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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1-1 /고전 14장 / 05.11.25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11-1 /고전 14장 / 05.11.25

정인순 2010. 10. 11. 13:35

광주 강의 11-1 (2005. 11. 25 이근호 목사)
녹취:서경수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1125a.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1125.hwp

 

 고린도전서 14장을 봅시다.
1-2절을 보면 ‘사랑으로 방언을 구하라’고 하지요.

고린도전서 1장부터 13장까지 신나게 잘 오다가 갑자기 14장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이야기는 십자가 이야기였습니다.
십자가가 확장되면?교회가 발생됩니다. 그 교회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이 교회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신령한 것을 하늘로부터 공급받는 것을 통해서 그 교회가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십자가가 신령한 것을 제공한다’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면 될 텐데,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고 ‘교회가 신령한 것을 어떻게 생산하느냐’ 여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십자가에 의한 열매인데, 십자가가 실체고 교회는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거든요.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라고 교회가 있는데, 사람들은 교회 하나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와 신령한 것들을 동원시키고자 하는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여기 꽃이 만개했습니다. 빨간 꽃, 분홍 꽃 등등. 그렇데 이것이 가짜거든요. 조화잖아요. 만약 여기에 진짜 꽃이 오면 조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진짜 꽃이 뭐냐? ‘신령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예리한지 몰라요.
사람들이 교회를 추구한다는 것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향해 ‘신령한 것을 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교회 있고 사람들이 있으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은 <구조주의>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 상대가 없으면 못 삽니다. 못 만나면 전화라도 해서 서로 소통을 해야지 하루 종일 입 다물고 가만있으면 못 삽니다.

신령한 사람은 영적인 것과 내통하는 사람이고, 육적인 사람은 육적인 것을 쉴 새 없이 주고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것은 신령한 영적인 것과 교통이 될 때만 교회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지금까지 고린도전서는 십자가로 설명을 한 것입니다. 왜 십자가로 설명해야 하는가 하면, 그 당시 신령한 것 주장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 신령한 것 이야기 안 한 종교단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가짜입니다.

이런 가짜 속에 진짜가 뭐냐 하면 십자가뿐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십자가로 교회를 설명했고, 그 십자가는 신령한 것으로 주어지지 인간이 제조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 끝에 보면, “영의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라고 했지요.
유일한 영이 십자가입니다. 영으로 통하는 길은 십자가 외에는 없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성령은 일하시고, 십자가를 벗어난 영적인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십자가가 전해질 때 교회가 생기는데, 이 교회는 신령한 십자가의 내용을 담는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사도 바울이 육적인 교회를 염두에 둔 영적인 신령한 교회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왜 둘 다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약속’
교회를 수 십 년 다니고,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하지만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하나님에 대해 잊어버리고, 신령한 것의 중요성에 대해 시시하게 여기고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을 합니다. 과연 복음이 무엇인가?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예수님은 누구시지? 이런 질문에 쉽게 답변이 안 나와요.

그 답은 ‘약속’입니다. 참된 기독교의 진리는 ‘약속’입니다. 글자도 간단합니다. ‘약속’
전도연, 박신양이 출연하는 ‘약속’이라는 영화도 나왔어요.

하나님의 자기 약속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신령한 것을 구하라는 이 말을 한 이유는, 마지막 때에 신령한 것에 의해서만 교회가 교회된다는 것을 그전부터 약속을 한 게 있기 때문에 ‘약속’차원에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약속이란 것은 내 쪽에서는 어길 수 있지만 약속하신 분은 도무지 그 약속을 어길 줄 몰라요. 반드시 지킵니다. 마지막 때 구원 받을 때 약속 믿어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약속을 차버리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몇 년을 다니고, 복음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존의 것은 다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약속’ 이것만 하나 붙잡으면 다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 약속을 안 믿는 인간들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으면 안 믿는 사람 혼자 손해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든 안 믿든 간에 약속이 먼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중에도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방주 만드는 일이 약속 때문에 한 일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노아를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큰 배를 왜 만드는가? 비도 안 오는데 하면서. 그러나 어떤 소리를 하던 노아는 약속을 믿으면서 계속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창세기 8장에서는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언약’이란 말을 잘 안 써니까 ‘약속’으로 합시다.

