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아모스 6:8-14 / 허무한 것 본문
|
허무한 것
본문 말씀: 아모스 6:8-14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이한례 18강-암6장8-14(허무한 것)1203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 6장8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80 페이지입니다. 아모스6:8-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내실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너와 함께한 자가 있느냐 하여 대답하기를 아주 없다 하면 저가 또 말하기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할 것이라 하리라 보라 여호와께서 명하시므로 큰 집이 침을 받아 갈라지며 작은 집이 침을 받아 터지리라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여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의 뿔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 자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저희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옛날 글로 돼 있는 이 성경을 후딱 읽어버리면 지금 무슨 이야기하는지 문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혀 알 길이 처음 읽어가지고는 막막하죠. 마치 고어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늘 읽었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쳐버려요. 자기가 만든 나라를 자기가 칩니다. 만들 때 취지가 있겠죠. 없앨 때도 취지가 있습니다. 없앨 때 취지가 딴 취지가 아니에요. 만들 때 원리 원칙이 없으면 날라 가는 겁니다.
우리가 물건, 시계를 하나 만들더라도 시계가 만들어 놓고 잘 돌아가지 않으면 그걸 폐기처분하잖아요. 그때 시계한테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요리사가 음식 만들 때 맛을 보고 자기가 원하는 맛이 안 나왔다면 쓰레기통에 집어넣죠. 그때 이미 만들어진 음식이 하는 말이 ‘주인님, 이럴 것 같으면 왜 저를 만들었습니까?’하고 반발하면 ‘니 같은 거 없애려고 만들었다.’라고 집어 던지죠.
피조물과 창조주,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가 원래 이런 겁니다. 사람들이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그러한 구조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독약이죠.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폐기처분돼야 될 인간이 폐기처분되지 않아야 될 인간으로 이게 전환해 버려요. 전환하면서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심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주변에 유포를 시켰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그런 식으로 유포를 해서 그런 식으로 하나의 단체와 단합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아모스 6장 이런 말씀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폐기처분 할 것 같으면 만들기는 왜 만들었느냐.’ 이런 식으로 고개 쳐들고 달려들기 일쑤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성경을 건성건성 읽어서 그래요. 여기 6장 8절에 보면 첫 번째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만군의 하나님이죠. 이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하나님하고 다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들은 폐기처분돼야 되는 겁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그냥 가만히 두면 만군의 하나님 그 값을 못해요. 그 속성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자신이 만든 나라를 자기가 뭉개버리고 종이비행기 만들어서 못 날면 그 자리에서 뭉개잖아요. 자기를 뭉개는 가운데서 부숴버리는 가운데서 비로소 만군의 하나님의 갖고 있던 본래 모습이 거기서 톡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뭉개버리면 국화빵 구워서 뭉개버리면 앙꼬가 팍 튀어나오죠. 앙꼬라 하는 것은 평소에 눈에 안 보이는데 터져야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망해야 만군의 하나님이 나오게 돼 있어요. 교회가 망해야 하나님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이거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몰라요. 교회는 망해야 그 망하는 맛이 있어야 돼요. 교회가 문 닫는 맛이 있어야 돼요. 그럴 때 하나님의 맛이 나와요.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했는데 중간에 마귀가 들어와서 ‘너도 하나님처럼 해 봐라. 꼭 하나님한테 쥐어 사는 법이 있느냐, 너도 독립해라. 너도 선악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 해서 하나님이 두 종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쪽에는 선악과로 무장한 것, 인간이죠. 그 다음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고집하시는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이죠. 하늘에 태양이 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만군의 하나님이란 뜻은 그 자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전쟁하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전쟁할 때는 반드시 적이 있어야 되는데 그 적이 누구냐, ‘바로 나도 하나님이다.’ 나도 가수다 하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이다.‘ 라고 나오는 그쪽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겁니다. 붙어보자 누가 센지 보자. 그래서 전쟁하면서 그 전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하는 겁니다. 전쟁을 하시는 하나님, 붙이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이죠.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전쟁을 어떻게 시작하는가, 인간이 전쟁 해봐야 그건 지가 하늘보고 주먹 흔드는 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전쟁이 안 되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전쟁을 시작하시는 분이 시작을 합니다.
