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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암 5:18-20 / 여호와의 날 사모 / 122012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암 5:18-20 / 여호와의 날 사모 / 122012

정인순 2012. 2. 12. 15:19

여호와의 날 사모(암 5:18-20)

음성      동영상

 

이근호

 

(암 5:18, 개역)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암 5:19, 개역)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암 5:20, 개역)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울음꾼이란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자를 가리키는데 보통 여자들이었습니다. 즉 슬픔을 최대한으로 나타내기 위해 삯을 받고 울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문 울음꾼들을 동원해서라도 이스라엘을 울게 하라고 하십니다. 울음의 분위기로 몰아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마치 이스라엘에 ‘울음의 장판’이라도 까는 것처럼 여기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도달점과 목표점을 잘못 상정하고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여호와의 날’이란 깜깜한 날이 아니라 희망이 성취되는 날로 여겼습니다.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날이요, 여호와의 도움을 톡톡히 보는 날로 여겼습니다. 자, 이렇게 본다면,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면, 교회 다니는 사람과 안 다니는 사람의 차이란 딴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자기 희망을 거느냐 아니걸었느냐의 차이입니다.

이러니 실은 둘 다 찾아오는 것은 ‘빛의 세계’가 아니라 ‘깜깜한 심판의 순간’일 것입니다. 어째서 인간은 여호와께서 찾아오시는 그 날의 정경까지 잘못 이해하게 된 걸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현실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에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이 간주하고 끼어넣는 식으로 구성해온 것입니다.

쉽게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고 있는 형편에서 성급하게 ‘여호와의 날’을 좋게 본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방식은 주변의 환경을 좋은 쪽으로 가져가서 그 안에서 본인도 덩달아 좋은 사람이라고 구성하는 작업을 통해서 파악하는 방식입니다. 즉 좋은 환경이 좋은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주장을 늘어놓게 마련입니다.

과연 사람이란 환경만 좋으면 저절로 좋은 존재가 될까요? 아닙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이라는 것도 실은 본인이 조작해낸 환경이요 현실입니다. 자신의 야심과 야망으로 만들어내는 환경이고 그 환경의 끝을 ‘여호와의 날’과 좋게 연결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바닥 자체가 왜 울음꾼조차 동원되어서 울음바닥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게 됩니다.

누가복음 6:25에 보면,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는 무턱대로, 마음 놓고 웃어야 될 시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종말 속에서는 우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다는 겁니다.

즉 ‘우는 현실’과 ‘웃는 현실’을 놓고서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웃는 현실’을 선택하게 마련인데 이 선택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온 선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화있을전저”라고 단정을 하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 알려주는 현실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지를 말라는 겁니다.

현실과 사실관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빛이 아니라 깜깜한 날이 인류에게 닥쳐올 유일한 현실상입니다. 사람은 자기 위주로 현실관을 수시로 바꾸어가면서 짜기 때문에 당연히 울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못합니다. 어쩌다보니 우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 세상 자체가 우리에게 최종적인 웃음을 주지 못하는 세상인 것을 믿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모든 현실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협작해서 조작된 현실입니다. 참된 현실은, 과연 이 성경 말씀대로 마지막 때가 깜깜한 날인가를 확인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 마지막 때의 광경을 미리 접해보는 겁니다. 그날, 그 때의 소식을 미리 입수하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17-18에 보면, 막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나옵니다. “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낯선 현실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미루어 짐작해도 생생하게 경험하기가 곤란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감사와 궁극적인 저주가 같이 만나서 동반해서 한꺼번에 터져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이란 일시적으로 순간적인 기쁨을 얻기 위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것도 아니요 최종적인 것에 허물어져 되어야 할 웃음이요 성공이요 감사의 내용입니다. 막 지상을 떠나는 이 신앙인들은 세상의 유혹과 재물과 권력에 미련없습니다. 그런 것들로 인하여 놀아났음을 익히 아는 바입니다. 세상을 볼 때 내 중심으로 볼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중심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상기시켜 주는 겁니다.

