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61강 / 계14장 1-5 (어린양의 사람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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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어린 양의 사람들
2007년 5월 13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4:1-5
(계 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 14: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계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계 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신앙이란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자신들은 ‘나그네’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인도하실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도착하는 지점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성’입니다. 이런 자가 신앙인이라는 겁니다.
이 신앙인의 특징은 오늘 본문에서는 ‘누구를 졸졸 따라다니는’ 특징으로 대변됩니다. 어린양을 졸졸 따라다니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 숫자가 144,000명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누구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은 줏대라든지 자존심을 앞장 선 분에게 이미 반납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즉 자신의 미래와 그 미래로 이어지는 현재 과정마저 자신이 결정 못한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는 이상스러운 자로 보일 것이 뻔합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지요. 어떤 자가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길거리에서 외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되묻게 될 것입니다. “재산이 수 천억대가 되는 모양이군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돈이 많아서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목자에게 소속된 양이라는 점 때문에 부족함이 없게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비록 144000명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에게 방향성이 뚜렷하게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궁극적 하나’이신 예수님에게 시선을 맞추며 살게 됩니다.
이들은 편안함을 느끼고 누립니다. 어린양의 작품이고 그 자식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어린양 없는 ‘자아’란 성립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즉 따로 ‘자기 인생’이 없는 겁니다. ‘어린양’의 인생만 인정할 뿐입니다. 144000이라는 숫자는 확정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더하거나 빼거나가 될 수 없는 숫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구원될 숫자를 확정지으신 것입니까? 마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다 구원받게 하시지 않는 겁니까? 예레미야 22:21에 보면,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이미 거부성향을 보이며 살고 그것이 계속되면서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목자를 따르는 자로 변모될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는 미확정적으로 개방되어 것이 아니라 이미 확정적이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 확정된 자들이 바로 ‘남은자’입니다. ‘남은자’들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게 된 형식에 준해 등장되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11:3-6에 보면,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능력이 곧 ‘남은자’로 등장되게 합니다. 이로서 남은자들은 결코 자기 능력에 대해서 자랑하거나 과시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안되는 그런 능력이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소유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하늘에 따서 움직이는 태양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저 태양은 누구 지시받고 움직입집니까? 설마 우리 자신의 지시받고 움직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그런 눈으로 우리 자신을 봐야하지 않습니까? 즉 우리 자신의 결심이나 능력으로 오늘날 지금까지 우리가 버티고 살아온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세상 만사에 대해서 다 우리 중심주의로 해석했기 때문에 봄 철에 꽃이 일찍 지기만해도 우리는 속상해합니다. 즉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못하겠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되면 이 사람에게 궁극적인 ‘하나= 1’는 자기 자신이 됩니다. 사실 모든 인간들이 다 이러합니다. 최종적으로 고귀한 것은 자기 자신에 둡니다. 자기로 인하여 자기를 즐거워하고 기쁜 그런 인생이고 싶어합니다.
만약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고 해봅시다. 사람이란 뭐든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은 다 ‘자기 소유화’ 작업을 통해서 자기 창고에 쌓아놓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참된 하니님의 은혜는 이런 최종 창고를 궤멸시켜버리고 맙니다. 자기 업적과 자기 과시용 실적들이 잔뜩 쌓아져있는 그 창고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참된 은혜는 인간의 소유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 은혜의 출처만 기쁨과 소망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있어 최종 하나(1)는 오직 어린 양 뿐입니다. 이로서 이 어린양이 인도하시는대로 살게 됩니다. 144000이라는 숫자 속에서 어린양이 하신 일의 원천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2이라는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12’라는 숫자에 연연하십니다. 그 증거가 바로, 가룟 유다가 빠진 자리를 맛디아라는 인간을 뽑아서 12라는 숫자를 채우시도록 하신 일 같은 겁니다.
예수님의 12제자의 의미는 바로 야곱의 12 아들을 기원을 갖게 됩니다. 12자식들이란 야곱이 받았던 복의 내역에 대해서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를 톡 치면 12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 12은 하나 안에 잠재되어 있는 복이 펼쳐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1000이란 ‘최종 약속’의 의미를 품고 있는 곱해보면, 그것이 바로 144,000입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을 바라보는 방향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비록 목사라도 적그리스도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남은자와 거짓 남은 자의 기준으로서 십자가를 제시합니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너희들은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우리 목자의 죽음을 가지고 세상을 다시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목자와 분리된 생을 살지 않게 하옵소서. 늘 그 분의 지시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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