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히브리서 (3)] - 5,6,7,8,장
1998,6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사실 지금까지는 서론 격이었고, 이제는 본론으로 5장을 한번 살펴보자.
(히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히 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 5: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지금 대제사장의 직분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과거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는 대제사장이 있어서 제사를 드렸다고 전제를 하고 시작하는데, '그렇다면 그 대제사장은 얼마나 완벽한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 또 다른 완벽한 제사장 !!
* 여기에 대해서 '아니오' 라고 대답한다면, 그렇다면 완벽하지도 않은 자가 무슨 제사를 드리느냐는 것이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대제사장을 아무리 동원해서 제사를 드려도 그 제사장의 죄를 씻어주는 또 다른 대제사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진짜 대제사장은 따로 존재하는데, 인간은 아무리 자기가 깨끗하고 정결하다고 해도 자기 연약함에 싸여있다는 것이다. 부족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뽑았기에 맨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그래도 인간들 중에서는 거룩하다고 하는 아론과 그 일당들을(?) 제사장으로 세웠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마저도 누군가가 죽어야만 될 정도로 인간들을 죄인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4절 이하에 나온다는 것이다.
(히 5: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히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히 5: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여기서 이제 멜기세덱과 제사장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데, 그런데 11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멜기세덱에 관한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성경이 어렵다고 하는데 자꾸 쉽다고 말하면 안 되고 말이다.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 이제 히브리서 6장을 보자.
(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 무엇이 어려운가? - 내가 사는 것이 왜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인 것이 되는가?
* 여기 나오는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들은 사실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어려운 것은 6절에 나오는 '왜,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인 것이 되는가?' 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히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히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성경은 이렇게 인간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을 욕을 보였다고 하는데,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교회에 다닌 적도 없고 예수라는 이름은 더욱이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이 모슨 욕을 보였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다윗의 실수 - 바세바가 문제가 아니라, 아람군대와 자기를 동일시하지 않았다 !!
* 지난 주일 아침에 설교하기를, 여호와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아람군대를 쳐부수었는데, 그런데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이때 다윗이 무엇을 하는고 하니, 목욕하는 바세바를 보고서 음욕을 품었다는 것이다. 다윗은 아람군대가 2만 명 이상이나 죽어가니 그들이 죽는 것은 당연히 죽는 것으로 알았지, 그렇게 죽어 가는 아람군대의 병사와 자기를 일치시킬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다윗은 오직 목욕하는 여자에게 관심이 있었지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죽은 자의 부활도 알고 심판도 알지만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고 말이다. 그냥 자기에게 돌아올 그 혜택만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화살이 아람군대가 아니라 다윗에게로 날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 전쟁의 결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근호도 죽어야 하고 말이다. 설교시간에 이런 말을 하니, 교인들이 '아멘'을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스라엘 군대가 아람군대를 이기는 것은 당연하고, 즉, 아람군대의 군사들이 죽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죽는 것은 억울하다는 것인가? 불교신자는 제 아무리 죽어도 그것은 너무 당연하고, 내가 죽으면 안 되는가? 과연 그런가?
* 그러니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알고 심판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 왜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이는 것이 되는가?' 라는 것이다.
* 바로 이러한 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그 연관성이 너무나도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흔히들 '선택된 자가 타락하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라고 초보의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히브리서 6장에서는 그러한 초보운전의 위험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타락이란 과연 무엇인가?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라는 것에 대해 그 이유를 모를 때, 그것이 바로 타락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항상 초보운전이고 말이다. 아무리 전도를 잘하고 목회를 잘해도 말이다.
*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리고 그것을 내가 분명하게 믿어주는데, 그러나 그 고통은 주님이 가져가시고 자기는 영광만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해서는 박수를 쳐주겠다는 것이다.
◈ 히브리서의 목적 -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
*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러한 초보운전의 위험성을 알고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선택을 받아도 타락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택을 받으면 타락해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초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자동차를 샀는데 목사를 모시고 고사(?)를 드렸다고 하자. 목사가 거기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서 사고가 난다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게 기도해서 사고가 안 난다는 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마치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를 찍기 전에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데, 그런 식의 사고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그렇게 고사를 지낸다고 해서 영화가 잘된다는 뜻도 아니고, 더욱이 영화가 안 된다는 뜻도 아니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목사님, 성령의 은사를 받고 타락한 사람이 있습니까?' 혹은, '목사님, 그렇게 타락을 하면 구원을 못 받습니까?' 라는 질문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여전히 '초보운전' 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으니 말이다.
