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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0-1 / 05.10.21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10-1 / 05.10.21

정인순 2010. 10. 11. 13:32

광주강의 10-1 (05. 10. 21) 이근호 목사

녹취:서경수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1021a.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1021.hwp


 

 지금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하고 있지요?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복습해 보겠습니다.  이 고린도전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는 이 창조된 것이 멸망당합니다.  처음에는 창조하시고 마지막에는 창조한 것을 파멸시키는데, 멸망시키면서 겹치기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말은 새 인간이 있다는 것이 보장됩니다.
여러분, 집이 큽니까, 사람이 큽니까?  크기는 집에 크지요.  사람이 집 안에 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집을 부셔버릴 수가 있지요.  아무리 집에 커도 사람이 파괴할 수 있으니까 누가 더 셉니까?  사람이 더 세지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하늘이 옛 하늘이고,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이 옛 땅인데, 옛 하늘과 옛 땅이 무너져야 될 이유는 처음 만든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데, 이것은 어떤 조건 하에 새 하늘과 새 땅이냐 하면, 새로운 인간, 죄가 없는 새로운 인간이 나타날 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한 가지 던지겠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인간이 누구입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이 없어져야 할 이유는, 지금 인간 자체에서 죄가 나오기 때문에 옛 하늘과 옛 땅이 죄로 말미암아 무너져야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오는데 그것은 새 인간이 살기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인간이 누구입니까?

여기 새 인간이 누구냐 하면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믿어도 죄 짓기 때문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습니다.  일반 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 살기에 적합한 곳이에요.  이것을 두 자로 “영광”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찬란한 영광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집이니까요.

예수님의 집에 우리는 그냥 양자로 들어가는 거예요.  완벽한 인간은 예수님 밖에 없고, 그 완벽한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든 세계가 새 하늘과 새 땅인데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 때는 우리의 의견을 듣지 않습니다.  누구의 의견만 듣습니까?  예수님의 의견만 듣고 만들어요.  우리는 그 영광스러움과 영생을 그냥 누릴 뿐이지요.  누리는데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값없이’라고 했어요.  

믿음은 선물로 받지요?  이 때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만약 천국을 만들면서 우리에게 의견을 묻는다면 각 사람의 천국이 다 다르겠지요.  어떤 집에는 꽃꽂이가 잘 되어 있어야 하고, 어떤 집은 골프장이 꼭 있어야 하고, 사람마다 요구조건이 다 달라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재미있는 것이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요구하는 것은 다 달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참 바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사람 요구도 들어야 하고, 저 사람 소원도 들어줘야 하고, 만약이 두 가정의 요구사항이 서로 충돌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기독교 국가가 축구 경기를 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편에 손을 들어줘야 합니까?  정답은 둘 다 편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두 집사님이 서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두 집사님 중 어느 분의 편을 들어줍니까?  둘 다 안 들어줍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뜻대로만 응답할 뿐이지 인간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해 주지를 않습니다.

요한 1서 5장 14절에 보면,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어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주의 뜻대로 구할 때만 다 이뤄집니다.  그리고 요한 1서 2장 14절에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은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지고 기도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세요.  

그러면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기도하세요.  ‘하나님, 예수님이 주신 뜻이 저희 가정, 저의 신체를 통해 이뤄지게 하옵소서.’  이것을 간단히 줄이면, ‘하나님의 뜻이 저에게 이뤄지게 하옵소서.’  이것이 기도의 내용입니다.  주기도문에도 나오지요?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됩니다.  주의 뜻대로 되는 것을 당연하고 다행스럽게 여겨야지, 내 뜻대로 안 되고 주의 뜻대로 되는 것에 대해 하는 수 없이 수용하는 식으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기에서 “주의 뜻이 뭡니까?”라고 묻을 수 있는데, 이것이 이번 시간에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주의 뜻은 이미 결정 났고, 드러났습니다.  새삼스럽게 주의 뜻 알겠다고 번민할 필요 없습니다.  