시작을 하는데 어디서 시작을 하는가. 자기가 만든 나라, 이스라엘을 상대로 해서 시작을 합니다. 이걸 신약성경 베드로전서에 보면 교회를 상대로 해서 전쟁을 벌이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섬기겠다고 모여든 인간들의 집단입니다. 그 집단을 상대로 해서 하나님께서 싸움을 벌임으로 말미암아 그 인간이 만든 교회가 하나 둘씩 뭉개지고 부서지고 촛대가 옮겨지고 하는 그 와중 속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적이 어떤 정보와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가가 국화빵 터질 때 앙꼬 나온 것처럼 그 교회를 찌부러뜨리고 뭉갤 때마다 ‘아! 인간들이 뭔가 근사한 걸 해보려 해도 요런, 요런 것들이 나오는구나.’ 하는 것을 역사의 바닥에 펼치는 겁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겁니다. 근데 성경에 보면 ‘니 밑바닥을 봐라. 저 위 쳐다보지 말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하지 말고 저 니가 딛고 있는 밑바닥에서 어떠한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보라는 겁니다.
창세가 4장에서 가인이 하나님 앞에 먼저 제사를 드리죠. 그런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위를 바라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서 피가 땅에 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 위를 바라보지 말고 니가 하는 행세로 인하여 발생된 니 피의 자국을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은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 인간 배후에 있는 악마의 싸움에서 그것이 접촉될 때 나타나는 그런 표적과 흔적들이 얼룩덜룩한 무늬와 흔적으로서 장식돼 있는 타일 같은 것, 그게 이 세상의 모양새입니다.
그것을 이방나라는 제쳐두고 인간도 아니니까 제쳐두고 그걸 자기가 만든 내부 이스라엘 내부에서 그걸 먼저 실시합니다. 실시하고 그 긴긴 역사가 지나서 아모스 6장에 와 있습니다. 망한다는 이야기죠. BC700년 경 이야깁니다. 아모스 경우에 이렇게 자기나라 이스라엘을 이런 식으로 뭉갭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없다고 치고 제가 대신 이야기할 테니까 저보고 욕은 하지 마세요. 성경에 있는 거지만 여러분이 모른다 치고 제가 성경 내용을 대신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식구 10명 있더라도 다 죽습니다. 불끈불끈 화를 내야 돼요. 그리고 혹시 시체 치우는 장례사가 와서 여러분 식구 다 치울 때 장례사 하는 말이 ‘여기 10명 말고 또 죽은 사람 없습니까?’라고 이야기할 때 ‘예,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왔습니다.’라고 할 때 장례사가 ‘쉬잇~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 이름으로 말하지 마세요.’라고 당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10, 11절에 나옵니다.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내실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너와 함께한 자가 있느냐 하여 대답하기를 아주 없다 하면 저가 또 말하기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할 것이라 하리라” ‘쉬잇~’ ‘우리는 시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끼리 살아남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쉬잇! 하나님이란 말 하면 안 돼. 하면 옆에 있는 공산당이 잡아갑니다.’ 이래 되죠.ㅎ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만들어 놓고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살면서 ‘쉿’ 하나님의 이름도 자기 성의 이름도 못 부르게 만드는 상황으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몰아가신다는 것이 예언돼 있습니다. 몰아가실 때 ‘쉿’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 말라면, 그러면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될 텐데 이런 설명을 할 때는 뭐로 설명을 해야 됩니까? 하나님 이름으로 설명하지 말고 하나님 이름을 빼고 다른 걸로 설명을 해야 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게 이해가 안 되죠?
