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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은, 우리가 ‘주의 뜻이다’고 한 것이 사실은 우리가 조작한 ‘자신의 뜻’이고, 주의 뜻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뭐가 ‘주의 뜻’이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잡히시든 날 밤에 우리에게 뭔가 하나님께서 넘겨주셨고, 그 넘겨주신 것에 따라서 지옥이냐 천국이냐 결판 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11장 28-29절을 한 번 봅시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지요? 보통 “죄”라는 것은 윤리, 도덕적인 기준에 의해 죄를 말합니다. 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나쁜 짓을 하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 29절에서는 그렇게 본 것이 아니고, 죄의 기준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게 해 주신 떡과 잔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셨다면 그것은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죄는 우리 몸에서 피어나고 쏟아나지요? 예수님도 ‘네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네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하셨지요.
고린도전서 11장 29절에 보니까, 우리 몸에서 나오는 것이 죄의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몸과 뭔가 죄악된 것이 있기에 우리 몸 밖에 있는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해서 안 좋은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지요.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안 마신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기가 죽을 죄인이 아니라고 느껴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내일 사형이 집행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사형수가 된 것은 부모 탓이고 사회 탓이지 나는 그렇게 악한 놈은 아니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거부합니다.
교회 와서 ‘교회 오면 하나님 계시고 나에게 복을 준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 온 사람 같으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분변치 않고 먹을 가능성 농후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교회 안 다녀도 잘 난 사람인데, 좀 더 잘나기 위해서 교회 왔기에 예수님 시키는 대로 하겠지만 그 살과 피가 전적으로 내 죄를 씻기 위함이란 사실에는 온전히 동의하기 힘들겠지요? 이것이 바로 분변치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안 믿고 안 마신다면, 세상을 어떻게 살든, 인생을 어떤 목적으로 살든 나는 사람 취급 안 하겠다는 단호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안 마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자기가 잘났다는 사람입니다. 못나도 자신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예수님은 지금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 들고 오셨는데, 우리는 환자복을 안 입어요. 반대로 자신의 업적과 자랑거리를 가지고 나와요.
자신이 왜 죄인이냐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안 믿지요.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뭐가 못나서, 내가 뭐가 부족해서 나보고 죄인이라고 하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성경은 ‘네가 살과 피를 전혀 의지하지 않고 살과 피를 대하면 죄를 먹고 마시는 최종적은 죄가 된다.’ 이렇게 말씀하지요.
이만큼 교회는 십자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남기신 것 외에는 일체 받지를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주의 확증된 뜻이지 내 머릿속에 날마다 떠오르는 것은 나의 뜻이지 주의 뜻이 아닙니다.
이제 12장 봅시다. 1절에 보면 “신령한 것”이 나오지요. 이것은 영적인 것인데, 영적인 것이 있다는 말은 성령을 통해서만 영적인 것이 생기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는 육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영적인 영역도 있고 육적인 영역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세상을 바라볼 때, 영적으로 바라봅니까, 육적인 것을 현실로 봅니까? 오직 육적인 것만 현실로 보지요. 영적인 것은 추상적이고 착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육적인 것만 진짜 현실로 보입니다.
육적인 것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하면 나의 신체에서 나오는데, 인간 신체에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어요.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식욕, 수면욕, 성욕 이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욕망, 남들로부터 칭찬 듣고 싶은 욕망, 그리고는 자신이 신이고 싶은 마음 등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육적인 것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현실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동의합니다. ‘그래 이것이 전부야. 교회고 뭐고 내가 배고프면 다 소용없고, 아무리 교회가 복을 준다고 해도 내가 사람들에게 미움 받으면 죽고 싶다.’ 이것이 바로 육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자연스럽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적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자연스럽다’고 하면 선으로 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성령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러움을 바로 육으로 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상은 영과 육 둘로 되어 있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만 있는 것은 비 현실적인 것입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요새 교회에서 ‘새 생명 운동’이 유행하고 있고, 교인들을 ‘해탈’ 시키려고 목사가 힘쓰고 있는데 이런 것이 참 위험해요. ‘나는 이제 초보를 버리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다.’ 라고 하면서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을 아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자들에게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기도하면 떡반죽 그릇이 채워집니까? 또 물고기 아가리를 벌리면 거기에서 돈이 나옵니까? 당신이 바다를 갈라지게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혼자 도를 닦아도 홍해 바다가 갈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움직임 자체가 자연이 같이 동조해서 우주자체가 예수님께 순복해요. 그러나 이근호가 아무리 도를 닦아도 자연이 협조 안 합니다. 우리는 도를 닦아도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자꾸 더 높은 상태, 더 성화된 모습을 자꾸 요구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도를 닦아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신령하다”는 말을, 세상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나, ‘모든 것을 통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진짜 신령한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에 대해서 갈구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12장 31절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지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사모하면 안 돼요. 예언하는 능력을 사모하면 안 됩니다.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는 것을 사모하면 안 돼요. 사랑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모해야 됩니다.
