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암 1:1-2 / 아모스 선지자 / 111106 본문
|
아모스 선지자
이근호
본문 말씀: 아모스 1:1-2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이한례 01강-암1장1-2(아모스 선지자)1111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1장1절에서 2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75페이지입니다. 아모스1:1-2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창세기 3장에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아오죠. 이렇게 찾아주시는 그것을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종의 거기서 찢어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천장이 찢어지고 무너지면 그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잖아요. 갇혀있는 세상에서는 다 사람들이 서로서로의 의견만을 보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뭔가 천장이 뚫어지고 찢어지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계시가 도달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왜 나한테는 그런 효과, 그런 기회를 안 주느냐’ 이렇게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임하게 하므로 말미암아 ‘니가 선지자 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선지자 된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말이 곧 내 말이다. 하나님의 말이다.‘라는 것을 언급을 하시는 거예요. 이 당시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당시에 선지자가 있었다면 오늘날 이 시점에는 뭐가 있느냐, 선지자에게 이렇게 특별히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것은 천장이 뚫려서 한 줄기 빛이 비취듯이 깜깜하고 어둑하고 축축한 창고에 갑자기 예상 못한 하늘이 빛이 그 사람에게 조명발 비취듯이 왜 이렇게 선지자를 그러한 존재의 위상을 갖게 하느냐 하면은 이 선지자가 그냥 계시를 전달하는 것이 그 사람 역할이 아니라 장차 올 어떤 분이 계신데 그 예수님께서 바로 선지자의 모양새로 오심을 이미 앞당겨서 보여주기 위해서 한 겁니다.
제 취지를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믿지 마라. 아빠 엄마도 믿지 말고 아무도 믿지 마라. 믿지 말고 오직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을 준 적이 없다. 그럼 무슨 이름이 구원받을 이름이냐 하면,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한다. 요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누구십니까?’ 할 때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했어요. 나사렛 예수니라. 예수님의 보따리를 끄집어내고 우리가 열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한분 예수님 이예요. 예수님이 행하신 것, 예수님이 다 이르신 것, 예수님이 피 흘린 것,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가 아닌 우리가 구원받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서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는 건 생각 안하고 지가 예수 되려고 하고, 지가 예수 비스무리하게 되려고 지가 예수 노릇하려고 하고 지가 선지자 노릇하려고하니 그건 전혀 아니죠. 그건 자기 가치를 더 높이려고 하는 하나의 수완의 수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흔히 도 닦는다 하는데 도 닦지 말고 집에서 설거지 하세요. 자기 좀 닦지 말고.
그래서 선지자의 가는 길이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길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가는 그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선지자가 듣는 소리는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니가 뭐고? 니가 뭐야?’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장차 예수님도 똑같이 듣습니다. ‘예수 니가 뭔데? 인간은 똑같은데 니가 뭐 특출한 인간이라고 니가 메시야고,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이래 주장하고 어떻게 그렇게 나올 수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마치 불경을 놓고 도 닦듯이 자기의 가치와 자기의 발전성을 도모하지 마시고요, 나를 구원하시는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이런 쪽으로 보시면 그건 100% 맞는 이야깁니다. 그게 바로 옳은 거예요.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알면 비로소 내가 죄인 되지, 내가 잘못한 것, 내가 양심껏 연구한다고 내가 죄인 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죄를 반성하는 것은 잘난 사람 되니까, 그런 오류를 범하지 마세요. ‘나 같은 인간이 죄를 알다니, 나 훌륭해,’ 이런 쪽으로 자꾸 장난치지 마세요.
예수님을 알고 십자가를 알면 지가 죄인인데 지 잘못한 것만 골라서 죄인 됐다고 뭐 회개해봐야 그건 장난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젠 안속아 넘어가죠. 제발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나는 부족합니다.’ 이렇게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니 원래 부족해,’ 제발 그런데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아모스 나오는데 요엘은 뭐고 아모스는 뭐고 호세아는 뭐고 다니엘은 뭐고, 왜 이렇게 등장인물이 왜 이리 많아서 성경 보는데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 사람들 성경도 못 보게 어렵다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이렇게 다양하게 선지자가 주어지는 것은 그 죄도 예수님을 향하여 발달하게 돼 있어요. 예수님 십자가 지시는 것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면 충분히 발굴해 낼 수 있는 죄가 항상 이렇게 그것도 숙성돼야 되는 겁니다. 죄도 이렇게 교묘하게 커져야 돼요.
