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암 5:7-10 / 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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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암 5:7-10)
이근호 2012년 1월 22일
본문 말씀: 아모스 5:7-10
녹취:이한례 12강-암5장7-10(법)1201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 5장7절에서10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79 페이지입니다. 아모스5:7-10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저가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오늘 설교 제목이 ‘법’으로 돼 있죠? 허허벌판에 법만 있다고 칩시다. 법 좋아하는 법조인 같으면 ‘아, 법이다.’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굉장히 반기겠는데 평소에 법을 아주 싫어하는 보통 사람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법 밖에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살기에 삭막하겠습니까? 가게 가서 라면 하나 사려는데 ‘라면 있습니까?’ 하면 ‘라면 없고 법 있습니다. 법! 여기 법전 있고 여기 노동법 있고 상법이 있는데 어느 법 원하십니까? 이래 나온다면 상당히 힘들겠죠. 사람들에게 법이 있다는 것은 구속, 또는 간섭, 잔소리, 억압, 지배, 굴레, 이런 뉘앙스로 우리에게 비취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7절에 보면 “너희들이 공법을 인진으로” 인진이란 말은 쓰디 쓴 풀, 또는 쑥 종류를 말합니다. “공법을 인진(풀)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진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법을 던질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이것은 이미 자기에게 법이 있어요. 인간이 법을 이야기할 때 간섭 받는다는 이유가 이미 자기 내부에 자기 나름대로의 법이 장착돼 있습니다.
그 법이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원하는 식의 내가 되는 거예요. 여기 구약에 있는 법의 내용을 설명하라 하면 힘들기 때문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미리 정하신 자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게 법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법이예요.
여기 오늘 아모스 읽을 때는 법, 법 하니까 짜증이 나는데 로마서 8장 30절을 보니까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했으니까 요 앞에 뭐가 빠졌어요. “미리 법으로 정하신 그들을 법으로 부르시고 법으로 부르신 그들을 법으로 의롭게 하시고 법으로 의롭게 하신 것을 법으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전체가 전부 다 법이 되는 거죠.
법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질서, 체제, 구조, 쉽게 말해서 하늘나라죠. 하늘나라를 지상에 내려올 때 하늘나라가 비행접시, UFO라면 하늘나라를 밑에서 위를 쳐다보면 법이 보이고 위에서 보면 하늘나라로 보이는 겁니다. 그 법이라 하는 것은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정하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법, 그 법과 정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내 속에서 나를 구원하는 그 법과의 충돌이 우리 한평생 우리 일상의 생활입니다. 이러한 충돌을 통해서 하나님이 뜻은 뭐냐 하면 ‘니 속에 있는 니 법을 법이라고 우기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정한 법을 법이라고 이렇게 수용하라.’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요구하는 거예요. 굉장히 쉽죠? 굉장히 쉽습니다. 내 속에 이미 장착돼 있는 나를 위한 법은 버리고 하나님이 이미 만들어 준 이미 구원해주기 위해서 도입된 법은 니 속에 담으라는 거죠.
그런데 이게 말은 쉬운데 이게 잘 안 되는 이유가 우리 속에 장착된 이 법이 나한테 있는 법이긴 하지만 내가 만든 법 같으면 ‘아유, 이거 잘못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엉터리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엉뚱한 딴 법을 만들었습니다.’라고 회개하고 버리면 될 텐데 이 법이 내가 만들어 낸 법이 아니에요. 이 법은 마귀가 우리에게 심어준 법입니다. 뱀이 와서 우리에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우리에게 심겨진 법이 돼서 이 법을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제가 지난번에 서울 가락강의에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전구를 이렇게 잡아당기면 그 뒤에 뭐가 딸려 나오느냐 하면 전구 밑바탕에 전선이 있어요. 전구를 확 잡아당기면 보이지 않던 전선이 딸려 나와서 ‘왜 잡아 당겨?’ 이래 되거든요.