13장 끝부분에도 나오지요. ‘보고 싶어요. 우리주님!’ 이런 심정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빨리 주님을 만나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21C에 하려고하니까 제가 쑥스럽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 맞습니까? 실제로 그러했다면 우리는 그분을 보고 싶어 해야 돼요. 내가 옥에 갇혔는데 어떤 분이 이름도 안 밝히고 매일 내게 사식을 넣어주었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고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만나보기를 사모하겠지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뭔가 당기는 능력, 흡인력 같은 것. 나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이끌고 있고, 보살피고 있다고 느끼는 것.
사랑이 있을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사랑의 은사가 오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용기지 사랑이 아니에요. 아무리 큰 용기를 가져도 두려움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잠시 용기가 두려움을 이길지 모르지만 언제 그 용기가 사라질까 두려운 것입니다.
두려움은 내가 만든 나의 능력에 계속 기대를 걸 때는 평생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모하는 대상으로 바뀌어버리면 그 순간 자기 생각은 날아가 버리지요. 사랑은 ‘흐물흐물해 진다’고 했지요. 사랑은 내 생각이 흐물흐물해 지는 것이라고.
사랑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구를?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점차 나의 생각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헌금은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헌금한 돈 외에 나머지 돈도 내 돈 아니라고 느낄 때 당신은 비로소 헌금을 한 순간입니다.”
만약 헌금을 하고 나머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돈이 내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헌금’이 아니고 ‘기부금’을 낸 것입니다. 여기에는 ‘헌금 조금 했다고 더 내라고 하면 어찌하나’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교인들이 자유롭게 헌금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평소에 5만원 하다가 오랜만에 10만원 하게 되면 목사들이 다음에 그보다 적게 내면 ‘마귀에게 시험 들었다’고 공격할까봐 두려워해요. 믿음이 성장하려면 10만원에서 다음에는 15만원 해야 성장하는 것인데 5만원으로 줄어버리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법 조항을 들어서 저주 받을 짓을 한다고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헌금을 하고 싶어도 다음을 생각하면 두려워서 제대로 못해요.
우리교회는 누가 헌금을 했는지 안 했는지 저는 몰라요. 제게 알리지도 말라고 해요. 혹시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설교를 했는데 어떤 분이 ‘목사님이 내 들으라고 한 설교다.’ 이렇게 나올까봐 내 책임을 회피하려고 저는 애초에 누가 헌금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릅니다. 그냥 주는 월급만 챙기지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누가 빚내서 뭘 하는지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사랑이란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헌금을 하든, 기도를 하든, 전도를 하든 이 모든 것이 어서 주님과 내가 상봉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게 되거든 사랑으로서 은사를 받은 것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선물로 받은 사랑이기 때문에 선물 준 사람께 다가가고 싶은 것입니다.
13장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어요. 그 이유는 믿음, 소망은 그 주체에서 내가 발생되지만 사랑은 주신 분, 원천자가 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은 내 쪽에서 발생되는 것이지만(물론 주께서 주셔서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랑은 저쪽에서 발생되어 당겨오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은 사랑이 주신 열매에 해당 됩니다. 그래서 제일은(원천은, 원 토대는, 원 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누구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내 사랑을 알아달라는 것이고, 진짜 사랑은 누가 보고 싶은 거예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어린 아이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라고. 이런 질문 가끔 받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대상에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전할 때도 목사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전하면 그것이 설교입니다.
