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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아모스 1:3-5 / 서너 가지의 죄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1:3-5 / 서너 가지의 죄

정인순 2011. 11. 13. 16:57

 

 

서너 가지의 죄
음성

 

이근호
2011년 11월 13일                     

 

본문 말씀 아모스 1:3-5

(암 1:3,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암 1:4, 개역)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암 1:5, 개역)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메섹이라는 지금은 아람 나라의 수도입니다. 아람나라는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해 있는 나라로서 이스라엘 역사 내내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괴롭힘을 주는 것은 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조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은 동정하게 되고 아람 나라를 저주할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 믿는 나라를 그토록 괴롭혔는데 너도 어디 하나님으로부터 된통으로 당해봐라.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성도를 위해서 보복해주시는 분이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발상이 오늘 본문을 잘못되게 해석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있다는 것으로 대신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도리어 이웃 나라의 침범과 악행으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에 무슨 문제가 없는가를 돌아보라는 겁니다. 즉 교회란 스스로 자신을 비난할 만한 요소를 품고 있어야 합니다. 인간들이 내세우는 주관이란 실은 주관 정도가 아니라 ‘자기 절대성’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무너져도 자신은 절대로 다쳐서는 안되는 존재가 곧 본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나 아람나라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너 가지 죄’란 죄의 개수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세월 따라 시간 따라 지속적으로 죄를 연이어 짓게 되어 있는 속성을 말해주는 겁니다. 인간의 죄란 환경 속에서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부응되는 몸의 활동입니다.

그러니 위선이라는 것은 삶의 일부이며 세월 따라 시간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위선들이 끊임없이 우리 몸을 통해서 방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환경에 대응하는 몸의 본성이니 스스로 힘으로 끊을 수 없는 겁니다. 자제시키려고 한다면 그 위선을 커버할 수 있는 더 교묘한 위선을 따로 만들어내기 마련입니다. 마치 변명이 또 다른 변명을 부르듯이 말입니다.

아람나라의 죄는 밑에 있는 나라, 즉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죄입니다. 그런 죄들은 본인들의 비-언약적 인식 하에서 이루어지기에 질적으로 처리되거나 계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마치 고급 의류가 처음 출시 될 때에는 질로 따지지만 유행이 지나버린 제품에 대해서는 무게 달아서 땡처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 즉 하사엘이라는 사람과 그 아들 벤하닷이라는 사람은 어지간히도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틈만 나면 괴롭혔는데 그들의 괴롭힘도 이스라엘이 발생해내는 죄와 관련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는 방식이 이 두 나라 사이를 박치기 시켜서 진행시키는 겁니다.

이 두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 소원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봐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두 나라의 충돌가운데서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을 품게 되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분이 바로 엘리사 선지자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나 아람 나라 편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선지자 편에 서 있는 분이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열왕기하 13:16-19에 보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사전에 ‘오륙번 치세요’라고 지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란 실천용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들추어내는 시험용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왕들은 자신의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쪼르르 선지자에게 달려가서 조언을 구하고 처방책을 찾게 됩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편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편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승리가 되면 그만 승리에 도취되어 그 이후에는 그 승리는 자신의 소유로 삼아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다시 교만과 우상숭배에 빠져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실은 매일같이 새로운 위선과 죄를 생산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전에 써먹고 효과받는 것을 그대로 재탕, 삼탕하면서 써먹어서 그때 그때를 모면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 중심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밖에 안되는 것으로 실은 이런 태도가 우상숭배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시기 위해서 동원된 나라가 바로 아람이고 주변의 여러 이방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이방나라는 이 사실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나라의 죄란 그들이 언약을 고려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눈치를 볼 것도 없기 때문에 자기 속에 품고 있던 악한 본성을 이웃 나라를 향하여 마음껏 발산하는데서 오는 죄를 말합니다.

