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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0 07:55:16 녹취 : 오용익
(2008년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강의 : 이 근호 목사)
제 4강, 아모스
아모스 3장 4-8절까지 보겠습니다.
아모스 3: 4- 8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어찌 재앙이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알고 그 말씀의 선지자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그 말씀 그대로 이 지상에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먼저 이야기 하고, 알려주고 그것을 그대로 밀어붙이죠.
즉 밀어붙이면 그것이 인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아모스와 호세아의 차이점이 뭡니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호세아는 약속의 층과 생계의 층이 수직으로 나누어졌다면, 아모스는 약속의 층이 생계의 층으로 나와서 수평으로 진행하는 이것을 펼친 것이 아모스입니다. 간단하지요?
호세아는 수직으로 되어 있어서 위는 사랑이요 아래는 사랑받는 사람이라면 아모스는 사랑이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내포되어서 강물 흐르듯이 같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커피에 프림을 타서 흔들면 커피에 프림이 퍼지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이속에 퍼져서 나오는 것, 이것이 아모스입니다.
아모스 끝에 가면 그동안 품었던 사랑 층이 따로 분류되고 사랑을 거부하는 자, 저주받는자가 따로 분류가 돼요. 호세아는 위에서 내려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아모스는 하나님의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것을 하나님의 공의, 정의로움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모스는 1장부터 ‘사랑이 없는 자는 결국 망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모스의 흐름입니다. 호세아는 ‘범죄 했지만 사랑한다’는 것이고 아모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을 경우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거기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지금부터 무서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무서운 이야기가 불신자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모스 5장 21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아모스 5:21-23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령강림절, 크리스마스등 이런 절기를 너희들이 백날 지키고 드려봐야 내가 미워한다. 그게 사랑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너희가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이 안 받겠다는데 아무리 제사 드리고 주일 지켜도 하나님이 안 받겠다는 거예요.
자꾸 성의를 바친다고 우기는데 정성을 다한다고 해서 받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그것을 몰라요. 옛날 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라,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하면서 하늘도 감동하는 신을 찾아가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에 감동을 안 먹습니다. 거기에 드럼치면서 찬양집회까지 하는데 참 골치 아파요.
여기보면 23절에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기타치고 드럼치고 찬양집회해도 하나님이 안 듣는다는 거예요. 호세아도 그렇고 아모스도 그렇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선지자말은 안 듣고 자기 마음에 당기는 대로 자기기분의 종교적인 흥분, 감정, 감격 여기에 도취되어 있어요.
사람들 우르르 모여서 박수치면 흥분하기 마련입니다. 마약이 따로 없어요. 그런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마약입니다. 이것은 종교집회뿐이 아니라 다른 집회에 기도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서 군중심리로 빠져버리면 다 도취됩니다. 자기들끼리 즐기고 놀면서 선지자의 말은 들을 생각을 안 해요.
아모스 8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아모스 8:11 “주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생각은 안하고 교회 만들어서 저희들 기분 내는데 몰두해요. 유명하다는 목사, 스포츠스타, 가수, 개그맨, 영화배우, 탤런트, 연예인들 불러서 온통 간증집회하고 찬양집회 엽니다. 사람들 불러 모으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합니다. 마빡이가 전국 교회 돌아다니면서 집회하고 돈은 돈대로 울거먹고.
선지자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안하고 그저 사람 끌어 모아서 기분 내는데 주께서 받으시고 영광 받으신다는 거예요.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거 안 받습니다. 그냥 저희들끼리 노닥거리고 즐기는 거예요. 아모스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아모스 4장 10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아모스 4:11 “내가 너희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조각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게 선지자의 말씀이거든요. 사람이 자기 좋다 하는 이야기는 듣지만 무너뜨린다는 말은 안 듣습니다. 그리고 아모스 5장 18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아모스 5:18-19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주님 재림한다, 강림한다면서 휴거 어쩌고 하면서 좋아하고 기다리고 난리를 피워요. 하지만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났구나’ 7월달 토정비결, ‘네가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났구나.’