당신은 왜 예수 믿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임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만약에 내가 믿는다면 내가 스스로 철회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다고 하면 내가 믿고 있음을 내가 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안 믿고 싶으면 안 믿겠다는 그런 뜻이 됩니다.

가끔 스스로 기독교가 뭔지, 복음이 뭔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생각하다가 안 믿어도 되잖아!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속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한 번 믿어볼까’ 라는 것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내가 한 번 믿어보다가 시시하고 재미없으면 발 뺄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고 자기 결단(혹은 맹세)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자기 맹세는 자기가 분 풍선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풍선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언젠가는 꺼진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많이 넣으면 풍선이 커질 수는 있지만 입에 힘이 빠져 못 불면 다시 풍선은 사라지고 껌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육적으로 시작할 수도 없고, 육적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왜? 그 신령함은 구약에 이미 약속된 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에 신령한 것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너냐? 라고 묻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약속하신 바에 의하면 신령한 단체, 신령한 사람이 등장하게 되어 있는데 그게 너냐? 라고 묻는 차원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명령은 무슨 뜻인가 하면, ‘너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날 사랑함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너 신자 맞아?’ 하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하나님이 예언한) 마지막 때에 등장한다는 영적인 사람 맞아? 라고 묻는 것입니다. 진짜 맞다면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육적이고, 신령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하는 것은 ‘신령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령한 사랑이 아니고 내게서 나오는 사랑을 하게 될 경우에는 상대방이 내 사랑에 대해 미지근한 반응을 나타내면 그 사랑을 내가 철회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랑을 베풀었다면 베푼 것으로 족히 끝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한 사랑이 아니고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해서 나를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신령한 관계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신령한 일이 되어야지 나의 의지에서 나오는 육적인 것이 되면 얼마 못가서 한계를 드러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 예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 본문을 ‘어떻게 하면 교회에서 방언, 예언을 만들어 냅니까?’ 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으면서, “목사님, 나는 어떻게 하면 방언, 예언을 할 수 있습니까?”하고 나오더란 말이지요.

순복음 이단이 방언을 한다고 한 것은 내 쪽에서 나오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들이 갖고 있는 욕망, 내 쪽에서 교회 만들어서 그것으로 천당 가려고 하는 자들과 조용기의 욕망이 맞아 떨어져서 수십만 신도가 모인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육적인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교회에서는 이것을 부러워해요. 육적으로 크게 되니까.

사람의 덩치가 크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덩치가 작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약속 받아들이면 약속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신령한 약속을 안 받는가 하면, 육적으로 느긋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적으로 아쉬운 것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육적으로 아쉬운 것이 있더라도 영적인 사람이 아니면 육적으로 신령한 것을 추구하다 보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방언, 예언을 할 것인가?’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자들은 10년 방언하다가도 11년째 방언 안 나오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약속이 어디서 나오느냐?
예레미야 23장 21-22절에 “이 선지자들은(거짓 선지자)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3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천상 회의가 하늘나라에서 열립니다. 열왕기상 22장에도 보면 천상회의 장면이 나오는데 그에 대해 미가야 선지자가 하는 말이 있어요. 이 미가야가 왕의 편에 선 어용 선지자 400명과 싸움을 하는데, 뺨까지 맞아가면서 하는 이야기가 ‘내가 천상회의에 참석했는데 왕의 선지자들에게는 거짓말하는 영이 들어가서 거짓을 말하도록 하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미가야 외에는 모릅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늘의 천상회의에서 약속한 것만 이루어집니다. 진짜 천상회의에 참여하고 온 성령으로 오신 분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되어 있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천상회의에 참여하고 내려온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뿐입니다.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예수 믿고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는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에서 방언, 예언, 통역을 하도록 하란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교회 다닌다고 내 백성이 아니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천상회의에서 약속한 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백성의 특징이 뭐냐 하면, 누가 나를 세상 죄에서 돌이키게 했느냐? 라고 고린도교인에게 물으면 그들은 꼭 “예수님 때문에 제가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하지요.

따라서 예레미야 23장에서 있었던 그 천상회의의 약속은 누가 온전히 이룹니까?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셔서 그 약속에 따라 구원 받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진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라는 것을 방언과 통역과 예언과 하나님의 계시로 이 세상에 증거하게 됩니다.

이제 좀 윤곽이 잡힙니까?
내가 방언을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지요? 오직 “약속”입니다. 길을 가면서도 생각하세요. “약속”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약속”을 잊지 마세요.