법을 이야기할 때 ‘이 법은 하나님이 주신 법입니다.‘라고 앞에 하나님을 붙이고 그리고 그 뒤에 법을 갖다 붙여야 법을 지킬 때 좀 경건하게 지킬 수 있고 정성스레 지킬 수 있다는 게 우리의 상식인데 그 하나님 이름을 빼버리고 그냥 법을 지키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이 법이 우리가 생각하는 법은 개뿔도 법도 아니에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재앙과 고생과 환난이 모아 모아져서 새로운 법으로 새로운 계시로 이 땅에서 부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일종의 이스라엘은 뭐냐, 화석이 된다는 겁니다. 고생대, 중생대, 하는 화석, 쥬라기 공원에 나오지만 쥬라기 공원에 공룡시대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진화론자들이 지 맘대로 주장하지만, 하여튼 있고 캄브리아기,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보면 남 조류의 화석들이 나온다 말이죠. 그것이 나올 때 고고학자들이 남 조류의 화석을 보면서 거기서 세포분열 생각하고 볼 때 작은 돌에 새겨진 문양을 보면서 주변의 상황을 이야기해요. 심지어 그 뼈들을 통해서 이 뼈들이 회전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깃털이 있는지 없는지, 날 것인지 말 것인지, 파충류 이런 것까지 조사가 다 됩니다. 심지어 그거서 DNA까지 이야기해 버리면 나중에 사람의 내부를 살피면 사람 먹는 음식까지 나와요. 음식으로 소화기관을 연구해서 이런 소화기관에는 이러이러한 음식들이 적당하게 소화됐을 것이라는 그 당시의 위장의 크기와 이런 것 다 측정합니다. 인간의 뼈라는 것은 인간의 중력에 맞서게 되기 때문에 뼈 한 마디만 알아도 키가 몇 센티미터며 밑의 하반신의 치수와 상반신의 치수의 비교가 다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화석조각처럼 사용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이 지켰다는 그 법은 그것은 저기 갖다 버리고 너희들이 지킬 수 없는 법을 너희를 현실화 시키는 현실화 시킨 그 모든 마주침의 사태 하나하나를 새로운 법으로 내가 재창조하고 생산해 나가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리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생각 하나하나가 새로운 법을 만드는 하나의 재료로 활용되는 거죠. 어떤 재료로? 너희들이 법을 깨뜨렸다. 너희들이 법을 어겼다. 그런데 그 법을 어긴 것이 법을 만드는데 재료로 너희들이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이거 얼마나 긍정적입니까? 이 얼마나 낙관적 생각 이예요? 하여튼 이런 소리만 하면 ‘뭐 부정적이다. 성경 말씀을 못 지킨다. 자꾸 발상을 부정적으로 가져가느냐, 긍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게 얼마나 긍정적입니까? 죄 짓는 것도 법으로 만드는 좋은 멋진 화석으로 삼는다. 이 얼마나 긍정적 이예요?
그것이 바로 12절에 나옵니다.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말이라 하는 것은 달리게 돼 있고 소라 하는 것은 밭 갈게 돼 있는데 소가 있어도 갈밭이 없고 다 침략당해서 엉망이 됐으니까, 말이 있어도 달릴 바위가 없고, 말도 없을뿐더러, 다 잡혀 갔으니까,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여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렇게 돼 있습니다. 새로운 단층촬영을 하는 겁니다. 니 자신은 니가 봐서 모르는데 내가 어떤 새로운 심판이라는 사건을 일으킬 때 그 속에서 너 자신을 보게 되면 너는 칼라가 아니라 완전히 흑백사진으로 다 튀어 나오죠. 이번에 아카데미상에서 흑백사진이 최고상 먹었답니다. 그리웠던 모양이죠.
그런데 성경 전체는 우리를 칼라 풀한 것으로 보지 않고 흑백사진으로 보는 겁니다. 새까맣게 엑스레이 사진처럼 보는 겁니다. 거기 보면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쉽게 말해서 너희들의 법은 독하고 독한 법이 되었다. 사랑이 나오는 법이 아니고 만인 대 만인의 투쟁, 홉스란 철학자가 이야기했잖아요. 니가 날 이용할 건가, 아니면 내가 너를 이용해 먹을 거냐를 한번 해봐? 한번 힘겨루기 해봐야 하는 동원되는 모든 법입니다.
법이라는 걸 통해서 니가 나에게 삼킴을 당할 거냐, 아니면 내가 너를 삼킬 거냐에 동원되는 모든 것들을 사람들은 이 성경 가지고 동원시켜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이 법을 지켰으니까 하나님 빨리 복 주세요. 복 내놔요.’ 이건 내 이득을 위해서 하나님을 공격하겠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 다음에 “공법을 쓸개같이” 쓰다는 말 이예요. 그 다음에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여” 인진이란 말은 쓰디 쓴 쑥을 인진이라 합니다. 공법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여“ 그 법에서 나온 걸 따먹을 수가 없죠.
그리고 14절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만군의 하나님은 전쟁하는 게 전문이라 했죠? 전쟁을 하기 때문에 전쟁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하나님 이예요. 따라서 전쟁 없는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곱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은 없어요.