‘하나님께서 오시면 갚아주리라?’ ‘갚기는커녕 오히려 네가 당한다’는 거예요. 만 날 자기가 규칙적으로 정기적으로 형식적으로 예배하고 찬양집회참석하고 성경 옆에 끼고 백날 교회 다녀도 정작 관심 있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잘될까? 내가 생존 층에서 남보다 더 잘되고 뛰어나고 …’, 그것만 생각하니까 선지자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양식이 없어 배고픔이 아닙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기근이 아닙니다. 성경말씀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를 않습니다. ‘목사님, 왜 안 듣습니까?’ 안들을 수밖에 없지요. 선지자는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선지자의 말은 끝자락에 서서 쏴대기 때문에 중간고사, 학기초시험 같은 것도 없어요.
기말시험밖에 없어요. 항상 선지자의 말은 ‘마지막시험에 너 합격할래?’입니다. 이번 가을에 세례식을 하려고 하는데, 물론 통과해야 세례 주겠지만 제가 게시판에 20문제를 내겠습니다. 세례 안 받으신 분들은 그 문제를 풀 때, 이거 미리 정답을 알려주면 안 되는데…, 문제 풀 때 성경 구절을 다 알려줬어요.
문제 풀 때 성경구절을 그대로 말한다고 해서 정답이 아니고, 선지자가 끝에 서 있다면 선지자가 서 있는 이 끝에 서서 선지자의 안목으로 자기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는 눈, 이래야 세례 받아요. 로마서 6장에 보면 세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끝에 서서 나 자신을 바라볼 때 무엇이 진정 중요한 것이고 무엇이 안중요한 것인가를 구분하는 눈이 있어야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7살까지 살았다, 18년 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열일곱 살 살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베푸는 목사 입장에서는 ‘너는 50세 되어서 받아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열일곱에 죽어도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 아닙니까? 그러면 낙원에 가려면 목사 말을 듣지 말고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됩니다. 목사, 저도 생존 층에서 해매고 있는 인간인데 들을게 있어야죠.
선지자는 세상의 끝자락에 서서 세상을 거꾸로 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말 선지자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선지자가 그냥 미워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아모스 3장 6절을 봅시다.
아모스 3: 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사람들에게 밉상 밉상을 받는 선지자가 나팔을 부는 거예요. ‘빰빠밤빰…♬’ ‘저 영감쟁이 또 미쳤다. 또 나팔 분다.’ 나팔을 불고 난 뒤에 ‘들으라.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 말을 들어야 된다. 내 말이 그냥 나의 혼자 말이 아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다.’ 사람들이 이것을 신고하니까 그 당시의 선지자들, 오늘날 같으면 목사들이 왔어요.
선지자들이 하는 소리가 ‘아모스야, 너 어느 신학교 나왔느냐? 어느 신학교 나와서 어느 노회에서 안수 받고 목사 되었느냐?’ 1) 총신 2) 장신 3) 감신 4) 기장. 이렇게 따지니까 아모스에 보면 7장 14절에 ‘나는 선지자 아니며 선지자 아들도 아니다. 나는 뽕나무, 그러니까 오미자죠, 오미자 배양하는 농사꾼이고 양치는 목동이다’라고 한 거예요.
아모스 7:14-15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마지막 때에는 목사들이 입을 다뭅니다. 목사들도 생계가 있기 때문에 먹고 살아야 되니까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 돼요. 약속의 층 이야기를 하지를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저히 참다 참다 못해서 일반교인들을 통해서 그야말로 신학교도 안 나온 사람들을 통해서 울분에 차서 ‘이것은 아닌데 이건 아니야. 형식적인 예배, 형식적인 심방, 형식적인 기도, 헌금, 예배당 짓고 사람들 많이 불러 모으는 것, 이거 아닌데, 이런 노닥거림 이것은 아닌데, 말씀이 없는 곳이 교회가 아닌데…’라고 외치게 한 사람들이 있어요.
있는데 그런데 주의할 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외쳤더니만 또 인기 얻어서 목사 되고 총회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선명이나 박태선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게 아니고 선지자는 일회용입니다. ‘나는 주의 종이고 주의 말씀을 전했다. 나를 대우해달라’는 그런 것은 없어요.
말씀전하면 그것으로 되었지 말씀전한 대가, ‘나는 기존 목사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에 대우를 받아야겠다’는 그것은 또 살짝 맛이 갔어요.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 분은 이 근호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지신 분에게만 공로가 돌아가야 됩니다. 십자가를 증거 한다고 해서 대우받을 그런 권한도 자격도 없습니다.
