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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식론에 대해서 철학하는 사람은 알지만 일반인들은 잘 몰라요. 인식론이란 ‘외부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지 간에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아무리 진리라고 해도 내 쪽에서 진리가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진리고, 만물의 척도는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경계를 넘어서까지 진리가 되려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이게 꼭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만약 여기서 10명이 모였다면 하나님께서 10명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낼 때 진짜 하나님이라면 10명 모두 동일한 하나님관이 나와야 되고, 하나님 상이 나와야 될 텐데 각 사람에게 물어보면 다 달라요.
그렇다면 한 사람당 한 하나님(각자 다른 하나님)이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교회 유지나 교회 대표자가 믿는 하나님을 덩달아 같이 믿다가 그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면 본래 자기의 하나님으로 돌아서는 이런 식이 됩니다. 결국 인간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분명히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고쳐놓고,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생각은 접어 두시고 진짜 하나님을 그대로 받아들여야합니다.’ 할 수 있는 어떤 장치, 인식하는 인식론적 장치를 따로 마련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주장들을 하게 됩니다.
이런 주장들을 하게 된 것은 교회 단합에 대해서, 교회가 하나 되기를 위하여 힘쓰는 사람에게 이런 욕구, 불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이런 것은 말짱 소용없는 짓입니다. 인식론은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은 다 다르지 않아요. 똑같아요. 어떤 점에서 똑같은가 하면 자기 밖에 모른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전부다 아담의 속성을 입어서 자기 밖에 모르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십자가라는 것의 두 가지 내용을 생각했지요.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다 들어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키는 인간들은 어떤 의도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느냐 하면, 인간들이 갖고 있던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뭔지는 제가 지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하여튼 간에 인간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뭔가 공통점이 있어요. 그 공통점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살해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그대로 로마서 8장의 은사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말은,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그 무엇이든 인간의 어떤 요소가 예수님을 “너는 필요 없어. 너는 죽어야 마땅해” 라고 몰아냈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이 십자가에서 발각이 되겠지요.
이렇게 되면 인식론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내가 어떤 장치를 하면 주님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라는 말을 할 필요 없이, 어떤 인간도 계속 하나님을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말도 수상해요.
인간 속에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배척”입니다. 주님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배척하는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어떤 식으로 배척했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을 배척했지요. 예수님 오신 후에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밀치고 배척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로마서 7장에 잘 나와 있는데, 어떤 내용인가 하면, 주께서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예, 탐내지 않겠습니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고, ‘탐 좀 내면 어떤데, 탐내는 게 뭐가 나쁜데?’ 이렇게 나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면, ‘부모 공경하면 좋지만 바쁜데 어떻게 공경해?’ 이렇게 반발을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명령하시면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그 재미, 거부하는 재미. 몰래 먹는 사과가 맛이 있다고 잠언에 나오지요. 사과 그냥 먹으면 그렇게 맛있는 것은 아닌데 숨겨놓고 몰래 먹으면 맛이 있어요.
자꾸 뭔가 내부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 배격하고 싶은 요소가 말씀이 와 닿는 순간 그때그때 마다 생기는 거예요. 평소에는 점잖게 있다가 뭔가를 하지 말라고 하면 재미삼아 그 명령을 어기고 위반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 있는 줄 아시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그 말씀에 대해서 싫어하고 배척한다는 것이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설교를 들어야 하고 강의를 들어야 하는가 하면, 말씀을 안 들으면 자신이 점잖은 사람이 되요.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교회를 안 나오시면 됩니다. 제가 오랜만에 좋은 말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는 순간부터 자신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 욕망만 추구하고 살고 있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지요. 평소에는 이런 마음을 감추지요.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경원했는가를 말씀이 와 부닥치는 순간 알게 됩니다. 새댁과 화장실은 멀리 있는 것이 좋다고 하지요.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세요. 예수님도 멀리 있을수록 좋은 분. 이렇게 예수님을 멀리 두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우리 마음자리에 예수님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봅시다. 이렇게 되어야 이해가 됩니다. 8장 1절에 “우상의 재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사도바울 당신이 뭔데 나를 간섭하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너나 잘해’ 이런 식의 마음이 발생하지요.