저는 하나님과 꼭 반대되는 모양새를 거리에서 자주 봅니다. 버스를 타거나 길가를 보게 되면 저는 길가를 심심해도 그렇지만 유심히 안 봐요. 보면 누가 담배 피우나 보지만, 뭐를 보느냐 하면 중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시장 가게마다 문을 열고 들어가죠. 그러면 가게마다 땡그랑, 땡그랑 종이 달렸죠. 그럼 주인은 소리만 듣고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하고 보면 중 복 입고 뚝 뚝 뚝 뚝 뚝 ‘시주하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은 저건 만군의 하나님 모습이 아니다. 저건 평화를 가져오는 거예요. 나한테 시주하면 뭘 준다? 당신에게 업보가 쌓여서 당신과 특히 당신 잘되는 것보다 그 사람에게 확 관심을 끄는 것은 ‘당신의 자녀가 잘 됩니다.’ 하여튼 자식 이길 부모는 없잖아요. 그래서 모든 공략할 때는 자식을 공략해야 돼요. 헌금도 자식이 잘된다 하면 전부 다 돈 꺼내느냐고 바빠요. 하여튼 자식이 전부예요. 결혼 안 한 총각은 아무 감흥도 없겠지만 부모들은 ‘그래 내 하나 포기할게. 자식만 잘된다면 뭐든지 못 하리, 내 자식 잘된다는데 뭘 못 하리.’ 다 내게 돼 있어요.
그러나 그건 만군의 하나님 방법이 아닙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꼴 보기 싫어하는 원수를 데려다가 적대신 우리를 완전히 박살내시면서 ‘고거 참, 법으로 또 하나 재료로 삼을 거 만들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생밀로 뭘 못하잖아요. 갈아야 되지 않습니까? 갈아서 밀의 진수를 끄집어내서 밀가루를 만들든지 만두를 만들든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국수를 해먹든지. 주께서 이걸 갈아버려요. 왜 가느냐. 오늘 본문에서 성경의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원래 성경에는 개인이 없습니다. 이걸 여러분 아셔야 돼요. 성경에는 개인이라는 게 없어요. 단체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성경은 개인이 없고 인간은 있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집단적인 무리지음을 인간이라 하지, 개인을 인간이라 하지 않거든요.
아브라함이 혼자 하나님의 언약이 와도 나중에 아브라함은 자기 개인으로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자기 밑에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집단들이 자꾸 발생되게 돼 있습니다. 집단 중에서 나온 뾰루지, 종기, 일종의 집단에서 나온 조그만 하나의 뾰루지로서 내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을 위한 개인은 성경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 예수님의 몸의 머리로서 예수님이지, 예수님도 단독적인 예수님이 아닙니다. 자기 지체가 따로 있어요.
사람들은 근대 주체사상에서 인간은 개인주의로 돌아섰습니다. 개인주의다 보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나하고 너하고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다는 겁니다. 니나 저나, 저나 니가 똑같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천당 가는 사람이나 지옥 가는 사람이나 똑같다는 거예요.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지, 니가 저 사람하고 차이나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등장하는 그 대목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데 거기 보면 다윗이란 소년 다윗이 나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전쟁하는 것은 여러분 다 아시죠? 그 소년 다윗이 전쟁할 때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사무엘상 17장 45절에 보면 “블레셋 너는 창과 활을 가지고 나온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잘 들어보세요. 성경에서 이래서 성경이 어려워요. ‘당신은 어떤 무기 가지고 나오세요?’ ‘나는 창이 있다. 칼이 있다. 방패 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이쪽에서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가지고 나왔느냐?‘ ’가만있자, 기관총에다가 M..수류탄 몇 개 있더라. 총알 몇 개 있더라. 탱크 있더라. 미사일 있더라.‘ 이래 돼야 저쪽과 이쪽이 같은 내용의 상황이 소통이 되고 교류가 돼요. 저쪽에는 칼, 방패지만 이쪽에서는 기관단총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남자가 ‘나는 주먹이 세다.’ 하면 여자는 무기가 뭡니까? ‘나는 성형했다. 이쁘다.’ 이렇게 나오면 무기가 되죠. 같은 레벨이 되는 거예요. 안 우스운 모양이죠. 그런데 저쪽에서는 인간이 개인에 속한 무기거든요. 그런데 다윗은 뭘 들고 나오느냐 하면 개인에 속한 무기나 어떤 미모나 인물, 자기 지혜, 자기 똑똑함, 자기 경건, 믿음 신앙 소망 이런 걸 들고 나와야 되는데 이게 우리 상식인데, 그게 아니라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간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 진 뒤에 있는 이스라엘을 위한 사람이다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 주인이 누굽니까? 다윗이라니, 누굽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 지키는 방패가 돼서 내 자체가 무기를 든 게 아니고 내 자체가 바로 무기예요. 어떤 무기?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로 나간다. 이 자체가.