*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셨는데, 그런 사람은 성령이 임해서 반드시 구원을 받았다는데,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망해버리면, 이 히브리서 6장과 로마서 8장의 본문이 서로가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주로 신학생들이 이런 질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교를 졸업하면 이런 말씀에 대한 관심조차도 사라지지만 말이다.
◈ 공부도 할 일이 없어야 한다 !!
* 그런데 신학교를 다니면,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이런 생각을 가끔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공부도 안하고 매일같이 볼링 치고 당구 치고 영화나 보는 학생들은 이러한 말씀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졸업하고 은혜를 받아서 다시 새롭게 공부하는 사람들도 드물게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공부도 할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 일이 있으면 공부도 안 한다는 것이다. 아닌가?
◈ 초보의 특징 -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임을 모름 !!
* 그러니 초보수준이라는 것은 항상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받은 은혜나 생각하고 말이다. 기도원에서 병 고치고 방언 받은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목회성공에나 집착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을 주님께서 안다고 하시겠는가?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 대제사장 직분의 의미를 모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였다는 것을 모르면, 아무리 해도 초보로 끝났다는 것이다.
(히 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히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히 6: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 이 부분이 상당히 어려운데, 어떤 말씀을 지킬 때는 맹세와 더불어 말씀이 제공되어야 하는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런데 여기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맹세를 하려고 하면 맹세를 하는 대상이 더 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기에 아니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에게 약속하셨다 !!
* 그렇다면, 하나님보다 크신 분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에게 맹세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맹세는 맹세를 하시는 분이 반드시 실천을 한다는 것이다.
(히 6: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히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그러면, 여기 18절에서 이야기하는 두 가지는 무엇인가? 하나는 하나님께서 맹세를 하셨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사실 때문에 약속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보통 맹세를 하면서, 자기 손에 장을 지진다느니,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보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행에서 대출을 해줄 때 상대방의 말을 믿고서 신용으로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담보로 될만한 제 3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두고 '맹세'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하나님은 제 3의 것으로 무엇을 맹세하셨는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담보로 맹세를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맹세를 했는데, 그런데 맹세의 담보로 하나님의 아들을 방불케 하는 멜기세덱과 관련을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 무슨 말인고 하니까,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니 맹세도 아브라함에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히브리서 6장과 7장에 들어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보다 작은데 어떻게 맹세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를 멜기세덱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것이다.
* 이것이 매우 어렵고 중요한데, 히브리서 6장 6절에서, 초보의 특징은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을 보이는데, 그런데 7장 3절에서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것이다. 아니, 인간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데,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 욕을 보이느냐는 것이다. 대제사장 직분의 내막도 모르고 말이다.
◈ 약속은 인간에게 했지만,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차원이다 !!
*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그 맹세에 하나님의 아들도 개입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약속은 인간에게 했지만,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차원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성령을 받았다고 까부는 인간들은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하나님의 아들 차원에서,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셔서 성취되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오로지 아는 것이라고는 자기 받은 것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까불어댄다는 것이다.
◈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인 행위이다 !!
* 다시 반복하면, 여호와 전쟁에서 아람군대가 2만 명이나 전사를 했는데, 그런데 바보와 같은 다윗은 자기가 잘나서 그런 일이 났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아니라 '우리야' 라고 하는 용사 덕분에 이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다윗은 완전히 초보라는 것이다. 다윗은 별 생각 없이 우리야의 아내를 겁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였다는 것이다.
◈ 강간은 바로 살인죄이다 !!
* 사실 '강간' 이라고 하는 것은 강제로 삼킨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살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의 가치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자의 음욕이 얼마나 무서운가? 남자에게는 장난일지 몰라도 여자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 인류 최초의 범죄사건은 무엇인가? 살인이라는 것이다. 가인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라는 것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별개의 세계를 구축할 때 살인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가인이 이것을 그대로 벌을 받는데, 가인이 남의 동네에 가서 자기가 살인을 당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살인은 이러한 단절사건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저주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가고자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영원한 단절이라는 것이다.
