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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암 5:21-27 / 정의가 하수같이 / 120219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암 5:21-27 / 정의가 하수같이 / 120219

정인순 2012. 2. 19. 15:28

 

정의가 강물 같이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2월 19일                            

 

본문 말씀: 아모스 5:21-27

암 5:21, 개역)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암 5:22, 개역)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암 5:23, 개역)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암 5:24, 개역)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

(암 5:25, 개역)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암 5:26, 개역)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암 5:27, 개역)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불신자들은 성경 말씀을 보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반면에, 신앙인들은 성경 말씀은 자기 힘으로 지킬 수 없는 말씀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현실답게 만드는 것은 인간들의 분투노력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능력으로 인하여 달성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필히 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피할 길이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주 당연한 조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알아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 자신들이 평소에도 빠짐없이 절기 지키고, 월삭을 지키고, 소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망해야만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절기와 성회로 모이고 찬양대를 조직해서 찬양을 하고 소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은 공법을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흘러내리게 하는 행함인 줄 알았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것을 평소에 우상들을 섬기는 태도인 ‘자기를 위하여’ 감을 포기하지 않은채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굿’과 ‘기윤’을 만들어 지고 가는데 여기서 ‘식굿’이란 숙곳으로 소리날 수 있는데 이는 천막 또는 움집이라는 뜻이다. 즉 이방 신의 사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윤’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별을 숭배하기 위해서 세운 신상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식굿과 기윤을 만들어 지고 간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부터 숭배하던 행위를 버리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자들이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 군대에 사로잡혀 그 살던 땅으로부터 추방될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호세아 9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그들은 정기적으로 절기와 성회를 지키고 소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가운데 이방민족에게 망합니다. 당연히 그들의 절기도 같이 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결국에는 망하고 마는 나라에 왜 처음부터 소제와 화목재나 번제의 조항이나 절기와 성회로 모이라는 지시는 왜 내려주신 걸까요? 출애굽기 23:14에 보면,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지시에 ‘자기를 위해서’가 첨부되면 그것이 곧장 우상섬김으로 변해버리는 겁니다.

우상이란 무엇일까요? 기원전 1700년 경에 지금의 터어키 지방에 힛타이트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다른 나라에는 없던 많은 철광산을 갖고 있었는데 그 광산으로 인하여 철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그것이 그 나라의 특산물인 동시에 나라를 부강하게 키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믿는 신이라는 ‘바람의 신’입니다. 바알신의 일종이지요. 만약에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가 잘되게 하고 비가 제 때에 오는 신들을 믿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상들은 인간이 감히 손 댈 수 없는 별의 변화를 통해서 신의 뜻을 헤라리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신을 섬길 때는 형상화하는 작업이 우선입니다.

형상화되지 않는 신은 없는 이유는, 인간이 무슨 언어의 개념을 구성할 때는 일단 모양새를 머리 속에 그리게 마련입니다. 그 그려진 모양새를 통해서 신으로 구체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별의 형상화 해서 그들의 생업에 도움되는 신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여호와 하나님은 따로 국가적으로 의식을 치르면서도 구체적인 삶에서는 각자 자신의 발전과 번영과 안정된 삶을 위해서 거기에 적절한 신들은 따로 챙긴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자기를 위해서’가 하나님 앞에 통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절기와 성회를 지탱하는 원칙은 과연 무엇입니까?

민수기 8:16-18에 보면,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일절 초태생 곧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모든 처음 난 자를 치던 날에 내가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제사와 성회의 원리는 애굽에서 처음 나오던 날에 치러야했던 유월절 어린양 죽음의 원칙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 원리에 의할 같으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는 다 사람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이 됩니다. 그 장자들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만의 특이한 일들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이 유월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원칙에 참여하려는 자는 할례를 행하야 하는데 할례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동등성’을 나타냅니다. 즉 할례를 행하는 칼은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약속 내용은 모든 이에게 동등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요 정의요 공법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광야 40년을 시작하는 때부터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인적 식성과 상관없이 모두 만나만을 먹어야 했습니다. 맛좋은 만나, 맛없는 만나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차이란 필히 ‘자기를 위해서’라는 원칙이 따로 챙겨져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있다면 그 사람들 끼리 성회 경쟁, 절기 경쟁, 복 경쟁, 화목적 경쟁이 발휘되기 마련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군대에게 다 사로잡혀 가는 것은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균등하고 동등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다시금 되새겨주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망해봐야 아는 것이 진리이기에 늘 그 심판 앞에서 자기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따로 구축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이한례

 16강-암5장21-27(정의가 하수같이)1202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 5장21절에서27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80 페이지입니다.

