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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암 5:11-13 / 잠잠한 선지자 / 120129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암 5:11-13 / 잠잠한 선지자 / 120129

정인순 2012. 1. 29. 15:50

 

 

잠잠한 선지자(암 5:11-13)

음성      동영상

 

이근호

 

(암 5:11, 개역)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암 5:12, 개역)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암 5:13, 개역)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것이 ‘나쁜 짓’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게 했던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도 철저하게 선지자의 말씀을 분석해서 두 번 다시 자기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멸망되지 않기 위해 만전에 만전에 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 아비는 마귀”고 하셨습니다.(요 8:44) 그들은 육체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육체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그들은 육체로 이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어렵고 가난한 자를 돕고 부한 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탐내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은 인간의 양식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오해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사람의 세계를 구분 짓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구분 짓는 기준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대로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계급 투쟁으로 사회를 보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상을 구분짓습니다,

즉 언약이 담겨 있는 사람과 언약이 담겨있지 못한 사람과의 구분입니다. 언약이 담겨 있지 못한 사람은 구차없이 자신의 힘으로 자립하는 식으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반면에 언약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삽니다. 제발 하나님의 사랑을 ‘힘’으로 풀이해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의 사랑도 일견 순수성을 추구하면 힘이나 조건 같은 것들을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대하면서 마치 약혼자가 신랑을 만난 경우의 예를 들고 나옵니다. 여성이 남자를 알아서 결혼을 약속 받으면 얼마나 날아갈 듯 행복하겠습니까. 친구들에게 입이 근질해서 자랑하고 싶어서 가만 있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의 그 어떠한 조건이나 허물도 개의치 않고 평생 이뻐해주고 사랑해주고 봉사해주는 든든한 남자가 생겼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행 끝, 행복 시작’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사랑’이라고 말하고 그 형식은 약혼, 혹은 결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바로 이 사랑으로 맺어진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초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아무런 볼 품도 없는 그들은 사랑해주셨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여타의 민족과는 다른 그야말로 ‘다른 존재’로 다루시고 취급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특징은 ‘너만 선택’입니다. 그 많은 민족 가운데 너만 알았다는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으로 채워진 것은 언약입니다. 특히 아모스 선지자의 시대는 이미 ‘다윗 언약’ 시대에 접어든 것입니다. 다윗 언약이란 다윗왕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을 말합니다.

역대상 12장에 보면, 예전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으로 하여금 막강한 군사력으로 무장케 합니다. 홍애를 건널 때에는 지팡이로서 홍해를 가르던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적으로 보이는 군사력에 힘을 쏟게 하는 것일까요? 또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는 언약궤를 앞장 세우면서 나팔부는 방식으로 전쟁에 승리케 하면서 왜 다윗 때에는 용사들을 키웁니까?

그것은 바로 이방민족은 그 어떤 식으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언약에 예속을 받고 지배를 받아야 될 대상인 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후대 왕들은 이러한 군사력 소유에 대해서 오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과는 ‘다른 민족’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월한 민족’이고 싶어했습니다.

‘다른 민족’과 ‘우월한 민족’과의 차이점은, 질적으로 다르면 ‘다른 민족’이요 질적으로 동일하면서 훨씬 큰 힘을 갖게 되면 ‘우월한 민족’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야 되고 멸망해야 될 이유는, 그들이 힘이 없고 적어서가 아니라 ‘다른 민족’이기를 포기하고 ‘우월한 민족’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향성 때문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애굽 때와 마찬가지고 계급격차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선지자는 잠잠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선지자를 닮아야 하는 겁니다. 선지자는 결코 다른 사람과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 독특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마지막 언약을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에 준해서 여호와의 날이 들이닥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 여호와의 날은 세상이 밝아지는 날이 아니라 캄캄한 날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처리하는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나온 사견이라면 인간들이 설쳐야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란 사람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불의하고 악함에 대해서 잠잠하는 것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기준이 작용함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손 쓸 수 없는 기준이 가동되는 날이 마지막 날의 모습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은 마지막 때로 달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 성도는 세상 일로 하여금 사회법에 호소해서 해결 지으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고린도전서 6:1-7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는 이기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주신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이한례

13강-암5장11-13(잠잠한 선지자)1201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 5장11절에서13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79 페이지입니다.