아람나라는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이라는 이스라엘 동네를 압박했습니다. 여기에서 철 타작기는 이가 달린 쇠 바퀴가 달려 있는 차로서 타작할 때 그것을 굴러 곡식 단을 잘게 부숴뜨리는 기계입니다. 따라서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했다’는 말은 일체 동정이나 자비심을 발휘하지 않고 밀어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후의 통치 때에 아람 나라의 하사엘 왕에 의해서 자행된 악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왕하 10:32)

다메섹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형벌은 네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의 모든 궁궐을 하나님께서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다메섹의 빗장을 꺾는’ 형벌인데 이것은 견고하고 안정하게 보이던 그들의 요새 다메섹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笏) 잡은 자를 끊는’ 일입니다. 즉 ‘아원 골짜기’와 ‘벧에던’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서 이러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던 다메섹 거민들이 칼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겁니다. (왕상 20:29) 그리고 네 번째, 남은 백성들이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형벌을 받는 일입니다. 이 예언은 실제로 B.C. 732년 앗수르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다메섹 멸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위선은 이미 영원한 선지자 예수님 앞에서 다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되풀이 하면서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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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02강-암1장3-5(서너 가지의 죄)1111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1장3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75페이지입니다.

아모스1:3-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역사가 이렇게 성경에 탁 나오면 설교하는 자가 가슴이 탁 답답해지죠. 왜냐 하면 우리나라 역사 고려시대 때 이야기, 조선시대 때 이야기, 신라 삼국시대 때 이야기도 귀찮아지는데 남의 나라 이스라엘 역사가 옛날에 있었던 것을 우리가 알아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 알아서 뭐할 건데, 그런 생각이 문득 든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도 한편으로 이 성경 말씀이 여기에 담긴 원리 원칙대로 지금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하는 그것도 생각하게 되면 이것도 무작정 무시할 수가 없고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 말씀의 뜻을 파악하니까 이건 숲속의 가시나무의 가시처럼 복잡한 그러한 지면과 사람 이름이 등장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경 보고자 하는 의지를 초장부터 아주 가로막게 돼 버리죠. 숲을 헤쳐야 되죠. ‘가지를 끊을 것은 끊어버리고, 자를 것은 잘라버리고 고 담겨있는 엑기스, 그 진수를 끄집어내어서 오늘날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원리로 일하십니다.‘라는 것을 우리가 같이 살펴봐야 되겠죠.

 

그러면 잘라내는 것을 그냥 잘라내면 안 되고 그럼 성경 말씀의 모든 걸 무시하니까 이러한 명칭을 잘라낼 때 요 명칭은 오늘날 요런 뜻에서 완성이 되었고 그래서 잘라내고, 요 지명은 오늘날 요런데서 완성됐기 때문에 요 지명도 알았다 치고 잘라내고 요 사람은 요새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요것도 알았죠?’ 하고 잘라내고 그런 식으로 현대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 겁니다.

 

요 본문의 핵심이 뭐냐 하면 첫 번째 나오는 것이 다메섹이라는 지명이 나오죠. 옛날에는 지명 자체를 나라 이름으로 대용해서 사용했었습니다. 다메섹이라는 곳은 아람나라의 수도, 아람나라의 서울을 다메섹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아람나라하고 오늘날 대한민국 사는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고 오늘날 교회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있어요. 왜 관계가 있느냐 하면 이 다메섹이 수도니까, 아람나라라고 바꾸겠습니다. 아람나라는 거기 남쪽에 있던 이스라엘과 굉장히 주고받고, 주고받고를 많이 했던 나라에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거기 배치해 놓은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새로 이사를 갔는데 이쪽에서는 신천지, 저쪽에서는 박태선, 이쪽에서는 안식일, 이쪽에서는 감리교, 온갖 것으로 포위됐을 때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냐’ 하고 그렇게 바라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각자 안주인들이 한데 모여서 반상회를 하든지, 아니면 성경 토론회로 모였다고 칩시다. 여호와증인도 있고, 여호와증인은 말발이 안셉니까? 아주 대단해요. 전에 여호와 증인하고 특히 성경 구절가지고 들이대는지, 여호와 증인도 세지만, 지방교회, 아! 요거 못지않습니다. 워치만 리, 요것도 세거든요. 이런 사람들이 반상회로 성경토론을 하게 되면 거기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딱 깨고 보면 중심이 없다. 그걸 어려운 말로 간주관적이다. 이게 서로가 서로의 주관이니까 서로의 주관을 존중해 주자하는 것을 ‘간’ 간 맞추는 게 아니고 중간 간, 間 사이 간자를 써서 모두의 주관과의 덩어리 속에 놓여있는 게 현대 사회다.