세상 것으로 웃을 수는 없습니다. 성도는 땅을 보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을 보고 사는 자들입니다.(골 3:1-4) 이런 자들에 의해서 여호와의 날이란 곧 여호와의 본 본 떼를 보여즌 날입니다. 양보없는 저주와 자비로부터 끊어진 정황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현실이라고 우긴 것들은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맹렬한 저주밑으로 다 사라져야 될 운명들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을 때나 성립하는 결과입니다. 자기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간주해버리면 지속적으로 자신을 부인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아니하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끌어모아 자기를 기쁘게 하는 현실로 위장시킬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13-14에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린양 피가 묻힌 옷을 사는 것만이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지 않는 진짜 현실입니다. 이런 안목으로 보기에 이 세상이라는 현실은 지금도 울어야 될 멸망의 도성입니다. 바로 여기서 피로 인해서만 궁극적으로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늘 만들어내는 현실 속에 늘 십자가로 개입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이한례 

15강-암5장18-20(여호와의 날 사모)120212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 5장18절에서20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79 페이지입니다.

아모스5:18-20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 승리하는 날, 우리, 나 자신의 승리로 간주될 수 있는 그런 포부가 만족스럽게 완성되는 만족스럽게 성취가 되는 그런 날로 여깁니다. 교회 나오면서 희망을 품게 돼 있고 그 희망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마지막 때는 반드시 빛을 보리라’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장차 빛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들이 잘 되리라고 여겼던 그 마지막 날, 여호와의 날은 오히려 캄캄한 날이고 깜깜한 날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희망을 만들어 내는 인간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마지막 때를 빛의 세계로 바라보는 해석은 뭔가 인간의 여망과 야심이 거기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여호와의 날을 빛의 날로 간주하는 모양인데,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 날을 깜깜한 날로 볼 수 없겠느냐, 그것은 바로 뭔가 우리가 만들어 낸 마지막 최후의 날 우리가 잘 되리라고 그런 희망을 가지는 마지막 날을 그렇게 구상하는 것은 너희 야심과 너희 욕심이 거기에 개입해서 그렇다는 생각을 해봐라 그런 뜻이죠.

 

우리 자신의 야심과 욕심이 개입해 버리면 모든 것이 원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다른 엉뚱한 것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모스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화 있을진저. 저주가 있을지어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저주가 있을지어다.”이 말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데, 너희들 사모하는 그 자세나 태도가 그날을 빛의 날이라고 상정해 놓고 무조건 빛의 날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날은 사실은 빛의 날이 아니고 어두움이다 이 말이죠.

 

그날을 어두움이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규정을 하고 단정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을 믿으려면 현재 우리가 있는 이 시점부터 여호와의 날은 캄캄한 날이고 빛이 없는 날이고 무서운 저주의 날이고 심판의 날이라는 것을 지금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그 여호와의 날을 대비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로 이렇게 다가오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될 때 뭔가 내 야심과 욕심이 개입되지 않는 성경 해석이 된다. 그런 뜻 이예요. 그러니 사람들이 성경을 그냥 건성건성 대충 읽어버리고 그냥 자기 들은 풍물로 ’기독교가 어떠니, 복음이 어떠니, 십자가가 어떠니.‘ 이렇게 해버리면 이런 것들은 결국은 진정성이 없다 하죠. 뭐 장난삼아 취미 오락삼아 교회 놀러 다니는 그런 사람은 모르지만 성경을 딱 펼치게 되면 그것은 우리 사람들이 교회란 이름의 놀이마당에 주님은 전혀 거기에 개입을 안 합니다. ’그래 많이 놀아라. 죽기 전에 많이 노세요. 너희들이 어떻게 세상을 보던 간에 난 너희들의 생각에 가담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단호 하심 이예요.

 

서울서 강의할 때 이런 강의 했습니다. 제가 문제를 던졌어요. 의존교회 교인들 같이 공부하면서 ‘신앙 좋아서 뭐 할 건데요?’ 했어요. ‘신앙 좋아서 어디 써먹을 건데요? 뭐 때문에 신앙 좋은데요.’ 아니 쓸데없는 짓 하고 있어요. 신앙이 왜 좋은데? 아무짝도 없는 게 신앙 좋은 거잖아요. 아무 쓸모 짝도 없는 신앙 좋아서 뭐 할 건데? 거 왜 헛짓하고 있는데?‘ 제가 그 질문을 던진 것은 그 질문을 평소에 우리들이 하루에 수백 번도 하고 있다는 말 이예요.

