에 보면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 말은 브엘세바에 뭘 세웠느냐 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이 일어났던 지점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를 의미를 두고 거기다 하나님의 단을 세워서 섬기자.‘라는 자들은 지옥 간다 이 말입니다.

 

교회 세울 때 터, 점 잘 쳐야 됩니다. 터 좋은 데, 좋은 터 잡는다고 설치면 그 좋은 터가 지옥 터로 돼요. 아무 의미 없이 세워야 되는데 의미를 주고 세워버리면 그게 지옥 터가 되는 거예요. 그 의미가 예수님 십자가, 지금 일으키는 십자가, 바람같이 부는 성령을 대신해 버린다 말이죠.

어떤 분이 십 몇 년 전인가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시비를 걸면서 하는 말이 이런 이야기해요. ‘목사님한테 강의를 들어보니까 내가 묻고 싶습니다.‘ ’예‘ ’목사님, 기도를 믿습니까?‘라고 그래요. 여러분, 예수 믿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사람의 취지가 뭐냐 하면 당신 말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복음 다 좋고 다 아는데 반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아! 반만 이야기한다는 걸 수천 번 들었는데 반만 이야기한다. 왜 기도 하라는 이야기는 왜 안하느냐는 거예요. 그걸 넌지시 지 딴아 안 들키려고 묻는 게 뭐냐 하면 ’목사님은 기도를 믿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걸 풀이하면 내가 기도하는 기도는 반드시 효험 된다는 것을 내가 믿는 그것이 나머지 남아있는 믿음이야 반몫이 아니냐 이 말을 하는 거죠. 그 사람은 예수도 믿고 자신이 기도하는 기도의 효과도 믿어줘야 이게 균형 맞는 믿음이라고 우기고 싶은 거예요. 얼마나 위태위태합니까? 위태위태한 것이 아니고 이미 맛이 가버렸지만.

 

그게 바로 브엘세바가 주는 유혹이라니까요. 광야에서 모세가 놋 뱀 봐라 했을 때 놋 뱀 쳐다본 사람은 구원받았습니다. 여러분 놋 뱀이 문제가 된 거예요. 그 놋 뱀이. 그 놋 뱀이 문제가 돼서 예레미야에서는 놋 뱀을 없애버렸습니다. 예레미야 45장 4절에 보면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리라” 내가 만든 것도 내가 철거해 버린다는데, 누구를 위해서? 예수님 십자가를 위해서 모든 그 전의 예수 십자가를 위해서 십자가의 그림자처럼 남아있던 모든 것을 십자가를 위해서 없애버린다 이 말입니다.

 

새 언약을 위해서 옛 언약을 폐기처분 한다 이 말이죠. 왜 폐기처분 합니까? 새 언약 때문에. ‘나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그것을 폐기처분 시키는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준비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나는 예수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하는 그 사로방식이 철폐돼야 되고 폐기돼야 된다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하지,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그것을 믿는 내가 그걸 소유화 시킬 때 그 내 소유화 된 나의 믿음을 내가 믿으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이 말이죠. 말을 해도 제가 어렵게 한다.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 게 선지자들이 그 유명한 브엘세바, 브엘세바 무슨 사건인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요한 브엘세바 우발적 사건을 가지고 후대에서 그걸 자기의 기념물로 처리한 거예요. 기도원 많이 다닌 사람들은 기도원 가기가 무서워요. 이쪽은 내가 은혜 받은 곳이고, 이거는 내가 방언 터진 곳이고, 이쪽 기도원은 내가 교회 헌금 없을 때 헌금 갑자기 헌금 생기는 기도한 곳이고, 이 바위는 반들반들 해서 내가 먼저 터 잡아 놓고, 이 소나무는 내가 한번 뽑았는데 도로 심어서..., 모든 것이 그 사람한테는 브엘세바예요.

 

자, 브엘세바가 무슨 이야기냐, 이런 이야깁니다. 브엘세바 사건은 우물인데, 저 이라크에 있던 사람이 터키 동부, 대충 시리아 북쪽 하란에 와요. 하란에 와서 그래서 바로 오지 않고 현재 아비멜렉 땅, 그 당시에는 블레셋 땅도 아니었어요. 요새는 블레셋 땅 이예요. 팔레스타인이라 하거든요. 성경에는 블레셋, 영어로는 팔레스타인. 그 땅에 왔을 때 그야말로 아브라함은 집도 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냥 주께서 데리고 인도하는 거예요. 이미 데리고 인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물 찾아 떠나는 거예요. 왜 우물을 찾아야 되는가, 그들을 볼 때 그들이 장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생계가 유지돼야 되잖아요. 그럼 이라크에서 현재 이스라엘 땅으로 오면서 목축을 하면서 양 떼를 몰면서 오는 거예요. 마치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오듯이 이는 양 따라 염소 따라 그들을 따라 오는 겁니다. 오면서 제일 필요한 것이 뭐냐, 초지와 그리고 우물 이예요. 초지를 따라오다 보면 먼저 선배 격들이 먼저 목축했던 그 길을 따라 오게 마련입니다. 그냥 길 따라 양과 목축을 하면서 왔죠.

 

그런데 어느 우물도 처음에 우물을 팔 때 돈 들여서 파고 했던 것은 대부분이 공동체 것 이예요. 그 집안 거예요. 예전에는 그걸 부족 국가라 하는데, 집안 거라 말이죠. 세상에 우리끼리 동네 우물을 파놨는데 다른 데서 와서 양이 한 두 마리도 아니고 수천 마리 끌고 와서 물을 먹이면 그 물이 지하까지 고갈되잖아요. 누가 좋다 합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도 이것은 공격과 표적이 되는 겁니다. 위태위태한 사람입니다. 환영해 주는 사람도 없고, 그야말로 나그네 인생이죠. 나그네 인생! 설움 받는 겁니다. 자기 자리가 없으니까 왜, 이방인이고 아웃사이드고 외계인이니까 이건 이쪽 법에 의하면 죽여도, 죽는 정도가 아니고 다 뺏겨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신 거예요.