우리 안에는 이렇게 마귀와 연결돼 있는 전선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됐다. 나 예수 믿겠다.’라고 박차고 나와도 전선이, 마귀가 심어준 선악과와 연결돼 있어서 자유롭게 주님 앞에 우리 힘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는 특수한 전선을 따로 심어줘서 ‘기존의 전선은 이미 끊어졌다. 니한테 온 전선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는 그 전선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로마서 8장 30절에 나오는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한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이미 벌써 그러한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정해진 사람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불러낸 그들을 어린양의 피로 의롭다 하시고 약속의 땅에서 이방민족을 이기는 그 영화스러움을 이미 보장해 줬어요.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애굽에서 니가 전선으로 있던 그 전선 식은 아니고 새롭게 주입되는 하나님의 약속의 전선이 안에 내장돼 있어서 거기서 흘러들어오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전선이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구원하는 그 근거가 뭐냐, 그 근거는 그 전선 안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분을 이 땅에 보내시고 정하신 분이 이 땅에 살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부르신 예수님을 의롭다 하시고 그 예수님을 승천시켜서 영화롭게 하시는 예수님에게 이미 한바탕 다 지나간 그 모든 업적이 그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예수님에게 일어난 업적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도 그 코스대로 그대로 밟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제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몸이냐 하면 내 몸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리고 이스라엘같이 또는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면 내 몸 위주로 나오던 그 전선이 예수님 몸에 있던 전선으로 교체가 되면서 주의 몸의 업적이 우리에게 하나의 혜택으로, 축복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법의 바꿔치기, 법의 바꿔치기인데 나의 법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할 것이고, 먼저 주님의 법부터 하면, 주님의 법은 이렇게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그걸 한마디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으로 모든 계명은 이젠 종결됐다. 종결 자, 사랑의 종결자입니다.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불쌍히 여겨주시고 사랑하는 그것으로 이 모든 건 끝난 이야깁니다. 사랑할 때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라는 말부터 시작하죠.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사랑을 이야기할 때 보통 사람들끼리 사랑은 뭡니까? ‘나 되게 니 좋아한다.’ 이러잖아요. 죄인이란 말은 언급 안 하고 그 사람 약점 언급 안 하고, ‘내가 니 무지무지하게 좋아한다.’ 이렇게 나오지만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할 때는 이렇게 합니다. ‘다시는 너를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내가 니를 용서했는데.’이렇게 항상 죄 문제를 앞장 세워서 거기다가 사랑 안에 죄 없음을 포함시켜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죄가 없다는 거예요. 니는 백날 죄 지어도 예수 안에서는 ‘니가 죄 짓는다고 고생 많이 했나?’ ‘했습니다.’ 어쨌든 예수 안에는 죄가 없어요. 죄 지어도 죄가 없고 죄 지어도 죄가 없고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 돌아서면 죄가 없고 죄 지어도 죄가 없고. 참 기이한 일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너무나 이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법을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지켜서 의롭게 되는 그런 법을 좋아하지, 내가 지키지도 않는데 의인 되는 그런 법을 안 좋아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를 제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모스가 이야기한 이 예언은 북쪽 이스라엘 나라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북쪽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일부러 하나님께서 발생시켰습니다. 한쪽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의 역할을 해야 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층으로서 자리를 잡게 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냐, 애굽 사람이 주인이었고 누가 노예였느냐, 나오는 이스라엘이 노예였습니다. 그때 고생 많이 했습니다. 히브리인이기 때문에 설움 많이 받았죠. 그래서 그 억압에서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그 억압을 부르짖는 것을 들으시고 자비를 베풀어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었습니다.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고아와 과부였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방인이나 과부나 고아를 무시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무시하지 말라는 거죠. 왜, 너희들도 고아나 과부였고 나그네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히브리인들을 애굽 땅에서 고아와 과부가 되게 하느냐 하면 자비하심을 느끼기 위해서, 자비하심을 배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다가오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들의 형편을 처참하게 스스로 설 수 없는 입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고아와 과부라 하는 것은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스스로 이 땅에 살 수 없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서 ‘그게 바로 하나님과 너 사이에 유일한 최종적인 법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율법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이 자비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자비를 받았습니다.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돌아서면 어떻게 됩니까? 돌아서면 나는 더 이상 자비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에 자비도 필요 없고 사랑도 필요 없다. 난 내가 가진 자비와 사랑으로 이제는 보란 듯이 독립해서 살아보겠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게 바로 애굽이라니까요.