예레미야나 미가야가 천상회의에 참석했는데 이들이 참석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이것도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그냥 약속에 적용자가 된 것이에요.

이것은 예레미야, 미가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참된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들도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대한 내용을 예언으로 말하고, 이것을 전하게 되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신령한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생각은 ‘내 행동 여하게 따라서 천당도 가고 구원도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품성인데, 이것을 뛰어넘어서 ‘나는 육적인 자가 아니야. 신령한 것을 받아서 구원 받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 이것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나타나는 희한한 기적입니다.

민수기 11장을 보겠습니다.
먼저 17절을 봅시다.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25절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70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여기에 보면, 신이 임할 때만 예언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예언이 안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언은 인간이 조작해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9절에 보면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두가 다 예언하고 방언도 하고 통역도 하는 다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 회의록에 나와 있어요. 이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구체화 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그 신령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6-7절을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것은 바로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흑암에 있던 이방인들이 구원 받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거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보면,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10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12-13절에 보면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이것이 바로 약속이지요.
이 약속이 고린도전서에 이루어지겠습니까, 안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루어지겠지요.
이것이 이루어지는 현상이 뭔가?
그것이 바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신령한 것에 의해서 나중에 종합 정리된 것이 뭔가?
그것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따라서 성경 해석은 영적으로 신령하게 해석해야지 육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육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이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것이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았던 많은 말씀, 민수기, 예레미야, 이사야 등등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의 해당자가 되는 것입니다.

약속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십자가가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지요.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보통 인간들이 안다고 하는 것은 지식을 습득해서 아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내가 습득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들어가야 압니다.

저기 벽에 그림이 걸려 있는데, 장미꽃이 피어있고, 아름다운 별장이 있는데 이것을 밖에서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내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별장에서 뒹굴고 뛰놀면서 장미꽃을 딸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인간을 예수 안에 집어넣어요. 그런데 예수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밖에서 그림으로 보는 것처럼 감상할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우상이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데, 예수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예수 안에 있는 자의 신분에 조금의 변화도 주지 못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니까 [헤리포터]이야기 하는 것 같아요. [헤리포터]에는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가 있는데 ---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 안에서 못 박혔는데 무슨 그런 할 말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이것은 십자가 안에 들어갔는데 죽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는 그런 또 다른 세계가 십자가 안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울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게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거울 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은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워요. 그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세 친구를 불 속에 집어넣는 사람이 타 죽었어요.

저는 성경을 보면서 참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발견해요. 몇 가지 여담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같은 홍해를 건너는데 이스라엘은 건너고 애굽 군사는 다 빠져 죽었어요. 이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그렇게 차별할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똥, 오줌도 안 눕니까? 똑같은 인간인데.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무척 노력해도 자기 능력으로 풀어줄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잡히도록 조치한 이상 어떤 수를 써도 예수님을 풀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자기 결정으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예수님은 빌라도의 선고에 의해 죽도록 짜여져 있어요. 이것은 누가 변개할 수 없어요. 이것이 강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죽도록 되어 있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도록 선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산에 계신 손무성 목사님을 아는 분이 계시겠지만 그분 이야기 들으면 참 재미있는 것이 있어요. 하여튼 인생이 안 되는 쪽으로 흘러요. 교회에서도 조금만 더 참고 있었으면 당회장 될 걸 나오고 나면 그런 사실이 귀에 들어오고, 떠나고 나면 그 자리가 더 좋게 되고 늘 이런 식이랍니다.

목사님 아들 이름이 ‘요한’인데 올해 수능시험 쳤습니다. 평소에 상당히 침착한 성격인데 시험 치는 날 침착하지 못했데요. 이런 것을 보면 참 재미있어요. 손 목사님은 하나님의 신령한 약속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사람 같아요. 절대로 육적인 것은 못 잡도록 하세요. 하나님께서 방해공작을 펼치는데 얼마나 철저히 방해를 놓는지 기적의 이불로 둘둘 쌓인 것 같아요. 되는 일이 없어요.