* 다시 설명하면, 갑자기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멜기세덱이 등장하고 맹세가 등장하는 것은, 이 맹세를 이루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보다 더 크신 분이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님인데, 멜기세덱은 기껏해야 모양과 부분이고 말이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었다고 해서 이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멜기세덱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7장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바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의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 그렇다면 이 십분의 일은 무엇인가? 7장 4절에 보면, 자기가 전쟁에서 승리해서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말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 전쟁에서 자기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그것을 멜기세덱을 통해서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히 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 그런데 이 멜기세덱의 직분이 무엇인가? 놀랍게도 대제사장 직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부분이었고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 신약시대에 와서보니 예수님이 혈육에 속해서 마귀를 이기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멜기세덱이 칼싸움을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말이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 (tape 2 끝)
* 그러니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타락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영원한 초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초보운전은 전혀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속도로에서도 경제속도 70km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기준이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분만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분이 시속 100km이면 100km이고, 200km이면 200km라는 것이다. 바람처럼 말이다. 이것도 전혀 남을 고려하지 않는 과속인가??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해서도 그 약속(맹세)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자기 스스로 약속을 이행하신다는 것을 모르면, 제 아무리 성경을 많이 공부해도 초보운전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십일조 - 복의 계통도 !!
*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위에 있는 복을 아래로 내려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계통도가 바로 십일조라는 것이다.
* 그러니 지금 히브리서는 제사제도를 말했다가, 아브라함을 이야기했다가, 멜기세덱을 이야기하고, 이제는 십일조까지 언급함으로, 그야말로 구약성경을 완전히 가지고서 논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부분과 모양으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판단을 할 수 있는 단단한 음식을 먹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 히브리서 7장을 보기 전에 6장을 다시 한번 보자.
(히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 여기에 '보증'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보증은 아브라함 때에는 멜기세덱이었는데, 지금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피가 바로 인간들이 현저히 욕보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이렇게 연결해보니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6장만을 보면,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였냐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9장에 넘어가면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멜기세덱에게 말한 맹세를 이루기 위한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죄를 용서하는 방법은 이것만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다는 것이다.
(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히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 지금 말하고 있는 느낌이,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완전히 기피해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망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뒤따라가서 함께 죽고 살아서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 히브리서를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라는 것이다. 그 약속한 것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되든지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분과 함께 죽고 부활해서 그분의 나라에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 이것 말고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약속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것에다 기대를 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이는 짓이라는 것이다.
* 이 히브리서 설교를 수요일 저녁에 했는데, 그때 농사일로 지쳐서 교인들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래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여러분, 말씀을 본다는 것은 만사를 잊어버리는 것이고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이기에 제발 이 설교시간만큼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가 부탁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모내기 잘했습니까?' 라고 하면 안 되고 말이다.
* 이제 히브리서 7장을 보자.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 여기에 '복을 빌어준 자'가 나오는데, 정말 이 한마디에 '뽕!' 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고 하니, 복을 대신해서 빌어준 자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을 옛날 구약 때에는 십일조를 냄으로 증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일조의 계통도가 복의 내림과 받음의 계통도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부터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히 7: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의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여기 3절에,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는데, 그러니 이 멜기세덱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부분과 모양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멜기세덱은 정말 아버지가 없었습니까?' 라고 질문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지금 멜기세덱은 아버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론계통의 제사장직과 비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제사장들은 다 자기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제사장의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 !! - 기존의 제사장과는 전혀 다르다 !!
* 지금 말씀이 지붕에서 지붕으로 날아다니고 있는데, 그렇다면, 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이런 하늘에 속한 높은 제사장이 나와야 하는가? 이러한 높은 자가 있어야, 이 높은 자가 복을 빌어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히 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 지금까지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라고 하다가, 이제는 멜기세덱의, 즉, 예수님의 높음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면서, 그가 전쟁에서 승리해서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바친 것처럼, 이렇게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이미 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복을 달라고 해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자기 죄를 용서해줄 제사장을 이렇게 미리 마련해놓았음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의미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십일조를 해서 구원받는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히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을 가졌으나 (히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히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 레위지파는 자기 형제인 다른 12지파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고, 그리고 레위지파는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주고, 이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고 하니, 7절에 있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빌어줌을 받는다는 것이다.
(히 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 죽을 자들이 십일조를 받는다는 것은 레위지파가 다른 지파들로부터 십일조를 받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사실 모양과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은 십일조가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십일조를 누가 받는가? 목사인가?
* 사실 십일조는 누군가가 제대로 받아야 일관성이 있는데, 왜냐하면 십일조는 바치는 사람보다 받는 쪽에 훨씬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죽은 놈이 받아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뒤로 넘어가면서 계속해서 하는 말이, 염소나 양의 피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다. 지금 히브리서에서 십일조를 중요하게 다루자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십일조는 복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급했고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십일조를 받는 레위지파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멜기세덱이 복을 빌어주었으니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오면, 예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레위지파는 죽은 자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히 7: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히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 아브라함의 맹세는 아브라함이 이루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은 죽은 자이기에 말이다. 레위지파가 복을 빌어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께서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지파를 통해서 오셨다는 것은 사실 레위지파의 위치를 완전히 뭉개 버린다는 것이다.