만약 주의 뜻을 인간에게 맡긴다면 주의 뜻이 허황한 뜻이 됩니다.  사람은 아침에 눈만 뜨면 허황한 몽상가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들을 이것저것 뭉쳐서 그것이 주의 뜻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오늘 어떤 귀인이 오셔서 나에게 돈 100억을 주면 좋겠다는 망상을 했습니다.  이런 것은 누구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망상이 주의 뜻과 점차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행윕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가 상상하고 예상한대로 되도록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기다려도 돈 100억 주는 귀인이 나타나지 않아요.  대신 빚쟁이가 찾아와서 돈 갚으라고 독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신이 아침에 상상한 100억 주는 사람에 대한 망상은 깨어지겠지요.  깨어지면 아침에 자신이 상상했던 것은 주의 뜻이 아니고, 내 욕심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나이 30된 과년한 딸이 있는데 A라는 혼처 자리와 B라는 혼처 자리가 나타났습니다.  A는 의사인데 키가 작고, B는 변호사인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이런 경우 A를 사위 삼을까 B를 할까 고심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다가 A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A가 결혼 후에 혼수를 조금 가져왔다고 딸을 구타하고 난리를 쳤습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은 뭘 후회하는가 하면, 그 때 A를 사위 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던 것이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이었다는 사실이 시집가고 나서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어떤 것을 잡아서 ‘이것은 틀림없는 주의 뜻이야’ 하고 잡을 것이 있겠습니까?  사실은 잡을 것이 없습니다.  뭔가를 결정한 후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것도 내 욕심이었구나 하는 사실이 밝혀지고, 처음 결정할 당시와 상황이 바뀌게 되면 그것도 나의 욕망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몽상과 상상으로 영글어 낸 자기 뜻을 주의 뜻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실은 평생을 보냅니다.

만약 위와 같은 분이 평생 주의 뜻을 모른다면 나중에 나이 들어 임종을 맞이할 때, ‘얘야 하나님의 뜻 다 소용없더라.  내가 솔직히 말하는데 지나고 보니까 내 뜻을 가지고 목사가 주의 뜻이라고 우기니까 하나님 뜻인 줄 알았는데 다 내 뜻이지 하나님 뜻은 없다.  내가 60년 믿었지만 다 헛것이다.’ 라고 후회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미래가 뻔히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것은 내 확신이야, 이것은 반드시 되는 거야” 이런 것으로 주의 뜻을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러분이 주의할 것은 교회에서 예배당 짓는다, 교육관 짓는다 할 때, 부흥사들이 와서 “5천 만원, 1억 헌금하세요.  주의 뜻입니다.” 하는데 이것 주의 뜻 아닙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형편을 고려해서 적당한 금액을 정하고 흥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뭘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받아서 축복하시는 분이 아니고, 값없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고,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 살기에 좋은 곳인데, 우리는 그냥 신부의 신분으로 그냥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만 가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신부의 웨딩드레스도 신랑 예수님이 맞춰줍니다.  우리가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다만 ‘저에게 신랑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라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이런 마음이 기름 준비하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돈 받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흥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10만원 더 쓰면 축복할 텐데, 10만원 덜 써서 저주하겠다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인간들이 조작한 하나님입니다.

구약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가짜 하나님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자 말라.”고 했어요.  가짜 신은 인간이 조작한 것이고, 진짜 신은 약속 안에서 얼굴을 살짝 내미시는 그런 분이 바로 진짜 하나님입니다.

옷을 통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어요.  옷 속에 주먹을 넣어 밀면 뭔가 뚝 튀어나오지요.  옷 속에 주먹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이라는 옷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옷이 뭐냐?  예수님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님 찾지 마세요.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숨어 있습니다.  어려운 말로 은폐되어 있다고 하지요.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숨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을 비켜서 우회해서 하나님 찾을 생각 하지 마세요.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성자 따로 있고 성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자 예수님 안에 성부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시 설명 드립니다.  옷인데 안에서 주먹을 내미니까 옷이 뚝 불어져 나왔잖아요.  

사람들은 예수님 말고 하나님 찾는데 귀신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일본에는 15만 가지 종교가 있다고 해요.  그 중 하나가 ‘옴 진리교’가 있고, ‘남묘호렌게교’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요.  자기들이 신을 찾으면 그것이 신이 되는 거예요.  상점에서 물건 고르듯이 내가 원하는 신을 내가 고르겠다는데 누가 간섭하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방 민족들이 자기가 아쉬워서 천당 가겠다고 만들어낸 조작된 신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누가 요청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직접 없는 이스라엘을 만들어 놓고 찾아오신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구약 시절에는 피 있는 제사를 통해 나타나시고, 신약 시대에는 피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십니다.  

저도 목사지만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기독교 이거 사기 아니야?  신이 어디 있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냔 말이야.’ 이렇게 하나님이 없다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오히려 내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고 주눅 들지 않고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냥 사회 나가서 돈 벌고, 밥 먹고 살다가 늙어 죽으면 그만이지 내가 구태여 하나님을 아쉬워하며 찾고, 예수를 부르고 할 필요가 있는가?  누가 하나님 보았나요, 예수님 봤어요?  천국은 봤습니까?  아무도 안 본 천국을 인간이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에 지어낸 가짜 나라일 수도 있단 말이지요.  인간의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환상을 통해 나타나고, 그리고 그것을 계속 소망하면서 ‘있을 것이다.  있을 거야.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스스로 자신에게 채면을 걸어서 없는 하나님을 있다고 우길 수 있다는 말이지요.  