 

더 쉽게 말씀 드리면 인간은 각자, 각자 자기의 주장들이 있기 때문에 그 주장들을 까지 말고 그 주장들을 하나의 있다는 자체, 내용은 존중해주면 안 되죠. 그 주관들을 있다는 자체를 존중해 주면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되 그 가운데 어떤 협정 같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각자의 영역은 존중하되 침범하지 않기, 뺏어 가지 않기, 그리고 공격하지 않기, 이러한 주관을 넘지 않는 그것을 어떤 철학자는 말하기를 주체라 하는 것은 개인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 갖고 있으니까 ‘각자 갖고 있는 그 전체를 주체라 하자’라고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는 철학자가 있어요.

 

어쨌든 간에 주위에 뺑 둘러서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천주교도 있고 그렇게 있다면 그 중에서 ‘중심은 어디 있느냐’ 하는 거예요. 중심은 어디 있겠습니까? 중심이 없죠. 그때나 이 성경의 아모스 시대나 지금이나 특징이 뭐냐 하면 중심은 없기에 ‘중심은 내가 만든다.’라는 식이 사고방식이 인류역사 가운데 어느 역사에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중심 없지? 중심 없지? 그럼 내가 중심 될게.’ 라는 사고방식은 이건 여호와증인이든 안식교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다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각자, 각자 자기가 여호와나 하나님을 증거 해도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믿음, 자기주장을 증거 하는 것밖에 안 되는 그러한 토대가 확립돼 있어요. 그것을 그 토대를 인정해야 될 이유가 하나님도 이렇게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섬기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은 우상 섬기는 것을 잘했다는 말이 아니고 우상이 있다는 자체는 있는 걸로 인정한다 이 말입니다. 있는 걸 없다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전부 다 지 잘났다 하는 것을 없다고 하지 말고 안타까워하지 말고 그걸 그대로 현실로, 현실의 짜깁기, 현실의 섬유의 조직으로 인정해줘라 이 말이죠. 지 잘났다 하는 것을. 식구가 열 식구인데 열 식구 다 지 잘났다 하는 것을 인정해 줘자 이 말입니다.

 

그것부터가 성경 공부가 이제 시작이 되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이 뭐냐 하면 이 성경말씀이 ‘나는 옳은데 남은 틀렸다‘ 하는 그 사고방식을 되레 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니도 문제 있잖아.’라고 하는 것이 이 아모스 성경말씀이 우리보고 치는 거예요. ‘저 바리새인 쳐주시고 저 여호와증인 쳐주세요.’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이 손가락질로 ‘이 손가락질로 니부터 쳐 보련다.’ 하고 나서는 것이 이 아모스라 말이죠.

 

그래서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비난할 만한 요소를 본인이 갖고 있어라 이 말 이예요. 자기를 비난할 만한 요소를 본인이 갖고 있어야 돼요. 그리고 남한테 전도할 때 이 이야기를 포함시켜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나는 이런 점에서 비난받아야 돼,’라는 것을 포함을 시켜줘야 돼요. 이것을 포함을 안 시켜버리면 아무리 길게 설교하고 길게 전도해도 ‘그건 니 생각이고요.’ 이러면 그 한 시간 두 시간이 헛된 시간으로 낭비가 되는 셈이 되는 겁니다.