아모스가 다급한 거예요. 제가 어떤 강의 중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선지자의 모든 말을 세글자로 줄이면 ‘불이야!’라는 겁니다.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있는데 불나버리면 옷을 제대로 입을 겨를도 없지요. ‘불이야!’ 하니까 그 소리는 안 듣고 ‘너, 어느 소방서 출신이야? 너 장신이야, 총신이야? 네가 어느 소방서 출신인데 함부로 불이야, 그 소리를 네가 해? 너 어느 소방서 관할이야? 계급은 뭐야?’ 이걸 묻고 있어요.
지금 ‘불이야!’ 하고 벌거벗고 나왔는데 이 다급함은 모르고 ‘너, 어디 출신이야?’ 이런 것을 따지고 있어요. ‘너만 주의 종이야?’ 참 내가 기가 찹니다. ‘불이야!’ 하고 있는데, 목사는 교회를 자기사유화, 자기 것 만들어서 ‘너희들 다 나가라. 나는 안 나간다’는 식이고 전부 다 생존 층, 생계 층, 밑에 있는 여기가 전부인줄 알고 있어요.
위에서 약속이 내려올 때는 어떻게 내려옵니까? ‘불이야’ 하고 내려오는 거예요. 불이 내려오니까 도망가자는 말이 아니고 ‘아, 주여, 약속대로 되네요. 이제 불인가? 진작 불 내려서 확 쓸어버리지. 예수도 안 믿는 인간들 확 쓸어버릴 것이지.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예수 안 믿는 인간들 때문에 고생했다고. 어디가나 담배연기 아무데서나 내품으면서 사는 인간들, 제발 담배연기 없는 그 천국, 술 냄새 안 풍기는 그 천국. 새벽 세시 네 시 까지 동창회 한다면서 술 먹고 고함지르고 돌아다니는 그런 인간 없는 나라, 그런 좋은 나라’가 그리운 거예요.
전부 다 생존 층, 생존의 나라. 다시 정리해 봅시다. 생존 층은 생존이 된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생존이 되면 유명해지려고 합니다. 유명해진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런데 유명해지고 나면 남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지배하려들면 억울해서 남을 또 보복하려 들고 이게 바로 정치 아닙니까?
정치를 가지고 비트켄슈타인이 유명한 말을 했는데 ‘정치는 하나의 게임이다’라고 했어요. 축구에 대해서 아예 모르는, 본적도 없는 강원도 산골의 할머니가 베이징에서 공하나 가지고 22명이 땀 뻘뻘 흘리면서 서로 그 공 하나를 쫒아 다니는 축구대회를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아이고, 공을 그렇게 차고 싶으냐? 내가 공 22개 사 줄 테니 마음껏 갖고 놀아라’ 할 거예요.
문제는 축구가 공을 차는 재미가 아니고 상대방을 조지는 재미라니까요. 사람 사는 재미가 뱃속에 음식 좀 들어간다고, 사료로써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나 돼지는 사료로 만족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만족하는 것이 아니에요. ‘너 잘한다. 진짜 잘 한다.’ 이런 우대해주는 맛, 이런 보람으로 살아요. 사람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사람들에게 인기 얻는 것, 교회 나와서 목사님 장로님으로부터 ‘오냐, 오냐’하는 그 재미로 나오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세상에 나가서는 하나님 백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고 싶은 지배욕을 적용을 시키죠. ‘승진하고 싶다. 높아지고 싶다.’ 그 당시에 이런 입장의 사람들을 호응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 당시의 목사들이죠. 목사들이 이런 형식을 갖춰놓고 ‘이 형식 따라 오시면 여러분은 구원 받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주님오실 때 주님 강림하실 때 천국 갑니다.’ 이렇게 사기를 친 거예요. ‘불이야!’ 해야 될 텐데…. ‘목사님, 불이야, 그것도 한 두 번이지 그것도 늘 상 하면 사람들 교회 안 나옵니다.’
자 그렇다면 ‘불이야’ 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아모스가 형식을 모르고 절기를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불이야’ 했던 이유를 아모스 5장에서 봅시다. 아모스 5장 24절입니다. 참, 이것은 유명한 말입니다.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
찬양집회고 뭐건 간에 ‘흘릴찌로다.’ 지금 무엇을 거부하느냐? 미리 말씀드릴게요. ‘불이야’ 하는 선지자가 무엇을 거부하느냐? 고정성을 거부해요. ‘이만하면 되었다’는 고정성을 거부하고 흐르는 ‘유동성’으로 바꿔버리자는 겁니다. ‘나는 이제 목사 되었으니 신앙생활 더 할 것 없지 뭐.’ 이러면 고정성이 되어버려요.