그래서 새상 법은 뭐냐, 내가 갖게 되면 그것이 나의 법이 되는데 주님의 법의 특징은 뭐냐, 주님은 법을 주면서 결코 내 것이 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주님의 것으로 딸려 들어가는, 빨려 들어가는 그러한 능력이 생겨나는 법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성령 받았거든 주님한테 빨려 들어가는 성령 받았고, 주님한테 빨려 들어가지 않고 주님한테 독립하고 싶으면 성령 안 받고 악령 받았다 치면 됩니다. 애매한 것 제가 정해드립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약속 이예요.
주님한테 빨려 들어가면 성령 받았고 ‘이제 사랑 받았고 십자가 아는데 내 힘으로 살아야지.‘ 이렇게 나오면 그건 악령 받은 사람 이예요. 그건 의외로 쉽습니다. 왜, 악령 받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돌아보면 다 악령 받은 사람 이예요. 뭐 기독교, 교회 다닌다 싶으면 다 악령 받은 표를 다 내고 있어요. ’십자가 아는데, 뭐. 십자가 아는데 슬슬 행함 나가야지.‘ 악령 받은 겁니다.
이게 성경을 몰라서 그래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와줬다. 신난다. 이제는 독립해서 살아야지. 이런 법은 하나님이 준 적이 없어요. 지가 통 밥으로 계산한 거예요. ‘아! 참 나 혼자 살기 힘든데 누가 안 도와주나? 도와주면 내가 자립하겠는데.’ 평소에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성경에서 기도하면 도와준다 하니까, ‘아! 도와주시지, 한번만 도와주시면, 한번만 믿어 주시면 내 힘으로 서겠습니다.’ 이것은 세상 관계에 있을 때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
명절 날 되면 자식들 정종 한 병 들고 와서 ‘아이고, 아버지 건강 하십니까?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내가 보약 지어 드리고, 온갖 소리 하다가 떠날 때는 ’아버지, 한번만 보증서 주시기 바랍니다. 요번에 큰 건수 있는데 지난 건 다 실패고 한방에 보상되는데 이거 아는 친구가 꼭 요거하면 된다는데 한번 믿고 보증 서 대출 한번 내 주이소. 그러면 제가 자립하겠습니다.‘ 이거는요, 생각해 보세요. 자립하겠다는 의지가 사람마저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마저 이용하고 부모마저 이용하고 지 자립심이 대단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주변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겁니다. 투자자를 찾는 거겠죠. 요게 애굽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게 정상적인 사람 이예요. 인간은 태어나면 다 애굽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 되고 하는 그런 법 없어요. 태어나면서 애굽인데 하나님의 자비와 매치가 되고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욕심을 내서 어릴 때부터 유아세계 받고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 만드는데 모태신앙 소용없어요. 그냥 애굽입니다. 애굽에서 종교적인 형식을 거쳤다고 해서 히브리 백성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자, 법 밖에 없다. 제가 삭막하다 했죠. 제가 처음에 했잖아요. 법만 있다. 무지 삭막할 겁니다. 그런데 말을 바꿔봅시다. 사랑만 있다. 용서만 있다. 삭막합니까? 만약에 자기가 자립하려하면 삭막해요. 하지만 용서만 있다고 한다면 삭막하지 않고 항상 그 앞에서 못난 내가 못난 존재로 살면 그것처럼 편한 게 없습니다.