 

어떤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목사님이 젊을 때 부교역자 직을 하면서 김해와 창원사이에 장유라는 곳에서 개척교회 부교역자로 있었답니다. 그래서 거기서 일어난 일을 제가 잠시 소개하는데 제가 너무나 실감나는 이야기라 기억이 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근처에 무당집이 있는데 하루는 무당집에 당회장 목사하고 자기하고 무당집에 방문을 했는가 봐요. 뭣 때문에 방문했는지는 모르지만 갔을 때 무당이 하는 말이 ‘ 목사님, 두 분이 오셨는데 딱 깨놓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 다 업이 같은 업이니까 서로 비난하지 맙시다.’ ㅎ

 

자, 업이 같은 업이라. 무당 하는 짓이 같은 업이라 하는 그것을 당회장 목사는 이해를 못하는데 그 목사는 감을 잡은 거예요. 뭐냐, 사람들이, 소비자가 어떤 가계나 업소를 찾을 때는 그 업소 잘되라고 찾지 않고 지 잘되라고 찾는 거잖아요. 무당을 찾는 심보가 뭐냐 하면 그 돈 만원주고 점을 봐서 앞으로의 미래를 예측해서 대비해서 좋은 쪽으로 자기가 잘 풀리는 쪽으로 자기가 마음 정리 하겠다 그런 뜻에서 가잖아요. 그 맴이나 그 마음이나 사람들이 교회 찾아서 헌금하는 마음이나 그게 성경에서 같은 입장이다 말이죠.

 

그러면 교회는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는 ‘아니야’라는 요소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 ‘아니야’라는 요소는 한 사람도 없어요. 그것 때문에 교인들이 오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교회에서는 다 같이 비난하는 요소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비난하는 요소를 품고 있어야 그게 교회다 이 말이죠. ‘그렇게들 오셨죠?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라고 그것이 죄라고 발각시키는 교회가 교회다 이 말이죠. 그게 옆에 무당집하고 차이가 나는 점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함부로 교회에서 간증하지 말라 이 말이죠. 간증하면 무당집 되니까.

 

이 오늘 본문의 내용은 복잡하게 지명과 사람이름으로 얽히고 섞여서 수풀을 만들었지만 수풀을 헤치고 보면 남는 것은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람나라야, 너희들이 옆에 있는 이스라엘을 괴롭혀도 너무 괴롭혔다. 이제 너는 그 괴롭힌 값을 내가, 여호와가 나서서 되갚아줄게.’라는 간편하고 간단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요 이야기를 수풀을 헤치고 가시부터 헤쳐 버리고 이 이야기를 해버리면 ‘그래, 착한 이스라엘 너무 억울하게 당했어.’ 이렇게 오해할 요지가 굉장히 많은 거예요. ‘그래, 순하디 순한 이스라엘을 하나님 믿는다고 열심인 이스라엘을 세상에 하나님 믿지도 않는 아람나라가 그렇게 괴롭혔구나. 혼 좀 나야 싸지,’ 이렇게 오해할 수가 있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세상에 내가 예수 믿는다고 이렇게 고생하는데 옆에 있는 권사님이 그렇게 사기를 치고 괴롭혔구나. 그런데 아모스에 보면 네 원수를 갚아준다고 아모스 1장 4절~5절 보니까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벌주는 걸 보니까 조금 있다가 벌 받아, 알았어? 날 건드렸으니까.’ 이런 식으로 또 오해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가 스스로 나에게 비난할 요소를 어느새 까먹게 되는 거예요. 그것도 성경 해석이 잘못됐다 이 말이죠. 사람들이 지 중심이니까. 간주관적이 아니고 지 주관 중심이니까. 그래서 이 본문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여기 나오는 이스라엘, 그리고 아람나라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를 우리가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사해 본다고 하면 오후시간에 잠이 오기도 하는데 복잡한 이야기하십니다. 해서 미리 제가 선점해서 결론을 미리 제가 당겨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람나라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나라이고 아람나라는 하나님이 버린 나라라고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그런데 택한 백성과 버린 나라 같으면, 우리 생각 같으면 자기 백성이니까 무조건 자기 백성 편드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꽈당’하고 머리 두 개를 둘 다 박치기를 시켜놔 버립니다. 불이 번쩍 나겠죠. 고 박치기 시키는 제 3의 인물이 있습니다. 고걸 우리가 찾아내면 해석 성공입니다. 그게 뭐냐 엘리사입니다. 엘리사!!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항상 나라와 나라,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 유다나라와 이스라엘, 유다나라와 다른 나라할 때 제일 거기서 진짜 가슴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 틈바구니에서 양쪽에서 다~ 욕을 얻어먹는 분이 계셔요. 고난 받는 자, 메시의 형상으로 보이는 선지자입니다. 복잡하게 이스라엘 역사를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예만 든다면 이스라엘 왕이 있었다. 반복이 되니까 어느 대목도 다 적용이 돼요. 이스라엘 왕이 있었다. 옆의 나라 아람나라가 쳐들어온다. 그래서 무기도 없고 군사도 없고 대체할 능력도 없다. 그런데 황급하게 선지자를 찾는다. ‘선지자야, 선지자야, 이럴 때 우리 좀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뛰어 들어가 기도를 했었다. 드디어 웬일인지 적들은 물러가고 적들은 아주 대패를 하고 이스라엘과 유다는 승리를 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왕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사람을 박해하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 그 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그 다음부터는 전에 써먹던 방법, 아! 요거 중요합니다. 머릿속에 줄 쫙 그어놔야 돼요.