2절에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했으면,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이렇게 나오고.
3절에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고 하면, ‘이건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네’ 이렇게 나오지요.
4절에 “그러므로 우상의 재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뭐냐 하면, 우상이 없잖아요. 우상은 예초부터 없었고 신은 오직 하나님뿐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이 성립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상은 없지요? 그렇다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법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것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땅에 있는 사람들과 섞일 때, 어떻게 섞였느냐 하면 이런 식은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그게 없는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해. 하늘나라 말씀처럼 살아.’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인식과 그들의 문화를 그대로 다 가져옵니다. 다 가져와서 전부다 파 헤쳐 호작질(손장난)을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사람들이 나누지 못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아내가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지라고 하지요. 어떤 사람이 제게 메일을 보내서 묻기를 심히 걱정스러운 투로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나누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어요. 그 사람의 심정은 이해가 가요. 그런데 이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를 못했어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들이 이혼하면 갈라집니까? 힘센 강호동이 이 둘을 붙여 놓았는데 힘 약한 내가 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은 묻기를 ‘이혼하면 떨어지잖아요.’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이혼해서 떨어진다면 하나님이 참 어설프게 붙여놓으신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붙여 놓으신 것을 떼어 내지 못한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과 너희들이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는 논리와 구조에 그대로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서 ‘이러이러하니까 너희들은 엉터리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들면, “맹세한 것은 지키라”는 말씀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맹세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그런데 지킬 수 있나요? 사실 인간은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이 말씀은 맹세해놓고 못 지킨다고 두려워 떨 것이 아니라, 인간은 맹세해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도했다고 무엇이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TV가 고장이 나서 잘 안 나온다고 칩시다. 그런데 기도를 하고 다시 켜보니까 나왔어요. 그래서 기도 응답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오게 하셔서 나온 것뿐입니다. 내가 기도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과거의 모든 일을 이끌어주셔서 지금에 이른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현재는 감사하지 않고 “주님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많이 주시옵소서.” 이렇게 자꾸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기도하니까 마귀가 좋아해서 계속 더 많은 것들을 기도하게 하고 그런 것들에 빠져들도록 유혹합니다.
따라서 우상은 분명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현재 인간들이 매일같이 자기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징크스’라고 합니다. 혹은 ‘터부’라고 합니다. ‘나는 손톱 깎으니까 그날 일이 잘 안 되더라. 아침 첫 손님으로 여자가 오니까 그날 장사가 잘 안 되더라.’ 이렇게 스스로 자신이 법을 만들고 그러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한 분으로 다 주신 것인데 그 한 분을 누가 배격합니까? 우리가 배격하고, 내가 원하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신을 대신 만들고 그 신에게 매달리며 기도해서 스스로 위안과 평안을 느낍니다.
이렇게 자신이 의지하고 싶은 것은 만들고 그것에 기대를 거는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은 없는데 우리가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예들아 없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는 그래도 만들고 싶습니다.” 이렇게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8장 이해됩니까? 우상은 없는데 사람들은 우상의 재물을 안 먹으면 내 신앙이 더 수준 높은 것으로 생각해요.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우상은 없기에 우상 재물을 자유롭게 먹으면서 자기 신앙을 자랑하고. 이렇게 되니까 우상 재물을 먹는 것을 보면서 연약한 자가 낙심을 하게 만들고.