 

좋은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 그 배후에 잘못된 생각은 뭐냐 하면 무엇이 사실이냐, 무엇이 현실이냐, 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과 사실은 그것은 자기가 제쳐두고 자기가 원하는 현실이고 싶어 하는 그런 충동이 너무너무 강렬해서 신앙 좋아지고 싶어 하는 거예요. 신앙 좋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현실 자체를 왜곡되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 신앙 좋아야 돼,’ 하는 것이 진짜 현실을 놔두고 따로 내가 주인공 되는 현실을 따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자, 요 대목이 뭐냐 하면 이렇게 쉽게 하면 지금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신앙이 좋고 관계없이 진짜 현실은 뭐냐 진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들이 지금 울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우는데 울음군을 가지고, 옛날에는 여자들을 가지고 돈을 줘서 아르바이트로 울어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장례식에 가서 우..하고 30분 남았다고 우..해서 돈 받고 나갔어요. 분위기 띄우기 위해서 많이 슬퍼한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울음군을 불렀어요. 그런 울음군을 강제로 동원시켜서 억지로 울라 이 말입니다.

 

그 점을 의존교회에서 한 것을 잠시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질문을 그렇게 던졌죠. ‘신앙 좋아서 뭐할 건데?’ 그것은 바로 가식적인 잘못된 현실관 때문에 그렇다. 그 예로 박 희태 국회의장 들었습니다. 박 희태 국회 의장이 자기의 어떤 직원이 속한 돈을 줬다고 하니까 고 승덕 의장이 돈을 줬다 하니까 자기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라고 하면서 국회 의장직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칠판에다 그림을 그렸죠. 자, 박 희태 국회 의장이라는 사람( 그 사람 검사 출신 이예요.)이 국회 의장직을 갖고 있을 때 나만 깨끗하면 국회 의장 된다는 식으로 한 게 아니고 원을 동그랗게 크게 그려요. 크게 그려서 박 희태 의장 자기중심으로 해서 자기 영향력이 있는 동그란 영역 안에 있어서 그 영역 안에서 돈 받아 챙기는 하자가 없을 경우에는 나는 박 희태 의장으로서 국회의장에서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사실, 현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방금 한 말이 어떤 점에서 어려우냐 하면 사람은 자기라는 것을 내 몸 하나만 자기가 아니고 내가 구축해 놓은 영역 전체가 사실 그대로고 현실 그대로라고 여길 때는 나 자신은  나는 현재 현실 속에 현실감 있고 현실 속에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자부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국회의장 되는 것은 내가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고 내 부하직원들이 쓸데없이 부정적으로 돈을 줘서 표를 매수하지 않는다는 그런 짓을 안 한다는 그런 범위 내에서 나는 국회의장답고 국회의장을 유지해야 마땅한 이게 바로 사실이고 이게 바로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나발을 불어버렸다는 거죠. 뿔테 안경이 나발을 불어버렸다 말이죠. 뿔테 안경이 나발을 불어서 돈 준 거 맞고 박 의장이 했습니다. 이러니까 박 희태 국회의장은 뭘 모르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돈을 직접 돈 가방 들고, 세상에 국회의장이 여자들처럼 돈 가방 들고 국회의원을 돌아다니며 ‘여기 돈 있어요. 표 주세요.’ 이렇게 했겠어요? 국회의장이. ‘나는 직접 돈 준 적이 없는데 나는 사실이다. 현실이다. 사실은 그 틈새에 물이 새는, 그게 무너지는 물이 새니까 내 국회의장의 자리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국회의장직을 내놔야 하는 거예요. 왜, 그동안 ’나는 깨끗하다.‘하는 그것만 현실이 아니었고 나하고 관련돼 있는 사람들도 역시 ’깨끗하다.‘가 모아 모아져서 그것이 바로 ’내 국회의장직은 합당하다.‘를 유지했던 현실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거기서 예를 들었죠. 초등학교에 학부모 회장하는 여자 분이 ‘내 애는 너무너무 똑똑하고 착해서 반장돼야 되고, 학부모 회장 돼야 돼, 했는데 그렇게 해서 학부모 회장을 했는데 자기애가 가만히 보니까 돈 뜯고 줘 패고 목걸이 묶어다가 비스켓 물게 하고 그런 애하면 엄마는 안 그랬거든요. 학부모 회장인 본인은 그런 짓 안했지만 자기애가 그런 짓 했을 때는 학부모 회장직을 내놔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 학부모 회장직을 계속 지가 유지할 때 그 사람의 현실과 사실은 뭐냐 하면 ’나만 깨끗하면 돼.‘가 아니라 나와 연관돼 있는 내 애가 내가 원하는 그러한 착한 애라고 그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라고 유지되는 조건하에서만 그 학부모 회장직을 한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냐 하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우리가 세상에 혼자 사는 것 같지만 우리가 듣고 배운 것을 전부 다 내 영역이라고 여겼던 구석에서 전부 다 강요한 거예요. 요청한 겁니다. 전부 다 요구한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대한민국은 나의 조국이다.’라고 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정부가 내 애가 수련회 갔을 때 화재 나서 내 애가 죽어버리면 나는 대한민국의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라 하더라도 내 애가 수련회에서 불타 버렸다면 자기는 미국에 이민 가겠다고 해서 이민 갔잖아요. 훈장 반납하고.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둘러싸고 있는 구조 속에 있으면서 그걸 나를 위한 현실과 사실이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이거 이해 안 되면 오늘 본문 이해 안 됩니다. ‘아이, 나만 깨끗하면 되지.’ 니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데요. 우리 자신이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는 나라는 것이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위신 , 체면, 명예, 이런 것들과 얽히고 섞인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 있으면 여기서 못 살고 이민가든지 하죠.