아모스5:11-13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성경 말씀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가 이렇게 읽어보면 상식적으로 들리는 말씀이 이게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굉장히 많습니다. 여기 보면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고 부당하게 돈을 갈취하고 권력이 있다고 해서 뇌물을 받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싫어해서 너희들에게 벌을 내린다. 이것은 중국 고사나 서양의 윤리 도덕이나 전 세상에 다 있는 거예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러한 아모스나 예레미야 이사야에 나오는 이 말씀대로 그대로 실천에 옮기면서 살고자 했던 바리새인들 저희 애비가 마귀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오늘 아침에도 나오지만 이렇게 고리대금업자로 등 처먹고 살던 삭개오가 아브라함 자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 말씀을 보면서 ‘아! 이것은 내 양심에 부합되기 때문에 요거 잘만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다.’ 이렇게 안일하게 나서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18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이래 돼 있어요.  여호와의 날이 올 때 ‘하나님께서 떴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등장했다.‘ 이렇게 되면 여기 우리가 갖는 상식 말고 다른 기준이 동원되는데 그것을 어려운 말로, 사실 어려운 말도 아닌데 성경에 나오는데 어려운 말로 ’다윗 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모스 당시에.

 

십자가 져서 새 언약 오기 전이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다윗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나님, 자기 비밀을 보여준 약속, 언약을 두고 하는 겁니다. 원래 약혼자가 약혼할 때 약혼반지를 끼죠. 남들,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나 약혼했다.’ 이게 요새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요새 색시 총각 얻기 힘든데 약혼하면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그 약혼 했다는 그 기쁨은 아무리 남한테 자랑해도 진짜 약혼한 그 기쁨은 그 당사자만 아는 겁니다. 성경은 그걸 바로 동원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을 이야기하면서 그 언약을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 기쁨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만나게 된 기쁨이라는 거예요. 여성분들은 옛날 자기가 처음 결혼하기 직전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참, 기분 정말 날아갈 것 같았죠. 불행 끝, 행복 시작, 혼수 감 준비 하느라 돌아다녀도 다리 아픈 줄 모르고 ‘그릇은 뭐로 하고 숟가락은 뭐로 하지?’ 계약한 전셋집에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도배는 뭐로 하지?’ 계획 빵빵하게 계획 세우고, 여성은 약혼부터 결혼할 때까지 부푼 가슴을 안고 자기가 아는 기쁨을 주체를 하지 못해서, 친구를 만나면 ‘안 가려했는데 남자가 프로포즈를 해서 아이고 내가 마지못해 붙잡혔지.’하면서 좋아서 입이 째져 가지고 이랬어요.

 

옛날 결혼식에서 신부는 웃으면 딸 낳는다고 해서 웃지 마라 하는데 요새는 입장부터 당당해, 인도하는 아버지보고 ‘아버지, 빨리 손 놓으세요.’ 해요. 좋아서 싱글벙글, 싱글벙글 웃고 축가할 때도 좋아서 웃고, 요새 여성들은 아마 자기가 좋다는 걸 감출 수가 없어요. 되게 좋은 모양 이예요.

 

여러분은 억지로 끌려서 결혼했습니까? 안 좋아 하는가, 하나님의 약혼식이라는 것은 자기만 아는데 그 약혼식의 기쁨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표현하는데 하나님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사랑’ 한다는 단어를. 사랑 앞에 무슨 조건이 필요하고 사랑 앞에 무슨 수식어가 필요 합니까? 사랑하면 끝나는데요. ‘나 너를 위해서 모든 걸 바치겠다.’ 끝난 문제 아닙니까? 너한테 어떠한 조건을 보지 않겠다. 눈은 몇 번 고치고 양악수술 몇 번 하고 묻지 않겠다. 어떠한 조건도 보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겠다는데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의 인간으로선 최고의 축복이고 혜택이죠.

 

그게 바로 제가 길게 설명한 것이 바로 ‘다윗언약’이라는 거예요. 다윗언약 하니까 골치 아파 하는데 그 사랑을 다윗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다윗언약, 다른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누구만 쳐다보느냐 하면 이제는 행복한 결혼생활에 들어가요. 행복한 결혼생활에 들어가려면 조건이 뭐냐 하면 옛날에 알았던 자기 소망대로 자기가 따로 알았던 남정네, 바알이라 해요. 바알 신, 자기가 옛날에 사귀었던 그걸 정리해야 됩니다. 결혼하고 난 뒤에 그쪽에서 유인하더라도 거기로 빠져 들어가면 안 돼요.