 

전에 한번 선지자에게 물어서 써먹던 방법 있잖아요. 그 방법을 자기가 전에 한 조언을 참고로 다 썼기 때문에 ‘이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걸 그대로 써먹다가 그 다음에는 대 낭패를 보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조언이 일회용이라는 사실을 인간세상에서는 상상도 못합니다. 5년 전에 은혜 받은 거, 그것 가지고 우려먹다가는 5년 동안 계속 매 맞고 다녀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뭐든지 어떤 능력과 재주 있으면 하나님의 재주와 능력을 자기가 품에 안고 소지해서 요것 가지고 자꾸 남한테 믿음 좋다고 그걸 써먹으려고 해요. 10년 전에 자기가 이 교회에서 대포 맞았는데 지 했던 그거, 만날 써먹던 그걸로 부흥회 하듯이, 만날 자기 능력 받은 거, 자기 어떤 독특한 사건, 그걸 자꾸 끄집어내서 써먹으려고 하는데 그러다보면 지금 주신 오늘의 평범한 일상 속에도 주님의 희생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짓밟아버리는 현상이 된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서너 가지 죄’라고 돼 있습니다. 이 서너 가지의 죄라는 것은 어떤 현장에서 죄가 여섯 개, 네 개 있다는 말이 아니고 시간이 그만큼 흐르면서 그 시간대마다 주어지는 죄들이 계속해서 우리가 생산되고 있다는 거예요. 공장이 가동되면 제품이 나오듯이 우리 몸이 가동되면 죄라는 새로운 생산물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나오면 우리의 대체 방법은 이 이스라엘 대체 방법과 똑같았습니다.

 

한번 들었던, 전에 써먹었던 방법을 거기다 적용해 버립니다. 예방주사를 어릴 때 맞았는데 커서는 안 맞는 이유가 바이러스가 적응돼서 그렇지 않습니까? 전에 했던 처방전을 똑같이 그 처방전을 똑같이 써먹으려고 해요. 촌에 할머니 보면 약을 5년간, 3년간 그 약을 또 먹는 사람이 있어요. 약은 그때, 그때 먹고 버려야 되는데 아깝다고 돈 주고 샀다고..ㅎ 그러니 병이 낫습니까? 안 낫죠. 이미 병이 들어버렸는데.

 

인간은 자기 몸이 고정됐다 하지만 오늘의 내 몸과 내일의 내 몸의 현상이 달라져요. 어떤 점이 달라지느냐 하면, 인간의 위선이라는 것은 몸의 감각에 부응하기 위해서 조작된 게 위선입니다. 그런데 위선의 종류와 질이 그때, 그때마다 달라요. 늘 달라요. 위선의 폼 내는 것도 잘 지어낸다니까요.