정수기 회사에서 관리직으로 잘 있다가 영업직으로 돌려서 떠나게 되었어요. 계속 두고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
물론 오 목사님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예수님이 안 죽고 싶어도 죽어야 해요. 그리고 홍해 바다에 애굽은 들어오고 싶어도 끊겨야 합니다. 왜? 거울 속이기 때문에, 풀무불이 타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곳이 바로 예수 안입니다. 이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신령한 것 때문에 내가 살았다고 고백하는 자들을 가리켜 바울은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특징은 거울 속에 있기 때문에 거울 밖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사에 어떤 글을 보면 ‘신앙은 불타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비록 너희들이 나의 육체를 태울지라도 신앙은 타지 않는다.

이러한 진짜 신령한 안목으로 고린도전서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고린도전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 안”. 이것은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 속이지요. 밖에서 보면 죽은 자로 보이고, 안에서 보면 밖에 있는 사람이 죽은 자로 보이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이 그 말씀 아닙니까?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이런 신령한 것은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지, 예수 밖에 있는 자가 자신의 종교적 열성으로 인해 예수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정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너희들은 육적인 것을 사모하지 말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신령한 것이 뭐냐? 바로 복음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은 자기가 구원한 자들이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에 방언과 예언이 필요하고 통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방언과 예언의 차이점이 뭐냐? 방언은 하나님보고 이야기 하고, 예언은 사람보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 방언과 예언 사이에는 반드시 통역이 있어서 방언을 예언으로 전환시키는 이것이 바로 또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구약의 약속대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책으로 읽지만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영적인 것으로 풀이해야지 육적으로 풀면 안 된다고 했어요.

방언, 통역, 예언을 한 세트로 묶으면 오늘날의 성경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있기 전까지는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신령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통역 없이는 이해가 안 되는 그러한 계시 사건들을 하나님이 은사로 주었습니다.

물론 당시 엉터리 방언들도 많이 있었어요. 따라서 이 예언을 통해서 사도의 심사를 받아야 했어요. 이것을 말하면서 바울은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고 했지요. 여기에서 질서란 말은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방언이란 특이한 은사를 주므로써 교회라는 것이 하나님의 신령한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인간들이 만들거나 주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방언은 방언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질서를 위해서 통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방언만 해 버리면 무질서해 지지요.
다시 말하지만 무질서는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판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판단을 사도가 해야 합니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의 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복음이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만 증거되는 것이 참된 교회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방언, 통역, 예언이라는 그 당시의 은사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이 오늘날 성경입니까? 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현재 이 꽃이 꽃입니까? 하면 ‘꽃입니다.’해도 맞고, ‘꽃 아닙니다.’ 해도 맞아요. 꽃은 꽃인데 이것이 조화잖아요. 진짜 꽃은 아니잖아요.

고린도전서 당시의 방언이 오늘날 성경입니까? 라고 하면 맞을 수도 있고, 안 맞는 말일 수도 있는데, 안 맞는 말이라는 것은 성경책을 영적으로 이해할 때만 그 당시에 말하는 방언이지 성경책을 문자 그대로 본다면 방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책을 영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영이란 것은 십자가가 어느 통로로 나오는가 하는 것이 영입니다. 신령한 것이 아니면 십자가를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깊은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모른다고 했지요. 나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 바로 영입니다.

영이란 말은, 이상한 말, 괴상한 말이 영이 아니라, 십자가를 고백하면 그 자체가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십자가 밖에서 문자적으로 풀고 해석하는 것은 방언도 아니고 통역도 아니고 예언도 아닙니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 하고 좀 쉽시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이 새 방언이지요?
방언이란 말은 뜻을 전달하고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방언인데, 누구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 뜻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전달합니까? 새 방언으로 전달하는 현실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 약속입니까? 요엘 2장에 나오는 약속이지요.

이 약속을 할 때 이 성령이 누구를 통해 주어진단 말입니까? 그것이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다고 했어요. 따라서 사도행전 전체는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 때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그것이 바로 마지막 때의 예언이요, 방언이요, 기적인 것입니다.

모든 일어나는 일들이, 병 고치는 일만이 아니고 모든 일들이 마지막 때에 성도에게 주어지는 예수님이 일으키는 은혜요 이적으로 등장합니다. 그 이적 가운데 제일 큰 이적이 바로 예수 믿고 자기 죄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고린도전서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렇게 따져보니까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자기 약속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구세주라는 것을 믿게 되는 그런 영적인 사람이 등장하는 것. 이런 목적으로 그 당시에 방언이란 현상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잠시 쉬겠습니다.

(2005. 12. 8. 10: 42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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