하나님은 아예 우상은 없다고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없는 우상을 누가 만들어 내는가를 지적합니다. 이렇게 없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 내부의 죄성이 아직도 자기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내는 있으나 마나, 돈도 있으나 마나, 우리 목숨도 있으나 마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해봐야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들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우리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들려도 우리는 듣지 않지요.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함께 있어서 우리를 십자가까지 인도하시는 그분께서 가끔은 내 계획, 내 야망이 의미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고 하여금 행복하게 만듭니다. ‘주신 것도 다 감사하지 못하면서 뭘 더 달라고 요구하는가.’ 이런 행위 자체가 오히려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얘가 우는데 감사의 마음이 있던가요? 오늘 대구에서 광주행 버스를 타고 오는데 뒤에 앉은 얘가 얼마나 울고 난리를 치는지 엄마가 미안해서 쩔쩔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얘를 보면서 감사의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안 나지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키운 아이는 남들에게 사랑받고 훌륭하다는 소리 들어야 하고, 이런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나는 훌륭한 엄마인데, 그 모든 것이 다 깨지니까 어떻게 감사의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인간은 자기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기도를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결국 우상숭배에 해당됩니다. 울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 울음을 그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 차가 목적지까지 가는데 4시간 걸렸는데 4시간 밖에 울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지요. 만약 그 차가 7시간 간다면 7시간 울었을지 누가 압니까? 그러니까 7시간 울지 않고 4시간만 운 것에 대해 감사해야지요.
얘가 울고 난리를 치는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가 나온다면 그것은 주님의 기적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혹시 그런 이상한 일이 발생하거든 주님의 기적인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짜증날 인인데 감사의 마음이 생기거든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8장 6-7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그러니까 교회 가운데 우상 섬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자가 있거든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 감사하란 말입니다. 그것을 나무라지 말고.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모든 것을 그분이 하시니까 이런 일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하게 했으니까 그것마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즉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까지도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9장을 봅시다. 4-5절에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권”이 뭡니까? 권리를 말하는데, 사도들에게도 형제들로부터 대접받고, 아내의 도움을 받고 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도와 비교했을 때 바울은 뭔가 다른 것이 있어요. 아내가 없어요. 그런데 이 아내를 갖는 것을 권리로 말하고 있는데, 다른 대접받는 권리와 같이 한 가지의 권리로 보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아내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물건 취급하듯 느껴질 수가 있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는, 우리가 이것을 나쁘다, 좋다 하기 전에 이 현재의 풍습과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들어와서 그것을 헤집고 다 부숴버립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
그러니까 고고한 문화가지고 비천한 문화를 나무라는 식이 아니고, 낮고 천한 것과 같이 합세를 해요. 사실 여자를 갖는 것이 무슨 권리입니까? 반대로 여자가 남자 가질 권리는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21세기 현재 우리들의 인식이고, 그 당시에는 여자는 남자가 불러주기만을 바라는 그러한 문화였습니다. 이런 문화를 나쁘다고 하지 않고, 그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바탕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에 수건을 써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21세기에는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이런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성경을 해석하면 어떤 것은 해석이 되는데 어떤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남지요.
성경을 보면서 그 당시의 상황에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은 오해를 했어요. 즉 하나님이 주신 문화가 따로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따라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를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1세기 문화이든 21세기 문화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문화를 인정한 것이 아니고 그 문화를 사용해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문화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가를. 9장 1절에 보면,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라고 했지요.
이 말씀은 어떤 특정 시대, 특정 문화에서 벗어난 자유가 아니고 앞으로 닥쳐올 어떤 문화에 대해서도 성도는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아내를 가질 때, 옵션이 마감이 되지요. “야, 사도답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도이기에 아내를 주셨구나. 하나님은 역시 사도정도의 사람은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었어.’ 라는 인식을 나쁘다고 보지 마시고, ‘사도가 아내 가지는 것이 정당해. 하지만 나의 자유는 얼마나 놀랍기에 정당한 권리마저 나는 초월했다.’ 이것이 자유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강대상에서 설교를 할 때는 양복을 입어야 해.’ 라고 말할 때, “틀렸어”라고 말하면 안 돼요. 교인 중 자신들은 어떤 복장을 해도 상관없는데 설교하는 목사는 양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억지로 자기 자유를 내세워 자유로운 복장을 고집하지 말고 연약한 자를 위해 더워도 양복을 입어야 합니다.