사극 같은데 보면 조선시대 때,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 부부들 사는 걸 보면 굉장히 답답해요. 요새 젊은 사람은 안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격식을 챙기고 ‘이리 오너라.’ 하는 양반 행세 다하고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요. 그런 식으로 나가니까 그 사회에서는 형식과 예의범절이 충만한데 과연 부부사이에 사랑이 오고가는가, 정이 오가는가, 의심될 때가 있어요. 밤에는 모르죠. 밤에는 뭐하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낮에는 그러는데, 요새 젊은 사람들은 탁 깨놓고 하잖아요. 예를 들어서 밖에 나가서 ‘으흠’하고 힘주고 멋있는 체 하지만 진짜 자기가 이뻐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가 있으면 그 나이차가 10살 많고 9살 많고 8살 많은 남편이 집에 오면 애가 되는 게 남편으로서는 그렇게 편해요. ‘밥 쭤요.’ 이렇게 해서 말도 꼬아서 해서 하는데, 그게 그렇게 편한 이유가 아내는 놀린다고 윽박지르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좋은 게 뭐냐 하면 그 안에서 용납이 된다는 사실, 바깥에서는 냉정해야 되고 비정해야 되고 철저해야 되고 완벽해야 되고 실수가 있으면 안 되고 오점이 있으면 안 되는데 안에 들어오면 옷을 팬티만 입고 돌아다녀도 누가 허물하는 사람이 없고 뭐 말을 함부로 해도 타박을 주면서도 그게 또 정이고 그게 얼마나 편안해요. 천국이 따로 있어요. 뭘 해도 용납 되고 뭘 해도 용서를 받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
참, 옛날 부부들은 정이 없어요. 부부간에도 격식을 차려야 되고 남편 밥상에는 냄비채로 주는 법이 없고 빈 접시에 담아야 되고 사랑만 있다면 냄비가 뭐예요? 냄비 뚜껑에 담아줘도 기분 좋습니다. 뭘 해도 기분 좋고 뭘 해도 온화하고 뭘 해도 온실 안에 있는 것처럼 이래 뒹굴어도 사랑이요. 저래 뒹굴어도 사랑이요. 어화 둥둥 내 사랑, 앞태를 보아도, 뒤태를 보아도 내 사랑. 나오잖아요. 뭘 해도 사랑 같으면 그게 영원한 사랑의 천지가 법 천지라면, 세상에 거기서 왜 독립을 하려 합니까? 거기서 자기 행함을 따로 구축해야 돼요? 그만큼 사랑을 모르고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리 굴러도 용서가 되고 저리 굴러도 용서가 전부 다 피 안에서 용서가 된다는데 이게 수십 년 무려 삼사십년 들어도 이게 안 믿어지는 거예요. 기껏 나오는 게 ‘예수님, 저 피 믿겠습니다. 충성.’ 이거 하고 있다고요. 무슨 피를 믿는데 무슨 격식이 필요하고 충성이 필요합니까? 그냥 피 안에 뒹굴면 되죠. 못난 죄인으로서.
그걸 모르고 이 근호 목사는 만날 눈만 뜨면 죄, 죄, 죄.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 안에 있으니까 만날 죄만 지어도 좋죠. 그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도자에게 요구하던 법이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애굽 인이 되고 말았어요. 학대를 하고 손에 채찍이 없다 뿐이지 법이라는 걸 가지고 채찍을 때린 겁니다. 부러진 화살, 영화는 안 봤습니다. 볼 거예요. 석궁가지고 판사를 쏘려고 해서 위협을 했다는 죄로 5년 감옥소에 간 성균관 대학교 교수인데 그 교수는 우리나라에 수학에 집합론이 있어요. 집합론 최고 권위자입니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 그 사람 교도소에서 나오지 못해 학문 발전 못해, 우리나라 수학 집합 발전에서 공로자인데 성균관 대학교 비리 때문에 말려들어서 석궁 위협 때문에 가 있는데 내막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기에 억울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법이 문제가 아니고 왜 내 취지를 몰라주느냐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세가 그래요. 석궁 교수 그 사람 지가 판사해도 똑같아요. 진짜 사랑을 안다면 ‘법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런 식으로 나오지 말고 ‘그래, 이 법도 사랑이다.’ 그렇게 받으면서 교도소 가서 집합론 연구하면 돼요. 왜, ‘나는 교도소 가면 안 돼.’라는 그것도 일종의 자립이거든요.