 

오늘 주일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출애굽 때 홍해 건너가는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앞에 있는 꼬맹이가 ‘죽어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니까 ‘목사님, 죽으면 인생 끝 이예요.’ㅎ 이건 60대 노인이 이야기하는 건데 어디서 이런 걸 배웠는가, 목사님, 죽으면 인생 끝이라는 거예요. 왜, 죽어도 심판이 있고 그 뒤에 영생이 있다는 그 말이 머릿속에 안 남아있고 죽으면 끝이라는 주변의 친구들 말은 그렇게 잘 파고 들어갔는지,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꾸미기 나름 이예요. 인간은 쉬지 않고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꾸밀 수 있는 덤불 가지를 모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또 선지자를 찾으려 하니까 지가 부끄럽잖아요. 병원에 늘 오면 병원의 의사한테 환자가 부끄러워서 못 가요. 그래서 다른 병원에 가요. 병원은 별 방법이 없어요. 우리도 한군데 밖에 없어서 가지만, 부끄러우면 다른 병원 간다고요. 사람이 매일같이 나오는 이 위선을 어떻게 처리를 못해 옛날에 써먹었던 방법을 또 쓴다고요. 그 써먹었던 방법이 뭐냐 하면 빡세게 기도하고 기도원에 올라가고, 헌금하고 은혜 받으려고 앞자리에 앉고, 우리교회는 알고 앞자리 앉지 않고 다 뒷자리로 가는데, 이게 뭐하는 겁니까? 자꾸 써먹은 방법을 써먹으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돼요. 방법을 써먹을 생각하지 말고 내 쪽에서 내가 어떤 처방 전을 내리지 마시고 처방 전 때문에 목사하고 상담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처방하라는 말이 아니라 ‘니는 뭘 해도 안 돼.‘ 요새 유행하는 ’안 돼‘ 우리는 어떻게 자기 처방을 해도 안 된다는 걸 이미 아시고 이미 단 한번으로 처방을 끝내버렸습니다. ’맘껏 위선을 드러내라. 그리고 그 위선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오너라. 그것도 매일같이 나오너라.‘ ’‘그래 오늘은 무슨 위선을 가지고 나왔는고.‘ ’예, 제가 이런 위선자입니다.‘ ’알았어.‘ 이렇게 대화를 순하게 해야 돼요. ’열심히 기도했는데 응답 없습니다.‘ 이렇게 나발 튀어나오지 마시고 ’오늘은 이런 위선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오늘 손님이 왔는데 이런 사기를 쳤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_^ ’니도 자기 집에 가면 사기치고 있다.‘ 둘 다 다 사기치고 있는 거예요.ㅎ

 

제발 자기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가져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했잖아요. 주께서 ’다 안다‘ 이 말입니다. 아람나라와 이스라엘이 서로가 사기를 친 거예요. 그런데 아람나라가 배척하는 이유가 이스라엘 나라가 교만해 지니까, 틈난 나면 이게 시비를 거네, 그 시비 거는 사람이 두 사람이 나와요. 하사엘이 나오고 그의 아들 벤하닷, 이 두 사람 다 깔짝깔짝 이스라엘 옆에서 그렇게 괴롭히는데 그 괴롭히는 시점이 하나님에 의해서 조종, 지가 공격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쳐라, 쳐라.‘하면 이스라엘을 와아~ 치고 ’가라, 됐다‘ 하면 가고, 또 ’쳐라, 쳐라‘ 하면 죽 치는 거예요.

 

칠 때 이 아람 군대도 하도 이스라엘을 치다 보니까 재미가 나서 어떻게 쳤느냐 하면, 여기에 3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아람나라가 어디쯤 되느냐 하면 예루살렘이 대구지방이라면 아람나라는 어디 있느냐 하면 북한의 간도지방, 만주 저쪽 동쪽 만주지방이 아람나라예요. 북한은 이스라엘이고 남쪽 유다는 대구고 아람나라는 만주 간도지방, 저쪽에 독립군 운동하던 그 지방, 러시아 연 외주 지방 그쪽이 아람나라예요. 여기 자꾸 내려와서 타작할 때마다 내려와서 수확한 거 다 가져가서 꼭 조폭 같아요. 이렇게 괴롭히는데 그 괴롭히는 시점도 하나님이 조정하십니다.