차라리 어떤 때는, 성경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예수도 없고 이런 것이 없는 것이 우리를 마음껏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잔소리 듣기 싫다.  제발 날 건드리지 마라.  예수든 하나님이든 날 건드리면 난 싫다.’  때로는 아무도 날 간섭하지 않고 가만 내버려둔다면 종교 이상으로 우리 심령을 편한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도 해 본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안 되게 하는 사건이 있어요.  그것이 뭔가 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고 부활입니다.  이 사실은 빼도 박도 못합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적의 흉탄에 맞은 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 지시고 나에게 영생 주시기 위해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기도를 100번 해서 단 1회도 응답 안 된다 할지라도, 내가 사업을 해서 몽땅 다 망해도 변함없는 사건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린 사건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씀을 해요.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을 확실한 사건, 십자가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내 죄를 씻었고, 약속대로 3일 만에 부활하시므로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11장 23-24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주께서 잡히시던 밤” 그 밤에 있었던 그 약속, 이것을 계약이라고도 하는데 그 계약 혹은 약속을 계속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피를 흘렸는데, ‘이것은 너희를 살리기 위한 내 몸이고, 너희를 용서하는 내 피다.’라는 그 사실을 마지막 재림 때까지 계속 증거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모여서 밥 먹고 노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주님께서 호출하셔서 모이게 되었고, 호출하신 근거는 주님이 대신 십자가 지셨다는 그 사실, 그 흘리신 피가 죄 많은 나를 씻어주시고 주님이 사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해 주는 그 능력이 십자가의 효과로서 우리에게 넘쳐난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 모인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구원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이 사실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다양한 사건이 있더라도 십자가 사건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말고 밖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그렇다면 주의 뜻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뜻이 아닌 것은 십자가 외의 모든 것이지요.  내 가정이 화목하고, 사업 잘되고, 교회 부흥하는 것 이런 것 전부 다 주의 뜻이 아니지요.  이런 것들은 내 욕심이 만들어낸 환상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내 욕망을 주의 뜻이라고 우기면서 “주여, 주여!” 부르면서 금식하고 철야하고 합니다.  주의 뜻 아닌 것을 가지고서 주의 뜻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고 ‘시위’ 혹은 ‘대모’라고 합니다.  

주의 뜻이 뭐라고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효력이 나타나서 우리는 그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랑과 신부 사이에는 십자가만 인정하고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돈도 안 받고, 우리의 정성도 안 받고, 우리의 선행도 받지 않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께서 자기의 피와 자기의 살을 신부인 우리에게 주셨어요.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신랑이 준 것을 가지고 커플링처럼 고이 간직하시고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만든 정성, 내가 만든 헌금, 내 열심 이런 것 들고 가지 마시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들고 가지 마세요.  이런 것 안 받습니다.  

사람이 교회에다 업적을 쌓으면 이 업적을 평생 포기 못합니다.  교회 꽃꽂이만 해도 아이들이 꽃꽂이를 만지고 하면 굉장히 화를 냅니다.  사람이 뭔가 업적을 남기게 되면 그 업적과 떨어지지 않고 평생을 그 업적과 동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업적을 건드리면 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서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랑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 또 우리교회 교인들은 봉사도 안 하고, 헌금을 잘 안 합니다.  잘 못 가르친 것이 아니고 많은 것을 가르친 것 중에서 자기 손해날 것은 다 빼버리고 유익한 것만 챙기니까 그렇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주문했는데, 주문하지 않은 반찬도 같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교회 올 때 자기만 구원 받는 줄 알았는데 자신처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구원 받은 많은 형제들이 있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그 형제들을 무시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너무 약삭빨라 자기 챙길 것만 챙기고 끝나면 ‘목사님, 고맙습니다.’하고 가버립니다.  