 

사랑은 무조건 들어오고 저쪽은 조건을 걸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조건으로 구원하겠다. 거기에 말려들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희생을 제물로 해서 ‘너를 이렇게 사랑했노라.’하는 그 이야기만 계속 들어다오.‘ 하는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그래서 다윗이후에 나오는 모든 성경책은 어디의 범주 안에서 외치는 이야기냐 하면 다윗언약에 쏟아져 나오는 사랑을 근거로 해서 외치는 말씀들이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도 ‘바르게 살자.’ 이게 아니고 ‘사랑에 왜 위배했느냐.’ 그걸 따지는 성경이 오늘 본문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 들어가기 전에 서론이 이렇게 길어요. 특히 아가서 같은 경우에 사랑의 노래, 아가서, 노래 가사거든요. 그 사랑의 노래에 보면 ‘내가 니한테 준 사랑은 니가 죽는 것을 능가한다.’

 

자, 여기서 이렇게 사랑받았으면 우리 같은 인간 같으면 그 여호와의 사랑을 감사하게 될 텐데 우리가 보는 아모스시대에 오면 멸망직전, 이스라엘 나라도 유다나라도 멸망직전입니다. ‘어째서 사람이 그렇게 변하느냐 이 말이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고 화내기 전에 우리 자신도 지금 그렇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의 포진이 사랑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우월한 뛰어난 영웅이 되는 것을 목표로 주위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겁니다. 힘센 놈이 승자고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을 교육하는 모습,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든 것은 이 사회에서 모든 것은 ‘살아남아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일단 살고 봐라. 살고 보면 사람들이 너를 승리자로 칭할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가 합체돼 있어요. 당연히 어떻게 이기느냐, 우월한 존재, 내가 남보다 월등하게 나은 존재로 변모되기를 바라고 있는 분위기가 세상분위기입니다.

 

그런데 다윗 언약은 뭐냐 하면 ‘너는 저 여자와 달라.’ 다른 존재를 말하는 겁니다. ‘다른 존재가 될 거냐, 우월한 존재가 될 것이냐, 여러분 어느 게 좋습니까?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게 좋아요?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게 좋습니까? 아! 우리의 본성은 사랑을 받더라도 이왕 받은 사랑, 이걸 이용해라. 처음에 갖고 있던 내면에 갖고 있던 음흉한 진짜 내면에 깔려있는 본심이 서서히 고개를 들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또 받아났겠다. ’이제는 남한테 밑지지 않게 남한테 뛰어난 존재가 되어볼래.‘라고 나서게 마련입니다.

 

신학생이 신학교 갈 때는 울면서 ‘주여, 사업 망하게 한 것이 다 뜻이 있었군요. 이렇게 신학교 목사 되게 하신 사랑에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오직 말씀만 전하는 목사 되고 주의 뜻에 합당한 목사 되겠습니다.’라고 시작해 놓고 나중에 졸업할 때쯤 되면 교회가 우월한 교회, 남보다 더 큰 교회, 남보다 교인 수가 많은 교회, 총회장 되는 교회, 이런 식의 바알적인 사고로 변모되고 말죠.

 

이렇게 성경이 어렵고 다윗언약이 어려운 이유는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을 집어넣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는데 어렵습니다. 그 특별한 방식이 뭐냐, 역대 상 12장에 죽 보면 다윗이 군대를 키워요. 그리고 용사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 때 역대 상에서 다윗이 용사들을 장려하고 군대들을 양성하는 이유를 몰랐어요. ‘이상하다. 옛날처럼 물을 가르시고 옛날처럼 지팡이 가지고 하시면 다 이기고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다윗 시대에 와서 막대한 군대를 조직해서 그리고 거기에 30인의 두목들을 세우고 조직적인 군대를 만들어서 주변에 있는 모압, 암몬, 에돔, 모든 나라를,  블레셋을 치고 정복하고 ’꼼짝 마.‘하는 식으로 그들을 전부 다 접수하게 하신 하나님의 이 취지를 저는 이해가 잘 안됐었어요. ’이상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 치게 한 이유가 단순히 힘의 우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제야 알았죠.