 

자기 구조를 스스로 포기하고 내가 이런 합당하지 않은 사실을 버리고 호주나 미국 가서 새로운 사실과 현실을 만들면서 그 안에서 ‘내 나라와 내가 살만한 조건이야,‘라고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거예요. 제가 왜 이런 예를 드느냐 하면 우리라는 것이 왜 여호와의 날은 아름다운 날이고 빛이 넘치고 구원하는 날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바로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렇고 주변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아이고, 설마 나 혼자 무너지겠나, 같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지, 하나님도 같이 무너지겠나.‘ 하는데 그게 바로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도 같이 무너집니다. 내가 철떡 같이 믿었고 ’저 사람 만큼은 배신하지 않을 거야.‘했는데 같이 다 무너지게 돼 있어요.

 

쉽게 말합니다. 모든 세상은 다 캄캄합니다. 모두 다 함께 무너져요. 제가 안양에 공부하러 갔는데 지하철을 탔죠. 안양 인덕원역에서 4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해서 갔는데 지하철에 포스터가 하나 있어요. 포스터가 광고인데 광고가 뭐냐 하면 개 한 마리하고 소가 그림에 붙어 있어요. 개 사진하고 소 사진하고 나란히 붙어있다. 저게 무슨 업체를 광고하는 업체냐, 가만히 보니까 밑에 보니 알았어요. 개나 소나 다 대출됩니다. 돈 걱정하지 말고 돈 빌리세요. 개나 소나 다 대출해줍니다. 그런 뜻 이예요.

 

우리가 주변에서 그걸 우리는 현실이라고 보는 거예요. 사실인 겁니다. 통하거든요. 그거 보고 개나 소나 누구나, ‘그러면 나도 되는구나.’ 돈 빌리러 오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현실 이예요. 돈 없는 교회가 현실이 아니고 돈 빌려주는 대출 업체가 그게 현실이고 사실이고 그 사실과 현실을 우리가 믿으면서 그것을 신뢰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온 겁니다. 그래서 희망을 갖고 빛을 발견하고.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뭡니까? 개나 소나 천당 못 간다. 전부 다 캄캄하다. 우리는 우리 자리를 사표내야 돼요. 박 희태 국회의장 사표 내듯이 우리는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이라고 우겼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강요하면서 서로들 그렇게 협조하면서 살아오는 구조 안에 놓여있는 겁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보지도 않아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듣지도 않아요. 성경을 현실로 안 보고 성경을 사실로 안 봅니다. 이게 근본 문제입니다.

 

다시 설교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때 여호와의 날에 빛이라 하는 것은 분명히 이것은 주의 말씀에 위반되는 뭔가 하나의 요소가 삽입돼서 그런데 뭐냐 ‘나는 요렇게 현실로 보고 나는 제대로 사태를 파악했다.‘라고 우기는 내가 지금 와보니까 여호와의 날은 빛의 날이 되는 겁니다.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데 내가 현실이라고 우겼던, 내가 실제라고 믿는 그것이 실제가 아니고 현실이 아닌데, 제가 아까 했잖아요. 모든 세상은 모두가 울음판이라고.