누구를 지독하게 사모하게 되면 사모하는 대상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부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 중에 남편이 TV에 나오는 여자 탤런트가 예쁘다고 칭찬을 하게 되면 아내는 삐치고 화를 냅니다. ‘그렇게 그 여자가 좋으면 같이 살아라.’ 이렇게 나오지요. 아내는 평소 남편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늘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남편은 아내 사랑하는 것은 기본이고, 추가해서 탤런트도 괜찮다고 했는데 아내는 그런 것도 기분 나빠해요. 들레즈 철학에 의하면 남편과 아내가 지층구조가 달라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요.
사랑이란 것은 사모하는 자가 있으면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왜 성경 말씀 지키기가 어렵습니까?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등등 수많은 율법이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면 다 이루는 것인데 뭐가 어렵습니까?
사모하는 이는 없고 말씀대로 지켜야 복 받는다고 하니까 교회 와서도 죽을 맛이에요. 세상이 좋은데 성경 말씀에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니까 복 받기 위해서 참아야 한다고 하면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니 괴롭지요.
사랑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 정말 보고 싶습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아무것도 어려운 것이 없어요. 정말 보고 싶습니다. 마라나타 -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런 심정으로 주님 복음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 돕는다고 헌금하고, 그들을 위해서 봉사해주고, 낙심한 사람 찾아가서 위로하고 이런 것이 바로 주님을 보고 싶어 하는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제가 12장을 건너 뛰어 13장을 했는데 이렇게 해 놓고 12장에 들어가야 12장 해석이 되지 그렇지 않고서는 12장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12장 해석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행해야 구원 받는다’는 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펠라기우스 주의인데 이렇게 되면 큰 일 납니다.
12장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제 이 말씀이 좀 이해가 되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 그대로 고백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지요? 이 말씀을 그대로 고백했다고 해서 성령 받은 사람 아니지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해요. 애인이 있어야 돼요. 사모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모하는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예수를 저주해라’ 이게 가능합니까? 그분이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신 분인데 내가 왜 저주를 합니까? “그분은 나의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겠지요.
이것은 불교신자 앞에서도, 불신자 앞에서도 그런 고백을 해야 할 자리라면 당연히 고백하겠지요.
마태복음 10장 32-33절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게 되면 크게 보입니다. 예수님이 크게 보이면 상대적으로 나는 작게 보입니다. 내가 작게 보이고 주님이 크게 보일 때 주님 주신 손도 크게 보입니다. 이 손을 ‘은사’라고 합니다. 이 손은 주님의 몸에 달려 있지요. 머리되시는 주님의 몸에서 나온 이것이 크게 보여요.
만약 내가 크게 보이면 주님이 작게 보입니다. 주님의 손도 조그마하게 보이겠지요. 내가 크니까 내가 내민 손이 크게 보이지요. 교회에서 내가 충성하고 봉사한 것이 크게 보이고, 주님이 주신 은혜는 작게 보이지요. 이렇게 되니까 ‘하나님, 내게 언제 은사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것이 뭐가 있어요?’하고 불만을 가집니다.
은사를 안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너무 비대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님 주신 은사는 보이지를 않아요. 너무 작아요.
거지 나사로, 창기, 강도, 문둥병자, 소경, 귀신들린 자를 보세요. 이런 사람들을 주님이 구원 하셨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누가 크게 보이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찬송가 405장) - 주님이 크게 보입니다. 이 때 나는 작게 보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떻게 일하십니까?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하는 쪽으로 일하시겠지요? 이렇게 해 놓고 12장 3절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하시지요.
성령께서 얼마나 일을 정확하게 하시는지 몰라요. 요한복음 16장 8-10절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기에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만, 장차 어떤 보혜사가 오는데, 보혜사라는 것은 assist 도움자가 오십니다. 이분은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 의해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일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책망해서 - 책망하면 우리는 작아지고 주님은 크게 높아지면 주님을 사모하고 소망할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요.