 

언약이 없는 쪽은 바로 힘에 의해서 굴복당하는 것이 아니고 다윗언약에 의해서 세상은 결국 지배당해야 마땅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에게만 특별한 강한 군사를 줘서 모든 것을 복속시켰습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나중에 다윗 이후 솔로몬 이후에 왕들이 나왔을 때에 그 왕들이 분명히 다윗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군사력이 있었어요. 군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적은 이방나라로부터 공격을 받고 패배한다는 사실입니다. 참 이상하죠.

 

만약에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군사력을 키웠다. 해서 은혜 받은 건 잘라 내버리고 군사력이 강했다. 이것만 딱 쥐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우리도 군사력 세다. 군사력 갖고 있는 그것으로 우리는 이기면 된다.’이렇게 한다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이죠.

 

왕들이 군사력을 갖고 있어도 그보다 작은 군사력을 갖고 있는 이방나라한테 된통 당하고 보니까 성경에서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붙여주시니, 아하! 이스라엘에 다윗언약을 후대 왕들이 다윗 왕을 오해하게끔 유도했구나.’ ‘우리도 다윗처럼 군사력 많으면 이겼을 텐데.’ 이런 사로방식을 갖고 있는 자체가 바로 이미 약혼이고 사랑이고 다 날아갔다. 이제는 남보다 더 우월하겠다는 자기의 어두운 시커먼 흑심만 드러낸 것 뿐 이예요. 사랑은 없고.

 

이러한 우월적인 분위기가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에서는 내부적으로 계급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이런 차이가 있다는 말은 이미 그 내부가 사랑의 조직체, 사랑의 관계, 다윗 언약은 이미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 볼 수가 없이 다 사라져버린 거예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서 아무것도 없는 채로 주님의 사랑으로 그냥 와놓고 그 사랑이 계속 무르익어 숙성돼야 될 그 나라의 내부 조직이 이제는 사랑이고 뭐고 힘과 힘의 대결로 전부 다 처리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401번 버스타고 공항동, 산에서 내려와서 공항 앞으로 죽 가서 골목으로 가거든요. 버스타고 가면서 심심하니까 봅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하면 이 거대한 마트 생기고 가게 몇 개나 문 닫는가 보면 벌써 몇 개나 문 닫았어요. 이 동네에 참 마트, 벨 마트 있었거든요. 굉장히 큽니다. 저기 레몬마트가 생겨서 이 둘을 합친 커다란 마트가 생겼어요. 엄청나게 커요. 이 지묘동에 동네 주민들 얼마 안 됩니다. 엄마한테 마트가 새로 생겼다는 말은 제과점 하나 벌써 문 닫고 문 닫을 가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걱정이 늘어져요. 화요일마다 시장 생겼는데 중지됐어요. 마트 큰 게 생기니까 안 됩니다. 이게 세상이고 서울시 관공서에서 여권 사진 공짜로 찍어준다 하니까 얼마 전에 여권갱신 했는데 그 앞에 사진관들 여권사진 때문에 밥 먹고 사는데 지금 서울에 가서 데모하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힘이 없으면 사람도 아닙니다. 이게 이방나라예요. 약혼, 하나님과 약혼? 여호와가 우리 신랑? 그건 성경 안에만 담겨있는 이야기죠. ‘부러진 화살’ 영화 본다고 예고했는데 영화 봤어요. ‘부러진 화살’ 보니까 거기에 그 수학과 교수가 하는 말이, 기자가 ‘이번 재판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으니까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소위 자기끼리, 전문가 집단의 이기주의가 각각, 각각, 하나의 고원처럼,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이라 했거든요. 고원이라 하는 것은 산 위의 평평한 지역, 높은 곳을 말합니다. 각자, 각자, 사진관은 사진관, 냉면집은 냉면집, 각각, 각각 볼록, 볼록 튀어나와서 자기들끼리의 자체의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외부에서 절대로 자기 밥그릇을 못 뺏어가도록 공고히 하는 연대성을 갖는 거예요. 채소협회, 고미술협회, 전부 다 협회, 협회, 협회장, 협회에 가담 하면 회비내야 되고 협회 내에서도 정치적인 분위기가 있는 겁니다. 국회에 로비하고 세상 돌아가는 게 다 그런 거예요. 혼자서는 못 살고 소속돼야 되고 소속되려면 고개 숙여야 되고 고개 숙인 집단에서 움직이는 대로 같이 해야 돼요. 지가 자장면 값 내리려 해도 못 내려요. 중국집에서 중화요리 협회에서 자장면 값 올려버리면 다 올려야 돼요.