그러면 죄를 키우려면 어떻게 되는가, 아! 요거 잘 안 가르쳐 주는 건데,ㅎ 죄를 키우려면 우리가 지난 죄에 대해서 반성하면 됩니다. 고게 바로 크게 키우는 죄가 돼요. 죄 아는 것 어렵지 않아요.ㅎ 어렵지 않습니다. 지난 지은 죄가 죄라고 알고 다시는 안 그래야지, 그러면 그게 커지는 죕니다. 그거 종기 벌겋게 돼 있어요. 종기 만지면 벌겋게 되죠. 커진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짓 했어요.
그렇다면 죄를 놔둘 수도 없고 반성할 수도 없고 그럼 어떻게 하는가, 죄는 키워야 됩니다. 죄를 키워서 나중에 마그마 폭발하듯이 화산처럼 폭발해버려야 됩니다.ㅎ 죄가 안 크면 죄 지은 것만 죄고 다른 것은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영역을 따로 마련해요. 그러면 죄를 키우게 되면 키운 죄가 점점 더 번져서 온 천지에 죄 아닌 게 없게 돼 있어요.
울산에 어떤 집사님께서 수술을 하셨는데 쓸개를 잘라냈답니다. 현대 다니시는데 얼마나 직장생활에 스트레스 받았으면 쓸개를 잘라냈어요. 그래서 그걸 예화로 어제 강의를 했습니다. 쓸개를 잘라내더라도 나머지 몸으로 천국 가는 게 낫다. 쓸개를 잘라내면 되는데 그 다음에 쓸개 말고 딴 몸도 죄 지으면 그것도 잘라내야 되고 이것도 잘라내야 되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이유가 잘라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내가 결정해서 요거만 잘라내면 나머지는 건전합니다. 고런 식으로 자꾸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모스나 요엘, 이렇게 선지자가 자꾸 등장하는 것은 전번에 선지자가 잔소리 했더니만 그 잔소리 듣고 그거 고쳤다고 우길 때 그것만 고쳤지 나머지는 안 고치는 그 대목이 이미 죄가 번져 보세요. 고걸 다루기 위해서 후차적으로 다른 선지자가 또 등장하는 겁니다. 그럼 그 선지자 시키는 대로 하자, 그 시키는 대로 하면 또 그게 죄가 돼요.
구태여 예를 들면 이사야에 보면 ‘너희들이 안식일 날 금식하고 구제해야 안식일이지, 안식일 날 먹고 마시면 안식일이냐,’라고 돼 있다고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안식일 날 구제하고 안식일 날 금식하자.’라는 식으로 나온 겁니다. 고게 죄예요. 죄 어렵지 않아요. 고게 죄예요. 말씀대로 지키면 고것으로 구원되는 줄 아는 고게 죄에요. 그것이 바로 지붕을 뚫고 계시를 받은 예수님의 최종적인 하나님의 뜻을 모독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예수님 앞에 서서 우리는 충분히 모독 받아도 괜찮은 존재다. 그걸 알 때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모든 스트레스는 다 날아갔어요. 오전에 이야기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났는데 무슨 새삼스럽게 죄인 것과 죄 아닌 것을 어떻게 그걸 구분합니까? 그건 말이 안 되죠. 처음부터 그랬는데요.
그래서 자기 인생을 너무 다듬어 나가지 않도록 그러한 힘든 수고를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봅니다. 선지자는 인간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럼 어떻게 오는가, 지진 전 이년에 아모스는 오셔서 하는 말이 2절에 보면,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벌써 낌새가 안 좋죠? 초장이 바짝 말라 버린다.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시되 주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주님께서 부르짖었다 이 말이죠.