* 레위지파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했지만, 그러나 이런 제사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다지파로 태어난 예수님께서 단번에 드리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만이 진정한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이러한 예수님의 제사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에, 지금 다시 제사와 십일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이는 행위라는 것이다.
* 과연 복은 누가 주는가? 목사인가?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오직 예수님만이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사실을 한국교회가 모른다는 것이다. 그 내막을 살펴보면, 한국교회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라는 학원을 운영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지금 한국교회는 오로지 인간들의 종교성에 빌어 붙어서, 그들을 위로하고 살살 달래주면서 그런 반대급부로 돈이나 벌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 되는 것은 성경에서 모조리 다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짓은 십일조를 욕보인다(?)는 것이다.
(히 7: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히 7:17)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 육체의 법이라는 것은 육체로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무궁한 생명의 능력은 인간의 육체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 그 자체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 단적으로 말해서, 멜기세덱을 아브라함이 키웠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더 높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보고 깜박 엎드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은 왜 예수님을 보고서도 이렇게 자빠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궁한 생명의 능력의 소유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 10분 휴식 !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이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소위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행위와 율법을 내세우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지금 히브리서는 이것을 계속해서 증명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히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 여기서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한다고 되어있는데, 원래 율법과 연관된 지파가 레위지파인데, 그러니 이 레위지파 말고 다른 유다지파를 통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은, 유다지파와 레위지파를 서로 비교해서 이 레위지파의 무용성(無用性)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메시야는 왜 레위지파가 아니고 유다지파인가?
(히 7: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히 7: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히 7: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히 7: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 유다지파는 한번도 제사장이 된 적이 없는데, 그런데 메시야가 유다지파로 오셨다는 것은 기존의 레위지파를 완전히 부수고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은 평소에 십일조를 받아 챙긴 사람들인데, 그런데 지금 레위지파가 아무 소용이 없는데 십일조는 무슨 십일조냐는 것이다. 십일조를 받을 사람이 있어야 주지 말이다.
* 여기서 십일조는 십분의 일의 헌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복의 계통도를 말하는 것인데, 십일조를 지금도 계속해서 받으려면 이 레위지파가 유효해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의 직분도 인간 제사장이 있어야 하고 말이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그런데 지금 히브리서는 이 레위지파와 인간 제사장을 둘 다 죽은 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죽은 놈들끼리 아무리 서로 주고받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직 산 분이 복을 빌어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 분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지닌 예수님이고, 이 분은 레위지파가 아니라 다른 유다지파를 통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히 7:20)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히 7: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한 맹세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즉, 레위지파는 맹세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하나님께서 맹세한 것이면 그 내용이 영원해야 하는데, 그런데 레위지파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한가? 그분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서 되었다는 것이다. 단번에 자기를 드리시고, 영원토록 변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그분만이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제사장 말이다.
* 여기서 우리가 히브리서 1장을 다시 한번 회상해보면, '너는 내 아들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잘되시는지? '아, 다윗언약에 의해서 진짜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밖에는 없구나!' 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모세의 율법이 분명히 있었는데, 왜 다윗언약이 필요했겠는가?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 종이란, 아들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분과 모양으로 !!
*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바로 '아들'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말이다. 그런데 모세는 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종이란, 아들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분과 모양으로 먼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도 이렇게 아들을 보다 잘 설명해주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성경은 영원하지도 않는 것들을 동원해서 영원한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적인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영원한 대제사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자기가 잘났다고 까불 수가 있겠는가?
◈ 히브리서 - 더 좋은 것이 있는데, 왜 나쁜 것을 붙드는가?
*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데, '더 좋은 것이 있는데, 왜 나쁜 것을 붙드는가?' 라는 것이다. 유치부도 다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 받고 구원도 받는데, 왜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바쳐서 복을 받으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 아니 왜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그렇게 주일을 강조하고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하는가? 예수님이 목회를 하신다고 해 보라. 과연 그렇게 하겠는가? 예수만을 잘 믿다가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고 하지 않겠는가? 사도들이 모두 다 그렇게 살지를 않았는가? 아니 교회도 아닌 학원에는 왜 가는가? 어디 재수할 일이 있는가?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기를 단번에 드리시고 영원불변하시기에 언약(맹세)의 보증이 되셨는데, 다른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히브리서가 얼마나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이 상세함으로 말미암아 더 안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말이다.