 

그런데 이스라엘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스라엘은 울어버린다고요. 그 시간에 다른 민족들은 웃고 있을 때 사우디아라비아도 웃고 몽골도 웃고 터키도 웃고 한국도 웃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울고 있다 말이죠. 그것도 울음군까지 동원해서, 억지로라도 울라 말이죠. 우는 것이 진짜 이 마지막 때에 ‘제대로 사는 모습이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본문 말씀의 완성이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웃는 자여, 너희들은 화 있을 진저, 차라리 울어라.” 이 시대는 울어야 될 시대지, 웃는 시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 주의를 요해요. 하여튼 성경 말씀은 주의를 요할 게 한두 가지가 튀어나오는 게 아닙니다.

 

장미의 이름이라고 유명한 소설이 있어요. 그 소설에 보면 수도사들이 누가복음의 그 말씀, ‘웃지 말고 울어라.’라는 그 말씀을 가지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수도사니까. 항상 뭔가 시커먼 복장을 하고 항상 얼굴도 침울하게 하고 이게 도 닦고 이게 진짜 성화된 모습이라고 수도사 자기들끼리는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 그들은 그게 현실이고 사실로 여긴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일률적으로 되지 않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실은 그렇게 우는 척하지만 운다고 얼마나 속으로 스트레스 받았겠습니까? 다른 한쪽으로 또 웃기는 책을 보고 웃는 거예요. 그러다 웃는 것 들키면 수도사에서 쫓겨나니까, 취직이 안 되니까 밥 먹을 자리가 없어요. 옛날 수도사들이 수도 하러 온다는 것은 사실은 노림이 있어요. 뭐 편하게 살면서 대충 가스펠 송 몇 개 부르고 밥 먹고 살려고 오는 겁니다. 요새 수녀, 수도원 다 마찬가지예요. 밥 먹고 살려고 시집 못 가고 해서 온 겁니다.ㅎ 옛날 수도사들의 전통의 자세가 그러니까.

 

그런데 사람이 찡그리고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 찡그리고 사는 건 하나의 밥 먹고 살기 위한 직업상 수단입니다. 내 찡그리고 사실은 헤헤 거리면서 속으로 재밌는 거 선데이 서울 같은 거 보면서 신나게 즐기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거기다가 독약을 발라놓은 모양이라. 그래서 재밌는 책 보다가 죽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니까 그래서 수사하게 된 것이 장미의 이름이라. 그 수도사들의 허위와 위선을 까발리는 소설입니다. 그게 영화로 돼서 숀 코네리 나오고 책도 이태리 작가로 유명한 작가가 썼는데.

 

성경 말씀을 또 그런 식으로 ‘울어라’ 해서 만날 찡그리고 개콘도 안 보고 그렇게...ㅎ 억지로 우는 것도 그것도 아니에요. 또 ‘감사하다.’ 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해서 애들 초등학교 애들 노는 것처럼 감사해도 안 되고, 이 문제 해결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렇게 하면 돼요.

 

그 마지막 때에 우리가 믿음이 오면 되는 거예요. 이게 오늘 설교 결론인데요. 마지막 때에 진짜 캄캄한 날인지 빛의 날인지, 마지막 심판 때에 외쳤던 성도들의 고백을 미리 엿보면 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마지막 때 진짜 우는지, 진짜 그들이 우는지 보자 이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8절에 보면 드디어 구원받은 사람이 마지막 때를 통과했을 때 어떤 고백들을, 어떤 경험담을 내놓으면서 통과하는지 봅시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그렇게 돼 있죠?

 