 

여기 미장원 있지만 화요일 날 노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지 맘대로 못 놀아요. 화요일 날 안 놀면 다른 데서 욕하고, 파마 값도 함부로 못 올리고 이렇습니다. 이 사회라는 것은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은 사치고, 그리고 주님과의 결혼이라는 이것도 하나의 마약처럼, 마르크스는 종교라 하는 것은 너무나 하기 힘드니까 대중들, 민중들 달래기 위해서 그냥 마약 하나, 히로뽕처럼 마약 비슷하게 마약 주사 놓는 것처럼 밖에 안 되지, 그게 무슨 이 사회,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공평하게 잘 사는 인류애를 공헌하는 그런 게 되느냐,‘ 아주 그렇게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봅시다. 이스라엘의 아모스 같은 경우에 여기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고 뇌물을 받고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고” 이런 것들을 주님께서 비난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돼야 된다는 뜻이 여기 보면 13절에 나옵니다. “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자, 선지자를 한번 봅시다. 방금 제가 여러 가지 문제를 내놨는데 해결책이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럼 목사님, 해결책이 뭡니까?’ 해결책을 묻는 것이 반칙 이예요. 왜냐 하면 반드시 이렇게 될 세상이 와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내가 사기를 당하고 가진 자에게 억울하게 당했다 해서 그것을 만약에 내가 ‘하나님, 이러면 안 됩니다.’라고 호소하고 들고 나온다면 이것은 뭐를 거부하느냐 하면 지금 일이 순서대로 잘 되고 있는 것을 지가 도중에 지가 주인공인양, 지가 세상에 지만 밥 먹고 살아야 되는 양 우기면서 툭 치고 나온 것밖에 안 돼요.

 

세상은 하나님께서 계획 바대로 잘 되어 가는데 지가 슈퍼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마트가 들어와서 문 닫게 되었다. 손님 다 뺏겼다. 그러니까 따지면서 ‘하나님, 뭐하십니까? 이렇게 나 못 살게 만들고.’ 이렇게 따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윗언약부터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게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셈이 돼요.

 

선지자한테 배우세요. 선지자의 특징은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이 세상에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선지자는 누구하고 비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특출한 존재예요.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선지자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그 사람이 데모를 한다는 것은 자기하고 남들하고 같은 질의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있거든요. 질이 달라요. 성도들은 질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 사랑하니까 자기는 안변하고 ’그래요. 하나님이여, 저는 불쌍합니다. 저는 못 살아요. 저는 너무 살기 힘든데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자기 자신의 뜻은 문제 있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그저 하나님이라는 존재이유 때문에 무조건 나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기존의 자기의 성질을 유지하는 것밖에 안 돼요.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 좋아라고 사랑이 아니고 주님께서 예수님께 행하신 것을 안겨줄 때 그게 사랑입니다.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이 삭개오가 주위 사람들한테 죄인이란 소리를 들어요. ‘삭개오는 죄인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죄인 속에 함께 있느냐.’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란 소리를 듣는 삭개오를 가지고 ‘니가 아브라함 자손이다. 니가 의인이 맞다.’ 이거죠. 고 성질, 고게 고럴 때 그게 사랑입니다. ‘나 이뻐? 내 사랑해.’ 이건 사랑이 아니에요. 이건 일반적인 결혼 관계고, ‘니는 사랑받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돼. 왜 내가 니같은 인간을 사랑해야 돼. 그런데 사랑하거든.’ 요런 경우에만 진정한 사랑이라 말이죠.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할 때 ‘주님께서 내 돈 뺏어갔습니다. 뭐 뺏어갔습니다. 뭐 뺏어갔습니다.’ 하면 주님 뭐라 하시는지 압니까? ‘그래 그 사람들이 뺏어 가는데 내가 준 사랑을 그들이 뺏어가더냐?’ ‘그건 아닌데요.’ ‘그러면 됐지, 뭘 더 원해? 니가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을 비난하는 자체가 니도 은연중에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이방신을 닮아가는 모습이 아니냐  이 말이죠. 니 자체도 따지는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서 정리하시면 됩니다. 다윗언약이 자기의 본질을 다 드러내면 반드시 거기에 악마, 마귀가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대전서 그런 강의 했는데, 악마는 본인이 악마인 줄 압니다. 그런 점에서 악마는 모든 인간보다 뛰어나요. 왜, 인간은 지가 악마의 종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는 본인이 악마인 줄 알아요. 마태복음 8장 29절에 청년이 무덤에 있을 때 귀신들린 청년이 예수님보고 뭐라 한지 알아요? ‘주여, 때가 안 됐는데 우리를 멸할 때가 안 됐는데 일찍 오시면 어이 됩니까?’ 이랬다고요. 아직 멸할 때가 안 됐는데, 귀신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악마는 예수님을 알아봐요.