부르짖었다는 것을 우연히 쓴 것이 아니고 아모스 3장에 보면 어떻게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서야 젊은 사자가 부르짖지 않겠느냐, 부르짖는다는 말은 화가 잔뜩 났다 이 말이거든요 부르짖는다는 말은 너 혼나게 한번 당해봐라. 이 뜻이다 말이죠. 이미 아모스 선지자 속에는 하나님의 부르짖는 분노가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분노가 가득 차 있고 초장이 바짝 말랐다는 말은, 이 초장이라는 것은 우리가 유일하게 삶을 기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 생존을 이야기해요. 생존의 환경, 초장에 풀이 있어야 사는데 그것마저 바짝 말라버리면 우린 무슨 수로 삽니까? 선지자 하는 말이 ‘니는 살지 마라. 그러니까 니는 살 가치도 없다.’ 이 말 이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하아! 내가 더 살아도 이만큼 살고 제대해도 괜찮구나, 더 살아도 별 볼일 없는 존재구나.’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앞으로 앞장 세워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괜히 우리의 존재의 무게를 너무 70키로, 80키로 너무 무겁게 하지 마세요. 솜털처럼 휙, 휙 불면 날리는 하얀 깃털처럼 자기 인생에서 이제 손 좀 놔 주세요. 이제 그만 닦달내시고 그만 본인이 본인을 그만 괴롭히세요. 눈만 뜨면 괴롭혀요. 얼마나 괴롭히는지, 잘했니, 못 했니, 못 했니, 잘했니, 심판 주가 같잖아서 웃습니다.
니가 문제내고 니가 답 다 해먹어라. 니가 북 치고 장구치고 너 혼자 다해, 무슨 완벽한 삶이 있습니까? 무슨 성도의 삶이 있습니까? 무슨 성도의 삶이란 게 뭐예요? 죄지, 죄인밖에 없는데 무슨 성도의 삶입니까? 제발 성도의 삶이라는 그러한 압박감을 느끼지 마세요. 그만큼 고생했으면 됐습니다. 그만큼 평생 동안 시달리고 고생했는데 이제 남은여생만큼은 좀 편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편하게 살려면 늘 예수님 앞에 십자가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구원을 해주면 구원되고 안 되면 그만이고 제발 우리가 자신을 너무 차갑게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지 맙시다. 스트레스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지자가 보여준 것은 뭐냐, 요한계시록 16장 6절을 제가 읽어드릴게요. 왜 요한계시록을 들추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은 결론부분입니다. 구약은 아직 결론은 도달 안 했거든요. 결론부분부터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여기 ‘피’라는 단어 하나 나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선지자라 하는 것은 그 안에 피가 담겨있고 그 피가 하나님의 계시인데 선지자가 피를 흘림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이 그 선지자를 통해서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다는 거예요. 물론 선지자도 포함되고 신약에선 성도가 선지자죠. 이렇게 피를 흘리게 됩니다.
이렇게 피를 흘리는 이유는 결국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 하시면서 ‘피’라는 것을 가지고 보여준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질문 자체를 바꾸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이렇게 질문하지 마시고 ‘누구야? 누가 예수님을 죽였어?’라고 환경까지 더불어서 합쳐서 질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질문자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대, 그런데 나와는 상관없대,’ 이러지 마시고 ‘예수님이 죽었대? 누가 죽였는데? 왜, 뭣 때문에. 무슨 이유로 왜 죽으셨는데?’ 이렇게 내가 속해있는 환경과 더불어서 같이 묻혀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시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계시를 바로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말을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주일학교 설교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까지 과정을 제가 설명했는데요.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오셔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 비둘기파는 사람들, 뒤엎어 버리고 그 다음에 제자들을 만나서 물로 발 씻어주시고 그 다음에 떡을 떼면서 ‘내 살이다.’ 잔을 나누시면서 ‘내 피다.’ 가룟 유다에게 ‘ 니 할 일 해야지,’ 그리고 난 뒤에 겟세마네 가서 혼자서 기도하고 제자들은 주무시고 계시고 그런 내용이고 마지막은 십자가 가시는 길이 됐다 말이죠.
그걸 제가 설교하면서 느낀 점이 뭐냐 하면 크게 느낀 게 있어요. 예수님은 누구한테 포섭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교회 목회, 목회자한테 포섭이 안 돼요. 이게 뭐냐 하면, 홀로 자기 할 일을 홀로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 우리와 함께 동업 합시다.‘ 나오면 안 돼요. 이렇게 질문을 해야 돼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면 빠져나가는 길입니까?‘ 그걸 우리가 예수님한테 물어야 된다 이 말이죠.
