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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60강 / 계13 장16-18 (666)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60강 / 계13 장16-18 (666)

정인순 2010. 12. 3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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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666

 

2007년 4월 29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3:16-18

 

(계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성경은 666이라는 숫자와 ‘총명 있음’ 여부를 연관을 시킵니다. 666에 어둡다면 곧 총명이 없는 자가 되고, 666을 아는 자라면 총명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총명이란 사람이 기본 자질 이상의 능력을 말합니다. 결국 666을 풀지 못한다는 것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이 말이 됩니다.

 

성경 전체를 안다고 주장해도 666에 막히면 곤란합니다. 총명 없음으로 판정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미 666에 대해서 해답을 내려놓았습니다. 곧 ‘짐승’이라는 겁니다. 결국 성령이 주신 총명이란 짐승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하는 겁니다. 짐승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짐승의 활동도 인정한다는 바가 됩니다.

 

이는 더나아가서 그 짐승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대처했느냐 하는 책임론까지 거론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참으로 성령을 통해서 총명을 부여받은 자라면 일상 생활에서 짐승의 활동에 무지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과 연관지어 세상을 읽게 됩니다. 결국 총명이란 세상을 영적으로 읽는 눈을 가졌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총명, 영적인 눈이 없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까요? 그것은 ‘둥지 틀기’ 식으로 인생을 삽니다. 마치 새들이 자기 새끼들을 낳고 함께 보금자리를 만들어 살듯이 인간들은 자기만 둥지를 만들고,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진력을 다하면서 살아갑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기껏 제안한다는 것이 바로 ‘둥지’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자기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겁니다. 인간들의 평소의 행동과 태도가 어떤 의도로 움직이냐 하는 점이 무심코 보여준 제안이었습니다. 과연 인간의 총기와 총명이 이 ‘둥지 틀기’로서 종결될까요?

 

요한계시록 12장 끝에 보면, 짐승이 무엇이 관심을 보이느냐가 나옵니다. 즉 짐승은 모든 인간에게 예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에게 유난히도 관심을 드러냅니다. 사도행전 19:15에 보면, 악귀 들린 자가 말하기를,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19-20에 보면, 마귀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앞에서 부들부들 떤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보통 ‘자기 둥지 틀기’에 최종적인 삶의 보람을 느끼는 식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이나 짐승은 그 인간의 내부에 무엇이 담겨있는가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지요. 일단 사람 속에 예수님의 증거가 들어오면 본인이 의식하기 전부터 주변에 있는 천사나 악마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더 신경 쓰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증거란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을 뜻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뜻이 계셔서 자신이 직접 만드신 그 피조 세계에 합류하신 겁니다. 그런데 단순히 사람 정도가 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인간에게서 내놓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이 구원받을 근거가 되지를 못함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이 내놓은 그 무엇이라도 그것이 모두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이란 사람들이 신에게 내놓은 것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서 악마는 적극 저지에 나서게 됩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악마의 품에서 자기 생각, 곧 ‘자기 둥지 틀기’만을 최종적인 삶의 의미로 삼고 살아온 그들이기에 충분히 악마의 밥이 되고 있습니다. 죽음에 협박과 위협만 가하면 모두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둥지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 내부에 하나님이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목숨을 잃는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자기 내부에 계신 분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두들 겁내는 그 풀무불 속으로 성큼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 세상은 죽음이 이긴 세계였습니다. 이미 죽음에서 이긴 자들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영역이 거기에 실제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의 삶이란 그저 자기 둥지 안에서 자력으로 살려고 애쓰는 반면에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은 ‘예수님의 증거’가 그들을 그만두지 않고 인생을 일방적으로 인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성도의 출몰에 짐승은 더 이상 자기 정체를 그들 앞에서 숨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총명있는 자는 짐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을 대변하는 분은 오른손에 7별과 7촛대를 쥐고 계신 분입니다. 하지만 짐승들은 자기편에 속한 자들의 오른손에 짐승의 표시를 박아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표시없으면 매매를 할 수 없게 했습니다.

 

과연 이 세상에서 매매 금지 협박에 안 넘어갈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마태복음 11:5-6에 보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참으로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들은 세상이 주는 협박에 기죽을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거저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즉 구원이란 일상적인 주고 받고의 매매관계없이 성사됩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구원 작업이 이 짐승의 세계와 얼마나 차이나는 가를 보여주게 됩니다. 만약 교회에서 인간이 바친 것으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면 곧 그 교회가 짐승을 숭상하는 짐승의 전당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에게 아무 것도 내놓은 것이 없습니다. 천국이 바로 이들의 것입니다. 666이라는 숫자란 인간들의 행위의 개성과 개별적인 특징을 깡그리 무시하고 일률적인 속성에 준해서 집단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증거가 없는 인간이라면 그 어떤 인간이든 666의 ‘인간의 숫자’를 품고 있고 666의 통치에서 못 벗어난 자들입니다.

 

반면에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이마와 오른손에 예수님의 표를 받은 144000명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공로덕분에 주님으로부터 주목받고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적으로 죽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들어오신 분이 세상을 다 이긴 분이라는 점을 인정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