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58강 / 계13장 5-10 (짐승의 승리)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58강 / 계13장 5-10 (짐승의 승리)

정인순 2010. 12. 30. 15:05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58강-계13장,5-10,(짐승의,승리)-rev070415.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58강-계13장,5-10,(짐승의,승리)-rev070415.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58강-계13장,5-10,(짐승의,승리)-rev070415.hwp

 

 

이근호

 

짐승의 승리

 

2007년 4월 15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3:5-10

 

(계 13: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

(계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계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계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계 13: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본문에 보면, 두 패가 나오고 이 두 패에서 한 쪽은 승리자가 되고 한쪽은 패배자가 됩니다. 패배자가 패배했음을 알리는 것은 ‘죽임 당한’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즉 이 땅에서 죽는다는 것은 곧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패배당하지 않으려면 될 수 있는대로 안 죽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의외에 그 패배자 측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즉 ‘죽음당한 어린양’ 쪽에 속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생명책에서 명단이 빠져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곧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들만의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어린 양과 더불어 죽었다는 말은 곧 생명책에 이름이 들어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상식선에서 볼 때,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도 승리자가 되고 하늘나라에서도 승리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이런 자들이 오늘 본문을 대할 때는 참으로 기이한 안목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귀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말이라는 겁니다. 특이한 관점을 갖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많은 신들이 있고 종교도 숱합니다. 그 중에 어느 신이 참된 신이냐 할 때에 대형 할인마트에서 진열된 물품 중에 하나를 뽑아내듯이 놀라운 특징을 알고 참된 신을 골라내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 손에 죽는 하나님상’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는 신은 거짓 신입니다.

 

짐승들이 권세를 쥐고 온 세상과 나라와 민족들을 통치하고 있다는 이런 이야기들은 오로지 참된 하나님이 ‘죽는 하나님’임을 알리기 위한 배경들이요 장치에 해당됩니다. 생명책을 명단을 기재하시는 분이 곧 이 땅에서 와서 ‘죽임을 당한 하나님’ 그분입니다. 따라서 명단을 기록하신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골라내는 방식도, ‘왜 마땅히 그 분이 죽으셔야만 하는가?’ 이유를 아느냐 여부입니다.

 

성도는 ‘죽는 하나님’을 골라내는 이유는, 성도는 자신의 자아가 자신을 지킬 수 없음을 압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아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선이 끊어진 풍선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연락처를 갖고 있지 못한 형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아는 세상 권력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굴복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버려진 자아를 자아가 계속 사수하고 간수하고 간직하고 지켜내겠다는 것이 결국 장례식장 안에서 무용지물로 끝남을 알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이미 자아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아는 자아의 품위와 체면과 자존심과 위신과 생존을 위해 자아를 지켜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아는 그 실체와 정체를 드러내는데, 자아에게는 아무런 신비로움을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공연히 평생을 ‘자아의 체면 지키기’라는 헛수고를 해온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이런 자아를 깨부수실 것이 명확합니다. 십자가란 이런 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아를 녹여버리는 황산이나 염산과 같은 것입니다. 같이 있으면 신체가 타버릴 독 같은 겁니다.

 

자아라는 것은 계속해서 참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방하는 혹이나 암조직체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는 당연히 죽어야 됨을 확인하는 자가 영적 사람입니다. 즉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문제성을 이르켰으면 하나님이 우리 대신 죽으셔야 했을까요! .

 

자아를 용서치 않고 사정없이 죽여없애는 능력이 나오는 그런 하나님은 바로 십자가, 곧 ‘죽임을 당함’을 앞장 세우고 등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참으로 명단이 들어있는 성도는 죽음을 이긴 흔적을 지니고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란, 죽음이 생명에 삼킨바 된 그 증거로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속성 때문에 죽으셨다가, 그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능력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 구원의 능력은 생명책에 명단을 기록하신 그 분의 능력이기에 그 분의 능력이 임한 자도 예수님처럼, ‘죽음에서 이겨남’에 관한 증거를 갖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부터 하나님의 구원 능력한 하나님이 지정해 준 한 장소에서만 변동없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은 명을 거역하고 먼 곳으로 도망을 치는 도중에 그가 탔던 배가 침몰 위기에 직면하여 그만 홀로 망망대해 한복판에 빠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푸르고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죽음의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영적인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잊지 않았습니다. 즉 어느 곳에 있든지 상관없이 이곳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한다는 약속이 그 언약이었습니다. 그랬더니만 요나는 죽음에서 조차 구원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성도 본인의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세상적 힘이 가해집니다. 곧 성도를 죽이는 힘입니다. 성도는 본성상 자신이 갖고 있는 힘으로 극복해보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봅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의식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아로서 자아를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아에게 상당한 가치를 두고 의미와 소중함을 두는 것은 악마의 나라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객기요 오기에 불과합니다. 성도는 자력으로 자신을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아는 붕괴되어야 마땅하고, 깨져야 당연함을 알게 됩니다. 자아를 지킬만한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압니다.

 

도리어 그의 은밀한 곳에는 십자가의 피가 작용함을 알게 됩니다. 죽음조차 이기지 못하고 붙잡지 못하게 하는 그 힘은, 결코 성도 자아의 힘이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생명책에 기록된 ‘죽임당한 어린양’의 구원의 힘입니다.

 

오늘 본문은 육적인 사람들에게 어떤 강도 높은 수련이나 훈련이나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직도 이런 ‘어린 양’의 구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죽음의 바다에 갇혀 있는 요나의 몸체가 곧 십자가 사건을 또다시 보여지는 사건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신체도 십자가가 작렬하는 중심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아와 친하게 놀지 말고, 우리 앞에 깊숙한 곳에 들어있는 십자가의 힘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