그러니까 아하, 주께서 깜깜한 날이고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이 이게 농담이 아니고 장난이 아니라 말이죠. 지금 우리가 종말을 보고 있습니다. 종말 때에 진짜 지상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면서 그때 그들이 내뱉었던 그 일들의 이야기 있잖아요. 그걸 우리가 미리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미리 앞당겨서 보고 있는 겁니다. 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통곡과 진노와 심판이 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그들은 구원받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뭐라 하느냐 하면  ’감사합니다.‘ 돼 있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 하려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 어떤 때 감사 하냐, 복권 당첨될 때 어떤 때 감사합니까? 이 성도들이 천국 가면서 궁극적으로 진짜로 감사의 절정, 진짜로 감사할 걸 가지고 감사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정작 우리도 울어야 되고, 정작 심판 받아야 되고, 저주받아야 되는데 우리가 웬 횡재인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얗게 돼서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식으로 다들 울고 있는데 혼자 천국 가니까 이건 우리는 감사밖에 나올 게 없어서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다는 거예요. 고게 사실이고 고게 현실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성경 말씀이 진짜 사실이고 현실 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성경 말씀이 진짜 현실이고 사실인 것을 우리는 접근 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박 희태 국회의장처럼 나는 나 위주의 내가 좋아하는 위주의 따로 사실과 현실에 갇혀있다 보니까 이걸 깰 수가 없어요. 사실 사람 나름대로의 ‘나는 나름 이런 소망이 있고 이런 포부로 이 세상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자기 계획이 있잖아요. 그걸 지가 총 가지고 찌르면 안 되죠. 그건 지가 자살 행위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매일 살면서 현실이고 사실이라 하지만 그건 다 누구위주냐 하면 내 위주, 내 좋아라고 내가 구성한 현실과 사실을 그냥 억지로 ‘현실이다, 사실이다. 주여 감사하다.’ 하지만 주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하면 거기서 우리를 끄집어내서 아모스 5장에다 집어넣고 요한계시록 11장에 집어넣는 그걸 1초~ 2초 내에 접선하고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기도했는데 병이 나았다. ‘아!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아차, 아차차,’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도 감사할 일이 아니란 사실, 죽는 게 더 감사할 일인데, ‘아, 차차차, 이게 또 내가 원하는 현실과 사실에 내가 스스로 내가 속아 넘어갔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죠.

 

그 날이 캄캄한 날이고 그 날이 빛이 없는 날인데 오직 빛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진짜 감사와 진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심어주고 사랑을 심어줄 때 내 안에서 만든 내가 만든 빛이 아니라 주께서 집어넣은 빛이 있다면 우리는 세상이 캄캄한 날이라도 감사하고 좋다는 거예요. 그게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종말의 조각이라고 합니다.

 

종말의 조각, 현재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뭔가 어깨 위에 우두둑 떨어지는, 우리가 페인트 칠 해놓은 것이 오래되면 페인트 한 조각씩 떨어지잖아요. 만약에 파란 색으로 천장을 칠하면 말라서 파란 색이 떨어져서 어깨 위에 파란 색이 묻듯이 우리 어깨에 떨어지는 것은 종말의 조각들이 떨어지는데 그 종말의 조각들이 말씀이란 형태로 우리에게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구축한, 내가 만일 국회의장이라면 내가 국회의장의 체면과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내 부하한테는 일체 남에게 돈 주고 표 사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국회의장을 계속 연명해야 되고 유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게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내가 아는 국회의장의 현실이고 사실이라고 우겼는데 어느 날 뭔가 부하직원이 돈 줬다 할 때 ’아! 내가 착각했구나, 지금 내 위주로 사실과 현실을 내 위주로 매일같이 꾸미고 사는 그런 존재에 지나지 않구나, 그렇다면 내가 이런 국회의장 입장에서 교회, (그 사람이 교회 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를 출석했다면 교회서 ‘아이고, 장로님 오셨습니까?’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국회의원은커녕 나중에 잘못 돼서 조사해서 박OO가 지시했다.‘ 이렇게 나오면, 아직은 그런지 모릅니다만, 경찰 출동하고 쇠고랑 차버리면 수갑 들고 와서 마지막 교도소 가기 전에 만약에 ’교회에 먼저 가겠습니다.’ 하면 교회서 ‘오지 마세요. 당신을 아는바 없습니다.’ 이렇게 민다 말이죠.

 

그러면 그 그동안 교회에서 한 것은 하여튼 그건 사실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고 조건부였습니다. 내가 나한테 현실적으로 내가 나한테 속여 온 거예요. 성경을 안 보고, 내 욕망한테 내가 속아온 겁니다.

 

아모스는 속이는 법이 없거든요. 아모스 선지자는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때는 캄캄한 날이고 시커먼 날이고 울어야 될 날이다.’ 우리가 늘 울어도 마땅한 그 가운데서 요한계시록 끝에 보면 구원받은 사람은 땅을 보고 웃는 것이 아니고 개콘 보고 웃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의 성경말씀 보고 ‘저게 사실입니다.’를 믿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그렇게 위를 보고 살아왔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언제 죽더라고 오늘밤에 낙원에서 간 것을 기뻐하는 진짜 기쁨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잘못된 현실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어느 순간에도 주께서 지켜보신다는 것, 그것이 현실인 것을 우리가 감사하고 즐기는 마음에서 기뻐하면서 수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