 

이 시점에서 괴로웠던 사람은 누구냐, 엘리사예요. 하루는 요아스 왕이 아람나라가 또 쳐들어왔어요. 그래서 요아스 왕이 또 엘리사를 찾습니다. ‘선지자님, 미안합니다만 또 찾아왔습니다. 저 아람나라를 어떻게 하면 안 쳐들어오게 합니까?’ ’화살을 가지고 땅을 치세요.‘ 하니까 왕이 화살을 가지고 땅을 세 번 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오륙 번을 쳐서 아람나라를 진멸하도록 쳐야 되는데, 왕이 세 번만 친 거예요. 그게 왕은 엉뚱한 거예요. 처음부터 오륙 번을 치라 하면 오륙 번을 쳤을 텐데 쳐라 해서 쳤는데 ’왜 세 번만 치십니까?‘ 하니까 ’진작 그렇게 말하지, 답답하게.‘ 이 말은 하나님의 명령은 시키는 대로 하면 복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 자체가 결국은 우리의 본색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 생존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다 표내기 위해서 거론되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 측정기구 같은 것이, 현미경 같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했잖아요. 위선 가지고 그대로 늘 십자가 바라봐라. 자기가 자기한테 조치하고 처방전을 내리지 마세요. 우리는 무슨 처방을 해도 성경 말씀 앞에 가면 또 인간적인 생각이 거기서 발각되는 겁니다. 그런데 또 엘리사가 울면서 ‘아이고, 나라꼴이 안 됩니다.’ 하고 이렇게 조언을 하죠. 과연 그 뜻대로 그 말씀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나라는 또 아람군대에 의해서 계속 횡포를 당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은 엘리사의 고난과 아픔, 그것에 근거해서 여기에 아람군대를 친다는 겁니다. 요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람나라야, 니가 이스라엘을 쳤구나.’ 할 때 그 이스라엘은 나쁜 이스라엘 이예요. 하지만 나쁜 이스라엘 속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엘리사가 들어있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다시 종합해서 말하면 ‘아람나라야, 하나님이 동행하는 이스라엘을 쳤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시기는 치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내려놓고 막상 치니까 ‘니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엘 쳤기 때문에 니가 혼나봐라.’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박살내는데 어떻게 박살냈는가, 오늘 본문에는 안 나옵니다마는 거기에 보면 그들의 왕궁에 불나요. 그 불은 아람나라보다 더 위의 나라, 만주보다 더 위에 있는 나라, 앗수르에서 큰 군대가 와서 아람나라가 이스라엘을 조지듯이 그 조지는 이상으로 그 다른 이방민족이 아람나라, 다메섹을 불질러버리죠. 그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결론 맺겠습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은 성도로 하여금 니 자신을 믿지 말고 예수 믿으라고 하기 위해서 주변에 배치돼 있는 여호와증인, 안식 교인이고 주변에 안 믿는 사람들 전부 다 그런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했습니까? 종교가 부러운 것이 아니고 그들이 갖고 있는 재산이라든지 이런 것, 능력, 아는 사람 많은 것, 권력, 그런 것을 얼마나 부러워했느냐 말이죠. 그러나 그걸 부러워하다 보니까 우리는 정작 주께서 주신 십자가 은혜를 우리는 너무나 우리 쪽에서 짓밟고 그쪽을 닮아가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우리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들이 나를 사기 쳐 먹고 나를 힘들게 하고 합니다. 그 배치가 오늘 이 분문의 배치하고 동일하게 그대로 작용합니다. 십자가 있으니까 니가 갖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보이면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늘 받아들이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을 너무 부러워했습니다. 내 잘되기 위해서 그들이 있어야 되는데 그들이 어떤 때는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까지 십자가 앞에서 위선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그러한 세상적인 것을 늘 십자가 앞에서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