 

예수님 시험 받을 때 마귀 나타났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예수님을 못 알아봐요. 악마는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믿음인지를 본인이 알아요. 자기는 영원히 신으로부터 미움 받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몰라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로 ‘니는 영원히 미움 받아도 마땅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사랑! ‘아! 마귀에게 속해서 미움 받는구나.’ 그 사랑! ‘그런 너를 내가 니를 살리기 위해서 피를 흘렸다.‘라고 아주 극단적으로 궁극적인 한계에 도달해서 다시 나오면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밥 못 먹고 사기 당하고 복직 해 달라 했는데 복직도 안 해주고 성균관 입시문제 틀렸다고 지적하니까 ‘니는 우리학교에 적당하지 않은 교수다.’라고 잘려서 그래서 잘리니까 재판하다가 석궁가지고 하다가 사건이 벌어졌거든요. 이런 것들을 내가 그 영화를 보면서 내가 만약 판사라면 그 사람 승소 안 시킵니다. 제가 판사라면 학교의 재단 일은 학교 재단법에 의해서 결정하기 때문에 당신 같은 사람, 학교에서 싫다는데 왜 들어가느냐 말이죠. 내가 보니 당신은 ‘나는 교수 할 만해, 교수 일은 가치가 있어.’그것 우기는 것밖에 안 돼요. 학교가 싫다는데 자꾸 들어가려는 당신이 이상하다 말이죠. 학원 강사나 하세요. 안 그러면 아르바이트나 하든지. 그런데 판사한테 석궁을 겨룬데 대해서 판사는 4년을 때렸는데 제가 만약 재판관이라면 저는 5년 때립니다. 왜 재판하는데 가서 석궁을, 그러면 판결할 때마다 국민들 와서 판사한테 석궁을 겨룬다면, 나라 법이 뭐가 되겠어요. 안 되죠. 그러면 나라 질서가 안 되죠. 그래서 제가 만약 판사라면 ‘당신 참, 훌륭한 교수고 이처럼 정의로운 교수 없습니다. 5년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5년입니다. 그렇게 해야 돼요.

 

그래서 성도는 세상 법정에 호소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라는 존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 이미 다른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마귀를 알고 그리고 그 마귀를 예수님이 이미 미워하고 마귀도 예수님을 싫어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 그런 질이 다른 사랑을 받았는데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이런 하찮은 세상 것 때문에 자존심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마지막에 18절에 마지막에 여호와의 날이 올 때, 여호와의 날이 올 때, 기준이 뭐냐 이 말이죠. 재판에서 이기는 게 여호와의 날에 이기는 겁니까? 아닙니다. 바로 여호와의 날에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여호와의 날에서 구원받습니다. 사람 사는 것은 그냥 한평생 그냥 가지만 마지막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 기준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 언약, 약혼, 사랑, 그것이지, 이 세상에서 사기 덜 당하고 남한테 재판에서 이기고, 그것이 우리가 구원의 조건이 아닌 것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놓고 우리는 곧잘 잊어버리고 남한테 안 지려고 애쓰는 세속적인 모습을 남들하고 똑같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세속 속에 살면서도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인 것을 늘 십자가 바라보면서 확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