이것이 11장에 들어가면 잘 못 되었다는 것이 나오는데, 제가 여기서 서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은 자기가 우리에게 준 것을 받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은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은 죄인의 뜻이고 나의 뜻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가지고 구원이 되니 마니 측정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세요.  십자가는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닌데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생각하면 인생사에서 어떤 실패가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성공이지 실패가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실패란 개념 자체가 더 이상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분명하다면 우리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 확실하다면,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성도라는 뜻입니다.  성도 아닌 사람은 절대로 믿지 못합니다.  성도이기에 예수님 지신 십자가는 내 죄를 대신해서 지신 십자가고, 이미 영생 얻기로 확정된 사람이기에 세상이 믿지 못하는 부활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뭘 안 갔다 받쳐도 이미 구원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교회이고, 이 교회(고린도교회)에 누가 지금 와 있습니까?  사도지요.  이 사도가 전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열정?  행함?  아니면 돈?  무엇을 전하겠습니까?  사도가 전하는 유일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네가 십자가를 아느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 해석은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끝나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이 성경 해석 외에는 다른 성경 해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간에 인간을 집어넣으면 ‘받쳐야 복 받지’ 이렇게 되는데 이러면 큰 일 납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에서 주님께로 가는 노선에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어요.  만약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면 어느 정도 열심히 해야 구원 받습니까?  1년에 전도 100명 하면 됩니까?  아니면 1,000명 하면 됩니까?  헌금은 얼마나 해야 합니까?  기도는 몇 시간 해야 합니까?

인간의 노력을 거론하면 다 엉터리입니다.  주님으로 시작해서 주님으로 끝나야지 중간에 우리들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끼어들어 구원 받게 되면 중간에 죄가 섞이기 때문에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끝부분에 보면 마지막 때 장로들이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서 도로 주님께 반납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주께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면류관을 반납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모두 주의 뜻대로 되었기 때문에 오직 주께만 영광이 돌아가야 합당하다는 것이지요.    

‘주의 뜻대로 된 것에 대해서 내가 왜 공적을 가져가야 합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뜻에서 면류관을 반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미리 합시다.  천국 가서 하기 이전에 지금부터 미리 합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이 이런 반론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출발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성경에 보면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지 않느냐?  그러니 이런 명령들을 순종해야지 십자가만 믿고 계명을 불순종하면 지옥에 떨어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징계 받고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나만 손해지.’라고.

그런데 이게 틀린 생각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살피면서 왜 잘못된 생각인가를 확인해 봅시다.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여기 마지막 부분에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는 명령이 나오지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은 이 명령 안에서 능력이 나와요.  성경은 성령님이 쓰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님이 명령하신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성령님이 명령할 때 그 명령에 도달된 사람은 그 명령대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을 어떤 분은 이해가 될 것이고 어떤 분은 이해가 잘 안 될 것인데, 제가 만약 부모고 4살 난 어린 아이가 있다면, 성경공부 시간에 아이가 울고 있다면 엄마가 아이를 향해 인상을 쓰면서 “뚝”(울음을 그치라는 뜻으로)하고 소리를 치지요.  이렇게 되면 아이는 순간적으로 놀라면서 뚝 울음을 그쳐요.  이것은 엄마의 능력이 명령과 함께 섞여서 아이에게 전달된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가 돈이 너무 아쉬워서 돈을 달라고 주님께 떼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성령이 임해서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다.’는 말씀이 깨달아지니 갑자기 기쁨이 오면서 돈을 생각하는 마음이 뚝 그칩니다.  이것이 몇 초 동안만 지속될 뿐이지만.  약 5초.  이 5초가 지나고 나면 다시 돈 타령을 하겠지만.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란 생각이 들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 존중하는 생각이 들 때 그 사람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대할 때 교과서처럼 지켜야 한다고 생각이 들면 보지마시고, 이 말씀이 살아있어서 말씀 그 자체가 존재입니다.  ‘빛이 있어라’고 하시면 즉시 빛이 생겨요.  말씀하므로 써 존재케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시면 나오게 되지 ‘아이고 나는 안 나가렵니다.’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4:12)고 하셨는데, 지금도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파고들고 활동하는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21세기 지금도 믿는 자 속에 말씀이 살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활동해야 신자에요.

그러면 구원 문제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지요.  내가 말씀 지키려고 안 해도 되지요?  주께서 수시로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니까 그 때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그 은혜를 증명하면 되요.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했는데 이것이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하라, --되라.’는 명령은 어떤 존재자가 될 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 존재자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처럼 되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되게 하시지요.

바울처럼 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3-4절에 보면,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자가 머리 기르는 것은 당연한데 머리 기르는 이유는 무엇을 쓰는 것을 대신한다고 했지요.  여기서 어떤 존재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면,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존재자가 되어야 해요.  야, 이것 어렵습니다.