주님께서 목사 같은 것을 안 보는데 유동성을 보는데 ‘하나님, 저 목사 되어서 고정된 직분이 있습니다’ 하고 있어요. ‘누가 언제 너보고 목사 되어서 고정된 직분 내놓으라고 하더냐? 네가 지금 어디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느냐, 그 방향성을 내 놓아라’ 이 말입니다. 제가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의 매개체, 운반체입니다.
우리는 컵입니다. 우리가 우리 것을 가지고 흘리면 안 됩니다. 잘 보세요. (물이 들어 있는 컵에서 없는 쪽 컵으로 죽 부어대는 퍼포먼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 ‘네 속에 있는 공의, 하나님의 사랑을 흘릴찌로다.’
“그러면 나는 뭡니까?” “너는 그릇이지 뭐.”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신학교 출신이 아닌 목동,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나는 목동이다’라는 것은 고정성이거든요. 여성 같으면 ‘나는 결혼했다’는 것, ‘나는 이런 직장 가졌다’는 것, 고정성입니다. ‘나는 결혼했으니까 천당 넣어주세요’라는 것은 없습니다. ‘애 둘 있으니까 천당 넣어주세요’ 그런 것은 없어요.
젊은 분들 애 낳고 애 키우게 되면 교회 나오기 힘든 것 이해합니다. 목사가 ‘이 교회 내 것이다’ 하는 그 고정성이나 평신도들이 자기 직장에 얽매여서 교회 못나오겠다는 식으로 얽매이는 그 고정성이나 똑같은 거예요. 뭔가 유동성이 있어야 됩니다. 흘러야 됩니다. 제가 직장을 그만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가라는 소리도 아닙니다.
고정성이란 범위를 더 넓혀 보면 철학적으로 소유성입니다. 내 것이 있어야 거기서 자아가 생깁니다. 내 것이 없으면 자아가 형성이 안 됩니다. 삐아제라는 심리학자가 ‘네 살 때부터 자아정체성을 유지해 줘야 그 애가 근대시민으로서 빨리 안정성을 유지할 수가 있다’고 했어요. 만약에 자아정체성이 없어 버리면 자폐증이 되어 버립니다.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 없으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현대의 모든 교육은 존 듀이의 사상을 따라서 ‘빨리 자립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립을 빨리 하면 그 애는 사회에서 성공하고 자립이 안 되고 의존심이 많으면 그 애는 지진아가 됩니다. 정체성이라고 할 때 그 인간의 내부를 채워야 되지 않습니까?
그 내부를 어디서 채우느냐 하면 부모와 학교, 훈육기관들, 교회, 이미 기존에 있는 이데올로기들이 들어오면서 선과 악이 형성이 됩니다. 선과 악이 형성되면서 선한 것은 칭찬받고 악한 것은 매 맞는다는 그런 인식을 부모, 학교, 교회 등을 통해서 배우는 거예요. 이거 인간 됩니까? 인간은 안돼요.
인간은 안 되는데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동물이고 사회적동물이기 때문에 사회라는 격자망에 들어가면 그 주위에 있는 a, b, c, d에서 요구하는 것이 있어요. 그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킬 때 그 사람은 사회인으로서 남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겁니다. 혼자 사는 것은 산속에 들어가서 살면 돼요. 혼자 산속에서 도 닦으면 돼요.
학교라는 데는 도 닦는 데가 아니고 남들이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질이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관계에서 묻는 거예요. 만약에 관계에서 끊어져 버리면 이것은 성인이라도 우울증에 걸립니다. 집구석에 너무 처박혀 있으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직장 없이 집에서 애만 키우는 주부의 25%-28%가 우울 증세를 보인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집에서 애만 키우는 젊은 새댁들 중에서 거의 1/4 정도가 우울 증세를 보인다는 겁니다.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왜 있는데?’ 특히 딸 같으면 모르는데 아들만 둘 키울 때, 이것은 기가 찰 노릇이거든요. 애들 둘이 자기를 다 파먹어요. 나라는 것이 없어요. 꿈도 없고 다 망가져 버렸어요.