우리가 아는 상식은 이렇습니다. 저쪽에서는 방패와 큰 칼과 창을 갖고 나왔지만 다윗은 몰래 물맷돌 들고 나갔다. 우리가 아는 상식은 그거잖아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골리앗이 방심해서 한번 졌다 치고 다시 한 번 깨어났다 칩시다. 두 번째 할 때 돌팔매가 되겠습니까? 골리앗이 이마에다 철갑을 5센티나 박아났는데.
여러분, 토끼하고 거북이하고 이솝이야기보면 누가 빠른가 시합했죠? 그때 잠시 방심해서 토끼가 너무 많이 추월했으니까 좀 자다 보니까 사람이 잠자다 보니까 제 정신이 없잖아요. 그래서 가다보니까 우승했다 말이죠. 그러면 세상에 삼세판이라고 한 번 더 해보자 말이죠. 진짜 토끼가 팬티 입고 한번 달려보자 말이죠. 누구처럼 팬티입고 마라톤하고 퇴근하지 말고. 밤늦도록 밤 12시에 팬티입고 마라톤 하시는 분 있답니다. 우리 교회에.ㅎ 진짜 팬티입고 토끼하고 거북이하고 붙어보자 말이죠. 이건 게임이 안 되죠. 이건 토끼는 평소에 자신이 빠르다는 자기의 자질을 갖고 있고, 거북이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인간성,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개인적입니다. 개인적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고, 다윗은 소년 다윗인데 아직 크지도 성숙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까 돌멩이가 날아가서 맞았지,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만군의 하나님께서 벌린 전쟁은 무슨 뜻이다? 개인이 갖고 있는 자질과 능력과 모든 경험가 믿음 모두 다 인정하지 않는 싸움, 다시 말해서 니 개인적인 너를 지킬 수 있는 어떤 것들, 무기를 일체 그걸 무장해제하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전쟁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모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망했다. 결국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상을 섬겼다. 우상을 섬긴다는 말은 만군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 다시 말해서 ‘우리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지켜야 돼.’ 요새 말로 하면 ‘우리 교회는 부흥돼야 돼.’라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그러한 하나님은 박살내는 하나님이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교회는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만군의 하나님께 속한 교회는 오직 울산에 있든지 미국에 있든지 어디든 하나밖에 없습니다. 머리가 하나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오직 주께서 주신 거예요. 주시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우리 자신이 선악과 따먹고 대대로 우리 유전자 DNA로 계속해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인간이 진짜 만군의 하나님 앞에서 만날 때에 개인적인 무장을 완전히 해체되면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 이미 편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 갖고 있는 자질로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소속됐다는 소속의 엮어짐, 소속의 관계성 속에서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망함으로서 이스라엘은 구원받는 거예요. 내 것, 나의 것, 항상 내 집, 내 가족, 내 교회, 나의 종교, 앞에 ‘나’를 똑 떼버리자 말이죠. ‘나’를 떼버리고 주께서 말씀의 계시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나, 나를 저 뒤에다가 붙여버리면 돼요. 앞에 주님을 먼저 붙이고 나를 저 뒤에다 붙이면 됩니다. 그럼 내 인생은 없어지고 주께서 알아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것으로 인생,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법이 아니고 그 자체가 우리 사는 것이 법이 되는, 사랑으로 사는 것이 법이 되는, 새로운 법이 바로 본문 말씀을 통해서 등장하는 징조가 고대 BC 7세기경에 이미 보이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시는 일이 빈틈이 없고 어떤 기계도 필요 없는 부품이 없는 것처럼 저희들이 조목조목 하는 행세가 죄 짓고 웃고 울고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하나의 부품이 되게 해주시고 부속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아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암 7:10-17 / 거짓 선지자 아마샤 / 120318 (0) | 2012.03.18 |
|---|---|
| 아모스 7:1-9 / 다림줄 (0) | 2012.03.11 |
| 아모스 6:1-7 / 안일함 (0) | 2012.02.27 |
| 암 5:21-27 / 정의가 하수같이 / 120219 (0) | 2012.02.19 |
| 암 5:18-20 / 여호와의 날 사모 / 122012 (0) | 2012.02.1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