(히 7: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죽음' 이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라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에게 무궁의 생명의 능력이 있기에 말이다.
* 그리고 기존의 레위지파에 속한 제사장들이 계속 죽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한계가 있고 그들에게 뭔가 미흡함이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해서 예수님은 분명히 산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산 자가 복을 빌어준다는 것이다.
(히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히 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 자 그렇다면, 여기서 죽은 것과 산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히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이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 예수님이 유다지파로 오시면 다시는 다른 지파로는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옮겨졌듯이 그렇게 또 다른 므낫세나 시므온 지파 등으로는 이제 옮겨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원하시기에 말이다.
* 이러한 예수님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십일조니, 주일성수니,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디 모자라는 분이신가? 온전히 구원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 우리의 기도야 매일 허공을 가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아들이기에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기도덕분에 살아가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또 기도를 강조하고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물론 기도가 중요하지만, 그러나 이런 인간의 기도는 인간들의 자기 욕망이고 몸부림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기도하시고 구원하시는,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자는 것이다.
(히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 여기 하늘보다 높다고 하는데, 이렇게 대제사장을 항상 높다고 하는 이유는,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복을 빌어주어야 복이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번에' 자기를 드려서 이룬다고 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레위지파의 제사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히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 그래서 이제는 율법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율법 후에' 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온전한 아들이 모든 율법을 다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인 유대인들을 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셨던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 그래서 율법에 의해서 데리고 온 간음한 여인을 해방시켜주시는 것이다. 이 간음한 여인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누가 용서해주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인처럼 너희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뭐라고 했는가? 한 마디로 '미쳤구나' 라고 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아직도 '십일조'고 '주일성수'냐는 것이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안 믿는 것인지 말이다. 주일날 족구를 하는 자유로움을 질투해서 그런가?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못 한다는 것이다. 돈을 대어주는 장로(이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쫓겨나는 것이 두려워서 그렇다는 것이다.
* 이제 히브리서 8장을 보자.
(히 8: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 여기서 '중요한 것' 이라는 것은, 초보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초보라는 것은 지금 우리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아들을 왜 현저히 욕보이는 것인지를 그 이유는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그리고 그분이 하늘에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 그러면 땅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5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모형이라고 하면 애매 모호하지만, 그러나 그림자라는 말을 보면, '아하, 실체가 따로 있구나' 라고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림자는 '허구' 라는 것이다. 그늘이라서 쉬지 좋다는 뜻이 아니고 말이다.
* 그러니 우리가 분명히 이렇게 실체가 있는데, 모형과 그림자(허구)를 붙들고 있으면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1장에서는 부분과 모양이라고 했고 말이다.
(히 8:2)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히 8: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히 8: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는데,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땅의 성전이 박살났다는 것이다. 로마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림자와 실체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가 일부러 모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결국, 율법을 지키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
* 그런데도 우리가 왜 다시 모형과 그림자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체가 오셨는데 말이다. 그러니 결국, 율법을 지키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이고, 아들을 현저히 욕보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2절에 보면, 진짜 하늘에 있는 성소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이 땅의 모형인 성전이라고 해도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자연석으로 했다는 것이다. 즉, 성전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안식하시기 전에 모두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전개하는 과정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 모형과 그림자도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실체가 오기 이전의 일이고, 실체가 왔으면 이제는 허구임으로 부정당하고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가 장막을 지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것이 모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산에서 모세에게 모형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히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 8: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히 8:8)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 만약에 처음의 것이 모형이 아니고 실체였다면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었는데, 그러나 모형이기에 모형은 모형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히 8:9)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히 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 이제 새로운 법, 새 언약의 예수님이 들어오셨으니까, 기존의 것을 지탱하던 장치는 아무런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제 마음속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히브리서는 아예 구약을 완전히 가지고 논다는(?) 것이다.
* 새 법이 들어온다고 하니, 어떤 새로운 율법이 들어와서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러한 새로운 법이 바로 새 언약이고, 예수님의 피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뭔가 지키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히 8: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히 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 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 새 언약의 특징이 무엇인가? 죄를 용서해주고 다시는 우리의 지은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낡아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글자가 희미해져서 없어지는 것인데, 그런데 한국교회 목사들은 이것을 새롭게 선명하게 하려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희미하게 하신 것을 말이다. 세상에 아들을 모독해도 이렇게 모독할 수가 있는가? 그러니 초대교회에서 이런 히브리서의 말씀을 받아들고서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 아, 초대교회만 같아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