옛날 어머니들은 그게 없는데 젊은 엄마들은 안 망가지겠다는 반발심이 강해서 어디가도 예민해져 있어요.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애들 키우면서 그 애가 자기 보람이기 때문에 애들 말고 다른 보람을 안 챙겼습니다. 그런데 요새 젊은 엄마들은 애는 애들대로 챙기면서 또 따로 자기를 챙기려고 하니까 뭔가는 허송세월 했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힘들더라도 직장가진 새댁들은 아주 잘하신 겁니다. 애가 너무 어릴 때는 곤란하지만 애들 약간 크거든. 돈이 목적이 아니고 자아를 찾아야지 안 그러면 힘듭니다. 옛날에는 관계의 망이 복잡하지 않았어요. 옛날에는 애를 둘 키우면 사회에서 존경해 줬습니다. 옛날 여자들은 애 젖먹일 때 가슴을 다 내놓고 먹였습니다.
옛날에는 애 낳고 키우는 것을 자랑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요새는 ‘애는 너만 키우나? 다 키운다.’ 이렇게 되거든요. 아이 키우는 것 가지고는 사회에서 인정을 못 받아요. 사람은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정신병 되어버립니다. 아이 키우는 것 말고 별도로 ‘나는 이정도 되는 여자입니다’라는 것을 따로 챙겨야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내가 키우는 자식이 공부 일등 했다’는 이런 것으로 우울증에 안 걸렸는데, ‘그것은 아이의 과외선생이 한 것이고 그것 말고 당신은 뭐냐?’라고 나올 때 내놓을 것이 없잖아요. ‘나는 애만 키웠는데’ 하면 ‘놀았구만’ 합니다. 그게 왜 논 겁니까? 애를 키웠는데. 더 나가면 능력 없는 여자로 몰릴 수가 있습니다. 억울하지요.
인간은 사회를 못 벗어납니다. 사랑은 뭐보다 크다? 죄보다 크지요? 구조는 나보다 큽니다. 나 혼자 아무리 잘난 척해도 그 사회가 인정 안 해주면 그것은 인간 값을 못합니다. 사람값을 못해요. 그래서 나라는 것은 옛날에는 어릴 때 고정이 된다고 했는데 지금은 고정이 안 됩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내용물을 다시 채워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사회를 사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구조, 시스템이 요구하는 내가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4년 전만 해도 KBS 사장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시민단체들의 희망이었던 사장이 정권이 바뀌고 난 뒤에는 천하에 죽일 놈처럼 되었잖아요.
고정성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소유죠.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보는 것. 주님께서는 ‘그 속에 있는 것을 흘려보내라’고 합니다. 언제? 늘,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한번 흘렸다고 해서 ‘나 잘했지요’ 하면 안 됩니다. 또 고정되니까. ‘계속해서 흘려보내라.’ 그럼 그 속에 있는 물은 어디서 제공하는가? 물은 말씀에서, 그 말씀의 깊이에서 계속 제공됩니다.
‘그러면 머리도 나쁘고 뇌세포도 점점 망가지는데 그 주신 말씀을 언제 다 외웁니까?’ 성경말씀은 외우는 것이 아니에요. 외우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비우면 되는 거예요. 이 성경 말씀은 지식하나 더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자기 마음 낮추기 하면 됩니다.
지식을 확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에스겔 다 뗐다. 아모스도 다 뗐다.’ 이게 아니고 ‘아하,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구조가 있었구나.’ 다른 구조, 약속의 층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우리가 되는 구나. 그래서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나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이 이루신 약속의 공로가 네 속에서 흘릴찌어다’입니다.
“아모스를 공부했다면서 강사가 아모스가 뭐래?” “아모스는, ‘우리는 하나의 그릇이고 선지자가 끝자락에 서서 보는 하나님의 그 흐르는 정의로움과 사랑을 우리를 하나의 운반체로 사용해서 우리 속에서 흘려 내리라’는 것이고 ‘그래야 마지막 캄캄한 때에 주의 사랑,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담겨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내용이 아모스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없다면? 없다면 고정성이죠. ‘나는 이것으로 버틴다.’ 흐르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형식화됩니다. 세례를 받았다. ‘세례 받았으니까 나는 구원받은 거지 뭐.’ 아니지요. 형식화에서 유동성으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뭔가 흘러서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 있어야죠.
