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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62강 / 계14장 6-8 (심판하실 시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62강 / 계14장 6-8 (심판하실 시간)

정인순 2010. 12. 3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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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심판하실 시간

 

2007년 5월 20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4:6-8

 

(계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계 14: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과연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 구태여 땅에 대해서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미 자기 한 몸 구원받았으면 그만 아닐까요? 아닙니다. 워낙 가짜가 많아요.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는 자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말씀하십니다. 참된 천국에서 보는 안목을 가졌는가를 묻는 겁니다.

 

즉 천국에 사는 천사들이 땅을 보는 관점을 이 땅에서 자들 중에서 누가 공유하고 있는지를 찾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들은 아예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광고를 합니다. 이 땅은 심판받기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나가!”입니다.

 

인간은 추방된 처지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향하여 “좁은 길로 가거라”고 합니다. 결국 “나가!”와 “갇혔어!”와 “좁은 길로 가거라!” 이 세 문귀를 이어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탈출’입니다. 성도는 자꾸만 이 땅의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와 큰 움직임을 보이는 그 대열을 형성하고 서로 합류하기를 원하듯이 말입니다. 이 탈출의 대열 안에 있어야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는 애굽의 바로의 공주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애굽의 보화를 버리고 이 탈출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하늘이 내린 상을 받는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그냥 이 세상에 주저앉아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이 세상에서 탈피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신앙인이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약국을 개업하나 개척교회를 세우나 거기에 억매이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 올 때는 이 현실에 푹젖어있어 아무런 탈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만 열고 세상에 나서게 되면 이러한 천사들의 광고소리가 뒷전에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인 이 세상에서는 복음을 희석시키는 세력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해서 성경 고린도후서 4:4에서는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무당들이 최영 장군의 귀신이라든지 연개소문 장군의 귀신을 개별적으로 섬기지만, 성경은 이 개별성을 깨고 아예 전체가 다 이 ‘이 세상 신’을 심긴다고 말입니다.

 

이 세상 신은, 심판을 무시하는 식으로 사람들이 살게 합니다. 상급학교 진학할 때에 입학 시험이 없다면 열심히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이 땅에서 우리는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완전범죄를 시도하게 될 것입니다. 안들키기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이로서 우리 인간은 어릴 때에 소박한 삶이 떨어져나가고 성인이 되면 건방지고 허영으로 가득찬 삶을 살게 됩니다. 어릴 때에는 외부에서 주어진 것으로도 얼마든지 만족했던 삶이 어른이 되면서 전부를 가져야 사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허풍이 가득찬 허위적 삶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늘로 꼭 찌르지요. 그렇게 되면 인간 속에 들어있는 허영이 “빵!”하고 터져 빠져나가고 자신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인간임을 알게 됩니다. 허영으로 가득찬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타인의 비난입니다. 비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비난이 무서워라도 끊임없이 자신을 위장하면서 힘든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이 세상 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도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됩니까? 마태복음 10:20에 보면, “말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에게는 우리 말고 우리 속에 예수님이 들어와 계십니다.

 

예수님이 들어와 계시면, 그 사람의 운명은 본인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들어계시는 예수님에 의해서 완료되어 버립니다. 결정나 버리는 겁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이상 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비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무대 앞에서 남들에게 보란듯이 간판을 걸고 위선적인 행위로서 자기를 위장하며 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혹시 영화관 스크린 뒤로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거기에서 남들 보기에 어두운 구석이지요. 이처럼 성도는 사람들과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은밀한 지시와 명령을 받고 헌신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눈을 부릎뜨면서 보이는대로 얻어챙기듯이 살 것이 아니라 눈을 감게 되면, 눈이 감아도 보이는 세계만을 위하여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 세상은 무엇입니까? 세상이란 성도로 하여금 인간의 본래 의미로 늘 되돌려주는 설비가 가득찬 공장 같은 곳입니다. 인간의 본래 의미란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자기는 ‘하나님께만 범죄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자아를 완성시키는 목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자기를 살리겠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본디 자신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자기 존재 의의를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비록 자신은 간음하고 살인한 죄인이지만 그 모든 죄는 모두 ‘하나님께만 범죄’한 것으로 초점이 모아진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자아에 관한 문제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자아를 고상하고 거룩하고 완벽하고 훌륭하게 가꾸는 목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여 죄라는 것을 짓더라도 깨끗하게 유지되는 자아를 위하여 그 어떤 대가를 신에게 지불하고, 선행으로 보완해서 다시 온전한 자아로 탈 바꿈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방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나쁜 짓이라고 여기지 않는 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되는 그 어떤 위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이 밧세바와 관계하지 전까지는 알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못난 점은 보충하고 잘난 점은 장려하고 점점 더 자신을 거룩하고 성숙된 존재자로 만드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할 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천사의 안목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심판을 받는 겁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탈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 험악한 세상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의 죄는 오직 ‘주께만 범죄한 일’이기에 곧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임을 아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가꾸기 보다는, 자신이 날마다 깨어져서 그 깨어짐을 통해 주님께서 내 안에 와 계심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