그러니까 ‘은사’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주님으로 크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주신 그 기능을 ‘은사’라고 보시면 정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봉사하면 봉사한 값을 하고, 자기 부인은커녕 자기 업적이 있으면 그 업적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그런 은사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이런 것들을 부추기지요.
은사는 받지 않았고, 천당은 가고 싶고 이런 상태에서 가짜 은사를 남발시키는데, 가짜 은사는 교육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방언도 훈련하면 되고. 이렇게 훈련해서, ‘은사 받았으니까 감사하라’고 하면서 교회에 헌금하기를 유도하지요.
은사라는 것은 주님이 크게 보일 때, 내가 내 육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보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 때 헌금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은사인데, 진짜 은사로 한 헌금은 집에 있는 돈도 모두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느끼고 이렇게 될 때 헌금한 돈이 은사로 헌금한 것이 됩니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렙돈을 연보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부자 되기 위해 연보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연보를 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의 발에 뿌린 것도 예수님을 사모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유행가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바로 이런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오래 가지를 않지요. 잠시 후면 다시 내가 커지고 은사는 날아가고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줘서 ‘너는 나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재확인 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작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져도 괜찮구나. 지금 죽어도 괜찮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정에 부모가 예수 믿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기도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부모님이 주님께 돌아올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게 되면 부모님의 존재도 예수님의 은사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님도 주님의 품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작아지지요. 내가 부모님을 믿게 하려고 하면 나는 크게 되고 주님은 작게 됩니다. 여기에는 내 능력이 개입되고, 내 소망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낙심하게 됩니다. 결국은 부모님을 두고 주님을 원망하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나는 주님 품안에 작게 있습니다. 크신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왜 부모님을 주셨는가? 내가 전도할 대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지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라고 했지요. 제가 부모님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교인이나 다른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5절) 이런 것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나오지요. 나오게 되면 그분들이 믿든 안 믿든 간에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런 엄청난 귀한 전도의 일을 시켰다는 자체가 이 사람한테는 흐뭇하지요. ‘왜 내 말이 안 먹이 들어가나’ 하는 불평이 아니라, ‘내가 거룩한 주의 일에 동참했구나.’하는 기쁨을 맛봅니다.
불신자 부모가 있을 때 가슴 아프지만, 그러나 그런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주님이 보시고 주께서 더 가슴 아파하신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항상 내가 사모하는 주님에 의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란 것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은사란 뭐라고요? 은사는 예수님의 손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큰 손이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를 하게 하면, 우리는 그런 일을 하게 된 것만 해도 황송스럽고 고맙지요. 그래서 교회에서 은사에 따라 일하면 불평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이런 분이 있습니다. 11시 예배인데 9시 20분경에 오시는 분이 계세요. 이렇게 일찍 오셔서 예배당 청소 다시 다 하고, 복도, 화장실 다 청소합니다. 심지어는 남자분인데 여자 화장실까지 깨끗하게 다 합니다.
12장 1절에 보면 “신령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예, 신령한 것이 있습니다.’하고. 그러나 막상 교회에서 봉사할 일이 생기면 ‘내가 미쳤나. 그 일을 내게 왜 해’하면서 다 떠나버리고 혼자 달랑 남았는데 그 사람마저 가 버린다면 이들 모두가 다 ‘육적인’ 사람입니다.
문둥병 10명이 예수님께 고침 받고난 뒤에 9명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고 1명만 돌아왔어요. 9명은 병 낳고 지옥가고, 1명은 병도 낳고 천당 가고. 왜, 이 사람은 예수님께 값없이 받은 사랑을 감사하고 그 예수님이 보고 싶고 사모해서 다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구원이란 뭐냐, ‘누가 나를 보고 싶어 하느냐’ 그것 찾기입니다. 교회에서 힘든 일시키고, 가정에서 힘든 일시키면서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런 가운데서 누가 진정 나를 보고 싶어 하느냐’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영적이란 것입니다.
5분 쉽시다.
(2005. 11. 3. 11:26 녹취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