아모스5:21-27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경을 보면서 신앙인과 비 신앙인의 차이점이 나옵니다. 신앙인들은 이 성경 말씀은 우리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신앙인인 반면에 이걸 어떻게 지켜보겠다고 하는 것은 비 신앙인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 거꾸로 돼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너희들이 하는 모든 종교적인 것이 나에게 모두 거부당한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예언 속에 우리가 휘말려 들어가 있습니다. 벗어놓은 빨fot감을 세탁기에 집어넣었을 때 빨래가 센 게 아니고 세탁기의 수조가 더 세죠. 우리는 하나의 빨랫감이라면 그 세탁기에 돌아가는 수조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하는 행위보다 이 말씀 실천보다도 우리는 반드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말씀의 소용돌이가 더 세고 확실한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의 실천력보다 주님의 실천력이 더 센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따라간다는 말은 우리는 누누이 이걸 느끼는 겁니다. ‘야, 우리의 찬송과 우리의 예배와 기도 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걸 느끼면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정작 생각하는 공의와 정의와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 힘으로 그걸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이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온 몸으로 느끼는 것, 그게 바로 신앙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불가능한 것을 언급하고 우리가 불가능한 것을 주님께서 가능케 하심을 감사하면서 주님의 가능하신 그것을 의지하라는 것이 신앙이거든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점에서 이런 말씀들이 불가능한가를 아주 촘촘하게 따져봐야 돼요.

 

여기 21절에 보면 “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기 지켰고 성회 지켰고 다 하나님께 번제, 소제 다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께서 이 의식을 안 받게 됐느냐 하는 내막을 알아야 돼요. 이 내막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예배 드리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물 드리고 십일조 하고 헌금하고 이것이 마치 자동적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뻐하는 일인 양, 이건 우리 스스로 자신을  속게 만듭니다. 예배 잘 드렸으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렇게 그냥 막무가내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기는 것은 기존교회에서 목사들이 그렇게 사기 치는 거예요.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예배드리고 뭘 해도 집회하고 찬양해도 안 받겠다는데, 안 받겠다는데 인간이 ‘열심히 했습니다.‘ 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성경 말씀이 소용없다는 건데.

 

하여튼 하나님이 소용없다고 하는데 우리는 기어코 가려고 해요. 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내 비춰야 좀 마음이 우리가 약간의 위로가 되는 모양이라. 경제적으로요. 교회 안 오고 집에 있으면 ...느낌이 드는 것처럼. 해야 괜히 했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걸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이 오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우리 맘에 습관화 돼 있고 구조가 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이미 하나님은 아십니다. 아시고 그거 소용없다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예배드리고 교회 세워서 뭐하고 전도 대 하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런 말 할 필요도 없다고 이렇게 나오는데 성경에서 그런 것을 내가 안 받는다. 할 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 이유가 여기에 26절에 보면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이래 돼 있거든요. 여기에 식굿이라는 용어와 우상 기윤이라는 고유명사 특별 용어가 나옵니다. 식굿이란 숙곳이란 뜻인데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집, 일종의 신을 섬기는 신의 사당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윤이라는 것은 한자말 같은데 그게 아니고 바로 별 숭배하기 위해서 만든 우상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도 섬기고 자기가 원하는 신도 섬기고 둘 다를 섬길 수 있다고 여기면서 살아왔어요.

 

요즘 말로 번역하면 교회 다니면서 예배드리는 것도 할 수 있고 내가 내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 따로 뭔가 계획하는 그것도 이것도 의미가 있고 둘 다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이 잘못이죠. 하나님께 예배, 번제 성회 이런 것을 안 받으면 그 관계로서 우리가 따로 꾸무적 거리며 한다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우상에 대해서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는데 우상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 그런 인상을 많이 받습니다. 제가 수십 년 설교하면서 느낀 점은 우상이라 하면, 이상하게 우리는 우상을 안 섬기는데 성경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이야기가 많고 오늘날 현대인들은 우상을 안 섬기고 있고 그래서 마음에 가슴에 와 닿지가 않는 거예요.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그 다음에 뭐라 돼 있느냐 하면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나를 위해서 만들은 것은 모든 것이 우상이 된다는 말을 사람들은 그게 와 닿지가 않아요.