 

그 시도의 의미에서 우리에게 밝혀진 것은 뭐냐 하면 양식이 없고 갈함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서 앞으로 주어질 예수님 당시의 진짜 양식은 이런 육적인 목마름이나 양식의 결핍을 빙자해서 실제로 인간은 육이 아니고 다른 식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육적인 생존의 위태위태함을 겪도록 아브라함한테 그렇게 한 겁니다. 구약 때에!

 

신약 때는 양식 있고 물 있는데 영혼은 위태위태하게 만들죠. 양식은 있는데 인생은 허무하고 물은 넘치는데 사는 의미가 없고 목적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현대인들은 세상 보는 눈이 굉장히 전부 다 안목이 좁아요. 낮게 보기 때문에, 그 순간순간 터지는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어떻게 생각하지를 못합니다. 완전히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당시에는 코앞에 당장 물이 없고 양식이 없게 그렇게 순간순간 다급한 정황 상황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겪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침 우물이 있었어요. 우물이 있는데 보니까 아비멜렉 족장이 우물을 관리하고 그 사람 소유입니다. 그런데  우물에 도착했을 때 난데없이 아비멜렉 추장이 하는 말이 ‘아브라함 선생님, 아이구, 아브라함 되시죠?’ ‘제가 아브라함입니다.’ ‘소문 들었습니다.’ ‘아니 무슨 소문?’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면서요?’ 일부러 선전한 게 아닌데. ‘어디서 들었습니까?’ ‘아, 다 듣는 소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이렇게 거대한 부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함께 하신다면서요?’ 천사가 왔는지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제가 이 우물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또 ‘아이쿠, 그러지 마시고 제가 우물 값을 드리겠습니다.’하고 양을 7마리 내놔요. ‘아이, 이런 거 안 주셔도 됩니다. 그냥 드리겠습니다. 아이쿠, 받으세요. 안 주셔도 됩니다. ’그럼 저한테 아브라함한테 우물을 주시는 것은 고마운데 염치없지만 한 가지 더 추가하겠습니다.‘ 아브라함 쪽에서. ’이왕 은혜 받는 거 염치없지만 추가하면, 뭐냐 하면 ‘대대손손 우리 자식 대대로 이 우물을 등기 이전을 우리 아브라함 자손에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좋다고 기증을 했을 때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그 자손들이 와서 법원에 고소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이 땅을 한 오천 평을 대학에 기증을 해놨는데 후손들이 그건 아버지가 미쳐서 우리 허락 없이 했다고 재판 걸어서 나오는 수가 많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방지할 수 있도록 법적인 계약을 합시다. 그때는 법적인 계약이 종이로 하는 게 아니고 돌무더기로 하니까 ‘그렇게 합시다.’ 해서 현재 살아있는 사람끼리 계약이 되었어도 그 둘 사이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들의 계약으로 영원토록 유용하다는 그 사건이 바로 브엘세바 언약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드셨어요. 십자가 죽으신 지는 2천년 지났습니다. 십자가 죽을 때 그 십자가하고 언약하신 분은 인간은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거기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자신의 피와 살을 담보로 해서 브엘세바 같은 영원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택함 받은 사람만 그 십자가의 언약의 혜택을 입는 거예요.

 

지금 남아 있는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브엘세바의 우물을 아브라함이 목말라 했을 때 그 브엘세바를 그리워했는데 이때 아브라함은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세상 것을, 양을 목을 축여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아무리 영적이고 하나님 은혜로 산다 하지만 이미 육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 땅의 것을 필요할 수밖에 없어요. 늘 필요해요. 필요하다면 은혜고 나발이고 다 뒷전이고 우선 ‘아이쿠, 저 우물, 아유, 저 우물’하고 찾게 마련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찾고 있는 기본적인 육적인 것을 반 언약, 언약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을 통해서 이걸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진짜 새 언약도 이처럼 하나님이 나서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브엘세바 언약을 뭐로 보느냐 하면 육적인 생계를 보장하는 신의 축복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렇게 해서 그것을 가지고 유포시킨 거예요. 거기서 제단 쌓아서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그래서 목사님이 심방 가서 어떤 기도할 때 ‘기도를 믿습니까? 주께서는 기도하시면 복 주십니다. 생계유지됩니다.’라고 이런 식으로 하니까 진짜 우리에게 영적인 갈함은, 죽고 산다는 그것이 진짜 있어야 목마르지 않은데 ‘아이, 나 살아야 돼, 하나님 뭘 하시나, 우리 딸이 잔업하다 죽었는데, 뭐 하시노.’ 만날 ‘햇 권사는 열심히 봉사해야 우리교회 부흥될 텐데.’ 그야말로 옛날에 있던 브엘세바 사건을 육적인 것을 자족시키는 그것으로만 언약을 종결시키는 그것, 그러한 잘못된 생각.

 

하나님께서는 그 브엘세바가 너희들이 찾던 그렇게 유용했던 그 아브라함이 단순한 그런 육적인 걸 채워주는 게 아니라면 양식이 없어 갈함이 아니고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브엘세바가 나타난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의해서 주실 죽어도 살고 죽어도 괜찮은 그런 영원한 생명나무 열매, 그것이 바로 브엘세바 언약의 완성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뭣 때문에 목마릅니까? 뭣 때문에 우리는 갈합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남한테 내어놓을 만한 근사한 게 없어서 우리는 짜증을 내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사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세상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영생의 팔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만족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