어떻게 흘러나오는가?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으로 나와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하고 뭘 하더라도 ‘죄인이 헌금하고 있고 죄인이 찬양하고 있고 죄인이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항상 이것이 흘러 나와야 되지요. 이것이 천국의 구조지요. 그래서 천국에서 인정받아요.
그런데 생존 층, 이 사회구조는 그것이 아니에요. 사회에서도 이러면 안 됩니다. 어디 가서 ‘나는 부족합니다. 죄인입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사회에는 안 되더라도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코피 터지고 머리 다 빠지더라도 ‘다 할 수 있어.’ 사회는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되고 쓸모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하면 파일에서 삭제가 됩니다.
무서운 세계입니다. 이게 이용해 먹기인데요. 한때 잘했어도 그 다음에 나올 것이 없으면 ‘좀 나가 주셔야 되겠습니다’라는 이것이 사회입니다. 구조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건전지, 또는 소모품, 나사못 같은 것인데 그럴 수밖에 없어요. 축구 잘한다. 한 때입니다. 후배가 치고 올라오면 대표 팀에서 탈락됩니다.
사회는 목적이 있어요. 이유 없는 게임입니다.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만 남아요. 승자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살아남고 만약 그 조직과 사회가 패자가 되면 쫓겨나는 거예요. 사회를 좀 더 크게 그려 보겠습니다. 간단하면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알튀세르라는 철학자가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현대사회의 구조를 말하기 위해서 ‘심급’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심급이란 층인데 이 층들이 중층결정을 갖는다는 겁니다. 층들이 쌓인다는 거죠.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일식조리협회에 소속됩니다. 협회는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꿈틀거리면서 생명체처럼 움직입니다. 그 협회는 무조건 게임에서 이겨서 자꾸 커져야 됩니다.
그런데 그 일식조리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요리사가 안동김씨종친회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소속이 두 개 중층 되어 있는 거예요. 중층 되어 있는데 문제는 안동김씨 세력이 더 커져야 되지요. 이것도 커지고 이것도 커지고 그러면 두 세력이 충돌되겠지요. 학교, 감옥, 교회, 군대, 경찰, 병원 모든 것이 커지려고 하지요.
각자 각자의 지역이기주의, 이것이 중층으로 겹으로 쌓여서 이것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삼국지 같은 세력다툼입니다. 일본 사무라이들을 다룬 유명한 소설이 있죠. 야망, 딱 그겁니다. 잡아먹어야 살고 안 잡아먹으면 죽습니다. 중층이란 한쪽만 걸쳐 있지 않고 양다리, 세다리, 네다리 걸쳐 있다는 겁니다.
그냥 한 조직 같으면 ‘나는 여기에 속했다’ 이러면 수월한데, 이 격자망 속에 또 다른 색깔의 격자망이 또 있어요. 그 밑에 다른 색깔이 또 있어요. 보통일이 아닙니다. 직장 일 하려니까 집안일이 있고, 집안에 아버지가 아파서 누워 있는데 교회 수련회가 있고, 이렇게 겹쳐져 있어요.
몸은 하나인데 인정받아야 되는 일은 열 가지 스무 가지로 늘어납니다. 감당이 안 됩니다. 여기서 우선순위가 결정됩니다. 이것은 다 어디서 나오는가? 한마디로 무엇을 고수하기 때문에? 고정성, ‘이렇게 해야 나다’라는 고정성입니다. 여러분, 나는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나 같은 인간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물 흘려 내리듯이 운반하면 돼요.
그러면 이것을 포기할까요? 포기를 왜 하는데? 좋은 기회인데. 종친회에 가셔서 ‘인간들아, 이게 사는 게 아니다.’ 동창회에 나가면 술 먹고 땡깡 부리는 것 봤지요? 그게 사는 겁니까? 남에게 피해주면서. 어디를 가도, 학교에 가도 직장에 가도 ‘이게 전부가 아니다.’ 교장 되고 교감되어도, 교육감 되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교회 오면 ‘아이고, 인간아! 목사 되었다고 천당 보내주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항상 우리는 ‘마음을 비워서 주님의 사랑, 주님의 공의의 하나의 운반체로서 살라’는 이것이 성경을 보면서 받아들여야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자기가 승자로 남기 위해서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먹히느냐 먹느냐, 삼키느냐 삼킴을 당하느냐.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닌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내 중심으로 봤기에 그런 것이오니 이제는 주님께서 무엇을 하든지 주께서 쓰시는 종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