 

그래서 제가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기원전 1700년경에 힛다이트라는 나라가 있어요. 일종의 우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힛타이트라는 곳이 어디냐 하면 지금의 터키입니다. 힛다이트가 성경에서 헷 족속입니다. 그 족속이 뭘 했느냐 하면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든 민족 이예요. 철을 만든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신은 아주 독특합니다. 그들은 바람의 신을 믿었어요. 철과 바람, 그런데 신이라는 것은 그들은 신을 어떤 모델로 삼아서 신을 섬기거든요.

 

인간은 어떤 말을 할 때 그림을 그려서 말을 하게 되고 그린 모습이 형상화 돼 있기 때문에 신을 이야기할 때도 대자연의 신을 이야기할 때도 뭔가 눈에 보이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별 같은 그런 것 가지고 신의 형상을 대신해서 신에게 하소연하는 겁니다. 바람하고 철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싶지만 철은 온도가 1500도 이상 올라가지 않으면 제대로 좋은 철을 만들 수 없어요. 철광석을 녹일 때 온도가 1500도 이상 올라가야 합니다. 1500도 올라가는 방법은 나무로 땔감을 해서 숯을 만들고 숯을 지펴서 1500도 올립니다. 그때 송풍기라 해서 바람을 집어넣는 그러한 기술에 따라서 좋은 철이 되느냐 마느냐가 달린 겁니다.

 

철을 만드는 이 사람들이 바람의 신이라 한 것은 ‘이 나라, 남들이 없는 철광석, 철, 이런 것들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이제는 철을 주신 하나님께서 바람까지 주셔서 그 바람으로 인하여 이 철이 생산되어서 이 나라를 부하게 발전하게 잘 되게 하옵소서. 한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짧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신을 섬길 때 인간은 목적 없이 섬기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를 위하여 이니까. 그러면 그 목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지방의 특산물, 대추 같으면 대추 신, 양파면 양파 신, ‘그 지방의 특산물과 관련된 기후변화를 적당한 기후로 우리에게 제시하소서.‘라고 신에게 비는 거예요. 그게 바알입니다. 그 지역에 있는 셈족의 모든 공통적인 신은 바알이고 바알의 종류 가운데 바람 신이 있고 폭풍 신이 있고 북쪽 신이 있고 별 신이 있고 다 있어요.

 

이 바알이란 뜻은 뭐냐 하면 자연을 주관하는 신인데 그 신중에서 각자각자 자기의 특산물, 자기의 상품화 될 수 있는 것, 자기가 생산 잘할 수 있는 그것에 합당한 신들을 그렇게 바알 신을 다시 해석해서 그걸 변형시켜서 거기 적당한 모습을 전부 다 신들을 섬기는 겁니다. 포함하면 바알이고 그 바알은 A라는 신의 그 자식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뭐하냐 하면 바알 신을 부활의 신으로 본 거예요. 씨앗을 뿌리면 뿌린 씨앗이 죽으면 안 되잖아요. 다시 살아나야 곡식을 거두니까. 그래야 밥 먹고 사니까. 그래서 땅의 기후에게 바알신이 땅의 기후를 줘서 곡식이 잘 익어서 곡식을 생산해서 이걸 자기가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해서 나라가 부강하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신이라는 것은 목적 없는 신이 없고 다 자기의 목적과 결부된 신을 우상이라 하는 겁니다.

 