우리는 죄인이라면 주께서 주신 환경 속에서 그 작은 것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작은 것 속에서 은혜를 발견하고 작은 것 속에서 작은 것이 되지 않은 돌멩이 자체가 다이몬드라는 걸 아는 그것이 은혜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별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여기 나오는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묘성이라는 것은 황소자리, 삼성이라는 것은 오리온 자리,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밤 지나면 아침이 오고,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왜 이런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안 보느냐 이 말입니다.
아! 참 어렵죠. 이것은 누구나 낮 되면 밤 되고 밤 되면 낮 되고, 그리고 뒤에 나오는 바닷물이 넘쳐서 지면에 쏟고 바다하고 땅하고 따로 있고 바다는 바다고 땅은 땅이고, 하나님 뜻일 것 같으면 바다가 몰려오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고, 결국 세상이 뭔가 모든 움직임이 사랑의 움직임으로 움직이는데 그런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지 못한다면 그게 어떻게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런 사랑으로 같이 호흡하면서 대자연의 변화와 호흡하면서 그 넓은 사랑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재판해야 되는데 그들이 독자적으로 백성들을 등 처먹고 자기만 살겠다고 나서니까 ‘너희들이 하나님의 법은 어디로 갔느냐.‘고 탄식하는 대목입니다.
그럼 이 탄식하는 대목에서 끝나면 안 되겠죠? 이제 뭔가 달라져야 되겠죠. 그러면 달라지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그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러한 모든 작업에 누가 들어간다 했습니까? 예수님의 일평생이 들어가죠. 예수님의 한평생은 뭐냐, 십자가의 고난이죠. 미리 정하신 자를 불러 낼 때 우리 보기는 쉽게 불러낸 것 같지만 미리 정하고 부른 그 마디에 뭐가 들어가느냐, 예수님의 자기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오리온자리에 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황소자리에 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바닷물이 치고 밤이 새벽 되고 새벽이 밤 된다고 해서 그걸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죄 문제는 대자연도 관여 못해요. 대자연이 나선다고 대자연의 사랑으로서 그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고 대자연 안에서 이루어진 십자가 사랑으로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구약 때 법 이상으로 더 깊고 넓은 법의 완성이 신약 때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완성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햇빛 비추는 것도 사랑이고 비오는 것도 사랑인데 그것이 사랑 맞고 자비 맞는데 그 사랑과 자비로서는 우리의 죄까지는 해결되지 못하는 거예요. 그 햇빛과 공기 속에서 어떤 분이 죽으시고 그 죽으신 것을 통해서 모든 사랑을 완성시킬 때 그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러면 법은 뭐냐, 이 시대의 법은 뭡니까? 바로 십자가에게 고맙다고 여기고 십자가 사랑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다는 그 고백, 그 기쁨, 그 감사, 그런 감사로 판사도 되시고 의사도 되시고 변호사도 되시고 그런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일에 종사해 보란 말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법이 그 사람 입을 통해서 전파되고 전도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독립하려는 사고방식 때문에 시시하게 여겼습니다. 정말 우리 자신이 시시한데 정말 우리 자신이 보잘것없는데 자꾸 우리 자신을 너무 높게 대우하는 그러한 악마적인 경향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도 시시하게 보았습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까지 버렸겠습니까? 그 십자가 주님 앞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다. 더 큰 사랑은 없음을 서슴없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올 수 있도록 저희들을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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