한번 정리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 예수님,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빠져나갔습니까? 예수님은 어느 길로 갔어요? 예수님, 가신 길을 봅시다. 어느 길로 갔어요?’ 이렇게 질문을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예수님처럼 홀로 가는 사람 이예요. ‘무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했잖아요. 이게 불교에 나온 말인데 무수의 뿔로 홀로 가라는 말이 나와 있어요. 그냥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포섭이 안 된다는 거예요. 도움을 안 해요. 그냥 길의 흔적만 쫙 깔아놓고 길만 파헤치면서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고 영생의 길이고 그 길로 죽 가버렸다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뭐냐 하면 ‘야! 예수님은 좋은 분이다. 같이 동업하고 같이 협조하면 뭔가 거창하게 이 땅에서 성과를 이루겠다.’ 하는 그러한 꿍꿍이가 진짜 주님 앞에서는 주님의 발목도 못 잡는 그러한 질문들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예수님께서 떡을 떼서 오천 명을 먹일 때 그건 흔적이고 빠져나오는 길인데 사람들은 떡을 주니까 좋다고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주님께서 말씀 하신 것은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인간들아. 뭔 떡이 영생이고? 내 살과 내 피를 마셔야 영생이지,’ 하고 하는 이야기가 그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내 발목 잡지 마라.’ 말이죠. 내가 너희들 세계에 협조 안 한다 이 말입니다. 너희들 세계를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로 주님하고 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뭔가 좋은 것만 있으면 붙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는 그 전의 요한복음 2장과 연관돼 있어요. 요한복음 2장에 유명한 말씀 나오는데 가나안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포도주를 넉넉하게 제공한 것이 아니고 포도주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인간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예수님 엄마 마리아에게,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신경과 관심사는 딴 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 예수여,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관심사가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현재 있는 줄 창 죽치고 앉아있는 자기 세계에 있는 거예요. 주께서는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여자여,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왜 나와 상관없는 질문들을 해대십니까? 하는 거예요.
그 포도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 말씀 드리고 그 이야기 할게요. 마태복음 1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 하셨어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광야에 왜 나갔느냐, 뭘 보려고 나갔느냐, 대통령? 그는 청와대에 있고, 뭐 부자? 부자는 재벌 집에 있고, 뭣 때문에 광야에 나갔느냐,’ 그걸 물어요. ‘선지자입니다.’ ‘옳지. 선지자지.’ 선지자를 볼 때는 마치 뭐 같은가 하면 갈대 같아요. 사람들한테는 인기 없어요. 인기 있으면 이 땅에서 죽치고 살죠. 빠져나올 입장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싫다고 빠져나올, 이 세상이 죄 많다고 빠져나올 입장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지성과 이 세상의 안목 가지고는 별 인기를 얻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광야에 나가서 선지자를 만나는 사람은 이 세상에 같이 동업하자는 사고방식은 때려치우고 ‘선지자처럼, 갈대처럼 살련다.’라고 할 사람만 선지자에게 나오란 말이죠. ‘그래, 그렇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들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입니다.‘ ’그렇다, 선지자 보러 나왔지.‘
그래서 선지자는 항상 외곽에, 아웃사이드, 뭔가 세상의 주위에서 벗어난 외곽에서 ‘와, 뭐하나, 빨리 나와.’라고 호출하는 그러한 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 드리느냐 하면 저는 목사 입장에서 현재 젊은 목사들이나 신학생들, 그런 사람들이 왜 신학교에 갔습니까? 뭐를 보려고 신학교에 갔습니까? 선지자요? 그들은 선지자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화려하게 큰 예배당을 운영하는 그런 사업가, 현대판 선지자예요. 큰 교회를 현대판 선지자로 선택하고 있고 그 후배들, 신학교에 있는 후배들도 뭐가 부러우냐 하면, 바로 왕궁에 살듯이 부드러운 옷을 입은 그런 사람을 현대판 선지자로 내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뭐가 없느냐 하면 피가 없다니까요. 피가!! 피라는 것은 어떤 피냐 하면 기존의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죄악과 저주받을 짓이라고 통보해 주면서 쏟아져 나온 게 피거든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게.