이래도 현대인들이 여호와, 예수, 성령, 삼위일체를 이것을 그냥 참된 신이라고 우기겠습니까? 찬송가 보면 알죠. 찬송가 가사를 제가 소개할 테니까 이 가사가 얼마나 재미있는가 보세요. 옛날 찬송가 498장인데 제목이 뭐냐,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인데 1절 가사를 제가 불러볼게요.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은사 원한 내게 은사의 주님, 신유 구한 내게 신유의 주님, ㅎ 입맛대로 빵집에서는 빵 잘 만드는 하나님, 소금에는 소금 잘 되는 하나님, 만약에 날씨가 만약에 비가 온다, 그러면 소금 장사 조져버리고 찜질방은 너무 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각 사람마다 같은 날씨를 보고 같은 하나님이 날씨를 관장한다면 그 하나님을 두고 각자 원하는 대로 짜증냈다가 좋았다가 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1절 가사는 참을 수 없는데, 그래도 2절 부터는 정신 차렸어요. 뭐라 그러느냐 하면 ‘말씀 위에 서서 내 뜻 버리고, 1절에서는 지 뜻 실컷 이야기해놓고, 2절에서는 내 뜻 버리고 감정 버리고 말씀에 서니, 이렇게 돼 있어요. 3절에 보면 나의 모든 소원 던져 버리고 주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네. 소원 던져 버릴 것 같으면 뭐 하러 1절 가사를 그렇게 졌나 몰라.ㅎ 1절로 꼬여서 복음으로 이끈다. 이런 전략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숙곳, 여기서는 식굿이라 해서 그런 사당을 만들고 종교 단체를 만들면 그것을 사람들은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단골 같으면 입소문 난다고. 그 집에 가서 기도하면 3가지 중에 한개는 소원 들어준다. 그것이 입소문 이예요. 어느 교회 가면 병 낫는다. 그 교회는 병 낫는 전문이라. 여기 영천에 가면 만물 사 있잖아요. 만물 사 가면 그렇게 손들이 많고 그렇게 불자들이 많고 버스를 대절해서 오는 이유가 뭔지 몰랐죠. 굉장히 간편해요. 부처가 누워있는데 발바닥을 문대면 돼요. 이건 아이큐 50이라도 은혜 받을 수 있어요. 발바닥 3번만 문대면 응답이 된다니까요. 응답이 안 되면 정성으로 문대야지, 정성으로 누워있는 부처 발바닥을 문대면 소원이 응답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교회도 예수 상 만들어서 눕혀서 발바닥 문대는 것이 소문나면 장사가 된다니까요.ㅎ

 

사람들이 지금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식굿에 가 있고 기윤에 가 있는 거예요. 이건 성경은 안 봐도 되고 이건 예레미야, 신명기 하나도 몰라도 돼요. 민중들이라 하는 것은 바빠서 성경을 볼 시간도 없어요. 민중들, 대중들이 쉽게 지금 소원이 폭발 직전이고 이걸 소원 성취 안 하면 속이 불이 날 지경 같으면 그저 간단한 것, ‘그저 바람의 신이여, 빨리 송풍기로 좋은 철 만들어서 옆집보다 장사 잘 되게 하옵소서.‘ 이러기만 하면 된다니까요. 자기를 위하여.

 

21절에 보면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여기서 이 본문을 우리가 이걸 이룰 수 없다고 했는데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중요한 말 이예요. 왜냐 하면 성경에서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 한다” 이 말씀을 딱 넣고 볼 때 소위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교회들이 있어요. 예배 갱신 교회, 라는 곳이 있습니다. 저희들 모임이 있어서, 예배를 제대로 하는 것이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신앙을 부흥하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하는 진리는 간단해요. 절기마다 커텐 색깔 바꾸는 겁니다. 루터 교나 소위 오래된 교회, 영국 성공회, 그런 교파에서는 앞에 커텐 색깔 바꾸는 걸로 지가 교회라고 티를 내요. 어떤 때는 보라 색, 어떤 때는 파란 색, 어떤 때는 노란 색, 부활절 같으면 흰색,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감각적으로 눈에 띄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뭐라 하느냐 하면 성회나 절기 이런 걸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안 듣습니다.‘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하나님께서 성회나 절기를 미워할 것 같으면 그러면 처음부터 그런 말씀을 지키라는 말씀을 안 주는 것이 앞뒤가 맞는 이야기잖아.‘라고 그들은 반발하여 들어온다 말이죠.

 

출애굽기 23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명령이잖아요. 다시 읽어 볼게요. “너는 매년, 일 년에 세 번씩 내게 나와 절기를 지켜라” 세 번씩이라 하는 것은 유월절, 수장절, 맥추절, 세 개를 지키라는 겁니다. 중요 절기 세 개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도 유월절 지킨다고 부활절 지켜서 헌금 뜯어내고 맥추절 지킨다고 보리헌금 뜯어내고 마지막에 추수감사절에 돈 뜯어내고 크리스마스에 돈 뜯어내고 그러잖아요. 그게 다 소용없다니까요. 그런 설계가. 그게 다 소용없다니까요. 그 설계가. 그런 거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럴 것 같으면 성경에 출애굽기 23장 14절에 “너는 매년 세 번에 걸쳐서 절기를 지키라’고 했던 이 말씀은 ‘그러면 왜 있는 건데?’ 이렇게 반박해 들어온다 말이죠. 거기다가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 22절에 보면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돼 있다 말이죠.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화목제, 소제 번제, 안 받으면 그러면 레위기에 1장부터 나오는 소제는 이렇게 드리고 이건 이렇게 드리라는 것은 뭐가 되느냐, 그럼 하나님이 왜 줬는가, 그럼 제가 이야기하죠. ‘모르지?’ ‘모르겠다.’ 모르면 내가 알려주겠다 이 말이죠.