제가 어떤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남편이 자신의 머리가 그리스도인 것을 인정하지 않거든 그 남편한테 복종하지 말라’고.  성경 말씀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고 했는데 그 남편이 어떤 남편이냐 하면, 자기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남편에 한합니다.  자신의 머리가 없고 자신이 최고인줄 아는 남편에게 복종하면 그리스도라는 통로가 도중에 이탈되어버려요.  이렇게 되면 그 여자는 남편 섬기면서 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머리가 도대체 뭔가?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하는데 머리가 뭔가를 알기 위해서 다시 한 번 3절을 보겠습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머리가 뭐냐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 가야 머리가 뭔가가 밝혀져요.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의 머리다.”라고 우기는 남자에게 가면 안 되고, 예수님께 가야, 그리고 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사이가 어떤 사이인가를 알 때 이게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머리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몸이 되십니다.  몸이 없이는 머리가 머리 구실을 못하고, 몸은 머리 없이는 온전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 때 아버지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간단하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뭐냐 하면,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머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때 머리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섬기는 남편은 어떤 남편입니까? “주여, 주의 뜻이 저에게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할 때, 이때 이 남편을 존중하고 복종해도 아내로서는 손해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남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이런 남편이 있더라도 이런 남편에게 복종할 여자가 또 없어요.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은 5분이 되었던 5초가 되었던 수시로 되게 해요.  아무도 인간 자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성경께서 잠시 잠깐이지만 되게 하지요.

성경 말씀을 대할 때 여러분들이 ‘야, 이 말씀은 지킬 수 있겠네.’ 이렇게 생각하시면 그것은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길 때 어떤 능력으로 한 줄 아세요?  성령님의 능력으로 했습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성령 받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공생애에 돌입합니다.

예수님도 그런데 하물며 죄인 주제에 자신의 능력으로 남편을 하늘같이,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자기 몸을 주심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끔 [순애보]에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가 나오지요.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지쳐 쓰러져 돌이 되었다는 눈물나는 전설, 이런 것을 보면서 정말 지독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성경을 보면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집착입니다.  지독한 자기 집착이지요.  

사람은 뭔가에 공을 들이면 포기를 못합니다.  공을 준만큼 포기를 못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아내는 점점 위험스러운 아내가 됩니다.  점점 감시자가 되요.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빼앗고 남자는 여자의 몸을 빼앗는다.’는 되도 않은 말이 있습니다만, 사랑을 하게 되면 감시망이 점점 더 좁혀지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자기 지배 하에 두고 싶습니다.  이것을 편집증이라고 합니다.

지독한 사랑, 집착 이런 것을 가지고 윤리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지독한 사랑이 지독한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사랑 = 절대 악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기주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게서 나간 사랑을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을 용납 못하지요.  내가 이만큼 정성 드렸는데 어찌했든 넌 내 정성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독한 자식 사랑은 자식을 망친다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에는 자녀가 성장했으면 부모의 품을 떠나가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떠나 저희끼리 가정을 만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품에 끼고 있으면서 본전 뽑을 생각하지 말고 --

제 나이쯤 되어서 사람들을 만나면 부모 치매 안 걸린 사람 만나면 복도 많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치매에 걸리면 가족들이 감당하기 힘듭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짜증나는 것도 현실이에요.  우리가 이 말씀대로 못삽니다.  이것도 현실이에요.  그런데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도 현실이에요.  가끔은 이 말씀이 생각나는 것도 현실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완벽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가끔 주어지는 십자가 생각과 성령의 도우심이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것이 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이고 이 성령의 인도 때문에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은 머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된 남편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끔은 예수님을 머리로 생각하도록 성령께서 말씀대로 이루십니다.  그리고 성도된 아내는 가끔은 남편을 주님처럼 복종해야 한다는 그런 의식이 들도록 성령께서 해 주십니다.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모든 것을 성령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1장 앞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라’가 아니고, ‘되라’는 이야기지요.  우상숭배하지 말고, 술 먹지 말고 --하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어떤 존재인줄 아느냐?  너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고 있는 하나의 그러한 환경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부터 먼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7-8절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 말씀 보면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 골치 아프다.  이것도 지켜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각각 자기 위치를 통해서 예수님의 머리됨을 주님께 고백하도록 성령님께서 이렇게 일하신다는 하나의 통보입니다.

“예비군 훈련 나왔습니다.” 동사무소 직원이 통보 나오듯이, 우리는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 삶속에 침투해서 ‘너의 머리는 그리스도야.  그리스도를 머리로 생각해야 돼.’하는 통보가 우리에게 날아오는 것입니다.    

5분 쉬었다 계속하겠습니다.
(2005. 10. 28. 10: 3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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