그럼 포도주 이야기 봅시다. 지금 예수님께서 ‘여자여, 그 포도주 떨어진 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지금 당신은 나에 대해서 오해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여, 포도주가 없다.’ 그 질문 자체가 이미 나에 대한 오해다 이 말이죠. 내가 존재하는 이유, 이 땅에 오신 이유,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큰 교회 가짜 선지자들, 사단의 일꾼들이 뭘 붙들고 예수라 부르면서 철야기도 하겠습니까? 그들의 결핍된 것, 그들의 모자란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달라고, 그것을 마저 채워달라고 기도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런 걸 원하니까 목사가 장사하려고 그런 짓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놓고 ‘물을 길러오너라’ 했어요. 그냥 포도주를 그냥 줘도 되거든요. 결과적으로. ‘포도주 없어요? 당신은 지금 날 우습게봅니다. 하지만 뭐 철이 없어서 그러니까 내가 봐 주고. 일단은 포도주 필요하니까 포도주 줄게. 포도주,’ ‘포도주 있습니다.’ 이러면 되는데 뭘 하느냐 하면, 포도주 주시는 게 아니고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웁니다. 그게 끝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기껏 그거밖에 안 돼요.
인간은 Water, 인간은 물입니다. 백번 깨나도 물입니다. 물이 포도주 될 리가 없어요. 불쌍한 인간들, 포도주 되지도 못하면서 되려고 기도하는 사람들, 가관입니다. 안 됩니다. 물입니다. 물에는 예수님의 행하심이 섞여야 포도주가 돼요. 이게 어떻게 예수님 맘대로 되지, 우리 맘대로 됩니까?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섞여야 돼요. 그러면 그 자가 성도요,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섞이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셨던 피를 흘리게 만든 환경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덮쳐집니다.
예수님을 괴롭히고 예수님을 압박하고 예수님을 이해 못하고 예수님을 오해했고 예수님을 구박했던 그 동일한 환경에 성도가 놓여 질 때 성도는 소량의 압박감과 핍박을 받게 돼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껏 살아야 구원된다. 성도의 삶으로 살아야 구원된다. 지가 늘 자기 반성하면서 살아야 성도답다. 나쁜 일은 버리고 착한 일을 할 때 그 반복된 학습이 착한 사람을 더 착하게 만든다.’ 온갖 소리를 해가면서 도 닦는 수련을 닦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거는 피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율법밖에 모르는 그런 판국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못 버려요. ‘나는 착하다. 나는 착하다. 내가 포기할 게 아니지, 나는 착하다. 착해질 수 있어.그래 나는 할 수 있어. 술 끊을 수 있어. 담배 끊을 수 있어.’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무리입니다. 백날 해도 무리입니다.ㅎ무리인데 좀 지저분한 무리예요.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물이 현장에서 포도주로 바뀌었으면 포도주로 마감이 돼야 되는데 내가 온 것은 이게 마감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이 포도주로 됐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 이 시점이 내 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최종적인 그 상황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 때는 아직 남아있다.’ 그럼 물이 포도주 된 것은 때가 아니고 그 때를 앞서 보여주는 표적이다. 사인이다. 바로 우리가 성도가 천국이 있고 예수 피로 구원받는 하나의 사인으로서 존재하는 성도요,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바로 아모스가 그 시대의 죄를 위하여 핍박받는 죽음을 당하는 하나의 사인으로서 존재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이미 다 이루어진 십자가 바라보면서 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는데,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는데 왜 자꾸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억압하고 닦달내고 따지고 나무라고 잔소리하는지, 이 물 같은 속성 속에 피가 섞여서 포도주가 되어서 예수님의 피만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아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아모스 2:1-3 / 모압 족속의 죄 (0) | 2011.12.04 |
|---|---|
| 아모스 1:9-15 / 두로, 에돔, 암몬 나라의 죄 (0) | 2011.11.27 |
| 아모스 1:6-8 / 블레셋 나라의 죄 (0) | 2011.11.20 |
| 아모스 1:3-5 / 서너 가지의 죄 (0) | 2011.11.13 |
| 2008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4강 (0) | 2010.12.3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