 

출애굽기 31장에 보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뭘 만드느냐 하면 거기에 분향단과 번제단과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받침과 제사장 복장과 다 만들어요. 자, 제사도 없다. 소제도 없다. 화목제도 없다. 절기도 안 지킨다. 이러면 하나님이 오홀리압과 브살렐에게 임명하여 이걸 만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이걸 왜 만들라 했는가 하는 겁니다. 제가 그 이유를 지금부터 이야기할 텐데요.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안 듣습니다. 왜, 이게 돈이 안 되니까요. 뭔가 갖다 바치고 드려야 할 때마다 주정헌금이나 뭐든 사람이 모여야 헌금이 되는데 예배시간마다 헌금 시간이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이렇게 돼 버리면 사람이 안 모이면 돈이 안 모이면 그러면 목사는 뭐 먹고 삽니까? 그러니 이건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교회를 만드니까 교회 자체가 우상이다 말이죠. 하나의 바람의 신이예요. 여호와가 바람의 신이라니까. 다른 사람은 다른 신을 섬겨도 목사는 여호와 신, 예수 신, 교회 신을 섬겨서 그거 가지고 자기가 먹고 살려고 그 짓하고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닌데.

 

그럼 하나님의 뜻은 뭐냐, 오늘 본문 아모스에 보면 찬양도 하지 말라 했어요. 교회서 찬양집회, 드럼치고 기타치고 그런 것도 하지 말라 했어요. 소향인지 뭐 가수 불러서 You raise me up 노래 부르고 그러고 있어요. 요새 천주교는 부활 김 태원 불러서 공연하고 해요.

 

그런데 24절에 보면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거기에 댐 터지듯이 공법과 정의를 퍼뜨리란 말이거든요. 자, 그러면 아모스의 이 말씀이 뭐냐, 너희가 성회 지키고 번제하고 화목제 하고 이것은 어디에 해당된다? 안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공법과 정의에 해당이 된다? 안 된다?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라 말이죠. 번제 드리고 성회 드리고 집회 하고 정의 지키고 예배드리고 소제 드리고 번제 드리고 이것이 자동적으로 공법과 정의를 물같이 퍼뜨리는데 전혀 그것은 공동점이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작 원하시는 공법과 의(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을 제대로 알면 앞에 있는 성회가 왜 필요치 않다는 것, 왜 하나님이 이걸 안 받는 이유를 알아요. 원래 여기 본문에 나오는데 25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이렇게 돼 있죠. 광야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광야라는 곳으로 몰아세워버립니다. 몰아세우는데 그 몰아세우게 된 출발 지점이 어디냐 하면 바로 유월절의 어린양입니다.

 

유월절의 어린양! 유월절의 어린양이라는 것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이제부터 너희의 모든 장자는 내게 속했다.‘라는 겁니다. 이게 민수기 8장으로 말씀을 드릴게요.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일절 초태생 곧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게 속했다고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사람들을 가지고 특정적으로 뽑을 때 그냥 뽑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제사 가지고 뽑아요. 그럼 어린양의 제사 가지고 뽑는 걸 가지고 전에 출애굽기 이전에 아브라함 언약시대에는 ‘할례’라 합니다. 할례를 할 때 할례를 행사하는 칼이 모든 직업과 모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할례 행하는 칼은 동일한 칼 이예요. 할례를 칼로 깎든 뾰족한 돌로 깎든 나무칼로 깎든 관계없이 할례 행할 때 지금까지 인간들이 갖고 있던 모든 차이와 모든 계급과 수준은 제거가 돼 버립니다. 무효가 돼 버려요. 사람들끼리 단체에서는 계급이 있고 지위 고하가 있지만 이것이 할례라는 아브라함 언약이 실시해 버리면 모든 인간은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새로운 신분과 더불어서 동일하게 돼 버립니다.

 

그런데 이 동일하게 된다는 말은 참, 이 말이 어려운데 이 말이 어느 정도로 어려운지, 어떻게 설명을 할 줄을 모르겠는데, 쉽게 예를 들어서 농구하는 사람과 축구하는 사람이 동일하다는 말은 맞는 말 이예요. 왜냐, 둘 다 운동하기 때문에. 그런데 농구공과 축구공이 다르고 농구하는 방법과 축구하는 방법은 달라요. 다르지만 동일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제나 번제를 드리면서 나만이 따로 특출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하나님 앞에 할례 정신에 어긋납니다. 성회를 드리고 소제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번제를 바치더라도 이 모든 걸로 하여금 내가 현재 생각하는 기존의 나를 놓치지 않고자 하는 내가 우뚝 서야 남과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 내가 우선 성립돼야 저 사람하고 내가 누가 잘난 사람이냐 비교가 되거든요. 그런데 나를 우뚝 세우는 그것이 허물어져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내가 어떤 성회를 하던 번제를 하던 예배를 드리든 뭘 하든 간에 나는 더 이상 남과 비교할 것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게 공법이고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죽었다. 나는 죽은 자로서 하나님께 속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죽은 자로 하나님께 속해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라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소금장사하는 사람은 날씨가 반짝반짝 해야 되고 습기가 차면 안 되고 반짝반짝 빛나야 돼요. 그런데 우산장사하는 사람 같으면 축축해야 되고 비옷 장사하는 사람은 비가 와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과 상관없이 와 버릴 때 소금장사가 ‘내 소금장사 잘 돼야 돼.’라고 우겨버리면 그것은 바로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아무리 소제 드리고 소금장사 잘 되면 소금 가지고 십일조를 백날 해도 그건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소금이 잘 되든 우상이 잘 되든 나는 뭘 하든 그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속해서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할례정신이 돼 버립니다. 어떤 것도 나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께 속한 것이 될 때 하나님의 의만 거기에 드러나는 겁니다. 소금 장사나 우산 장사나 하나님의 의만 드러난다 이 말이죠.

 

내가 이거 해서 남보다 부자 돼서 남보다 더 우월함을 느끼겠다. 이런 생각 갖고 있으면 그건 바로 성회, 예배를 통해서 남을 등쳐먹겠다는 심보가 그대로 살아있는 것밖에 안 돼요. 우리가 어디서 뭘 하든지 상관없어요. 모든 것은 동등해요. 모든 인간은 주 안에서 동일해버립니다. 똑같습니다.

 

다만 자랑할 것은 우리 주님만 자랑할 뿐이죠. 어린양! 그것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는 각자 먹을 것을 자기가 챙기지 못한다는 점에서 남자 40만 대군이 동일하게 똑같아요. 전부 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얻어먹고 사는 그런 입장은 어느 누구도 상관없이 다 마찬가지예요. 모세도 만나 먹고 살았어요. 지는 물 많이 뜨고 니는 물 적게 뜨고 그런 것은 없어요. 동일하게 만나를 먹는 것도 숫자대로 동일하게 하는 겁니다. 동일하다 해서 오해해서 어른들 먹는 만나를 애들을 먹여서 애 배터지게 만드는 게 아니고, 애들은 애대로 어른들은 어른대로 하되 그건 다 다르지만 어쨌든 하나님 보시기는 전부 다 하나님께 속한 동일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동일함에서 끄집어 낼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정의요 공법이 되는 겁니다.

 

제가 본 부러진 화살, 판사가 재판을 개판으로 아주 시시하게 해버릴 때 그 분노에 대항하는 대학교수 이야기잖아요. 그 당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잖아요. 소위 가진 자들이 더 갖기 위해서 재판, 모든 것이 왜곡된 것은 ‘니는 피고고 나는 판사야.’ 하는 자기를 위해서 그 재판을 할 때 그 재판은 하나의 우상이 돼버리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거기 들어가 있으니까.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백성은 ‘자기를 위해서’를 허용하는 그런 백성은 천국에 못 갑니다. ‘주님을 위해서 저는 뭘 해야 됩니까?’ 혼자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 모두 적절하게 주님의 백성들은 동일하게 이 땅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다 고생하는 겁니다. 백수는 백수대로 고생하고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대로 고생하고 다 고생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똑같다는 거예요. 주 안에서 할례를 행할 때 나라는 것은 이미 잘라졌다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고추 잘리니까 나라는 자체가 이미 잘려지고 주의 것으로만 우리가 쓰여질 때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의 모든 인간은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상, 그것은 나를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하지 않는 세상, 또 상대방에게 이용당하지도 않는 세상, 오직 주님의 것으로만 주님께 영광 돌리는 그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가면서 주님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