제가 옛날 박사교회 있을 때, 에어컨도 없이 여름에 설교를 하는데 성도들은 반팔 옷도 입고 가벼운 여름 복장을 하고 앉아 있었지만 저는 양복입고 땀을 흘리며 설교를 했습니다. 그럴 때, ‘왜 더운데 양복을 입고 설교해. 더우면 반팔 셔츠를 입으면 되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틀렸다는 말입니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수건 쓸 필요 없다. 이런 생각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에 쓴 사람에게 시험거리가 된단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유란 것은, 그냥 인정해 줍니다. 당신들이 어떤 문화를 가졌던 내가 인정한다. 아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만 나는 아내 없다. 너희들 보기에는 사도로서의 결격사유로 보이겠지만 내가 억지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결혼할 기회도 없었고, 특별히 같이 살고 싶은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냥 지내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또 사도바울은 생활비를 안 받았어요. 9장 7절에 보면,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9절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목사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은 목사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기 위해 목사를 먹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상당히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고, 상당히 기분 좋은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수혜자가 누구며, 피해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리 들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기분 좋으냐 나쁘냐를 초월하자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를 ‘자유’로 봐 달라는 것입니다. 아이쿠, 아까운 내 돈 나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왕 쓸 돈 복음 전하는 자를 위해 쓰자. 나를 위해 돈 쓰는 것이 정당합니다. 자녀를 위해 쓰고, 가족을 위해 쓰고. 그러나 복음을 위해 쓰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자유라는 마음이 안 드느냐는 말입니다.
마치 내가 자유롭게 자비량해서 복음 전하듯이, 너희들도 너희의 돈을 복음을 위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있지 아니한가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결국 정기적인 어떤 법이나 규칙에 얽매이는 것은 성도로써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얽매이지 아니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것도 아닙니다. 15절에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지상의 자유는 법의 구속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음을 말하지만, 사도가 말하는 자유는 너무나도 철두철미하게 얽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목숨마저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얽매여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지어다.
복음 전해야할 사명이 나에게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누가 생활비를 주니 안 주니 핑계되지 말고 자비량으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복음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복음 외의 다른 것들에는 너무나 자유롭지요. 너무 철저히 복음 위주이기 때문에 너무나 자유로운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무엇이 현실인지 몰라요. 무엇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현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 십자가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2순위 아니 3순위도 안 돼요. 그래놓고 자기가 만든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봅니다. 내가 진급해서 뭐가 되고, 내 아들이 공부해서 명문대 입학하고 이런 것들을 현실로 생각합니다.
진짜 현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 십자가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에 관심을 두는 자는 지옥 간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현실로 보는 사도바울이 미쳤다고 세상 법에 얽매입니까? 이런 너무도 선명한 현실이 있는데 엉뚱한 세상 규칙이나 관습 이런 것에 얽매여 복음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이것은 남이 알아준다고 전하고, 남이 싫어한다고 안 전하고 할 그런 문제가 아니지요. 목숨이 날아간다 할지라도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강력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현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이것은 바로 현실의 싸움입니다. 무엇이 현실인가? 하는. 그리고 이런 소명을 받은 자는 날마다 주님의 지시가 내려집니다. 그 지시 내용은 [주기도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라고 우기며 나오는 것은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가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뇌물을 주고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이번 거래를 성사시키라고 했다면, 혼자 기도하면서 이런 상상을 합니다. 나는 성도이기에 뇌물을 줄 수는 없어. 그래서 뇌물은 주지 않고 정당하게 찾아가서 설명을 하고 거래를 성사시켜야지. 하나님이 은총을 주셔서 이렇게 되면 상사도 나를 참 성도로 인정하고 다음부터는 뇌물 줘서 거래 성사시키라는 명령을 다시는 하지 않겠지.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 아니지요. 현실은 뇌물을 주기 싫은데 뇌물을 주고, 술도 같이 마시고 하면서 마음이 괴롭고 아프고, 그렇지만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해야 되고, 그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별로 거리끼는 마음도 없고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역시 나는 죄인이구 이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참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뇌물 줘서 거래 성사시키라는 직장 상사를 마귀라고 보지 마시고, 나를 인간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상황에서 감사가 나오고 찬양을 드릴 수가 있지요.
성경 해석 굉장히 쉽지요. 그동안 어려웠던 것은, 이 말씀 지켜서 내가 착한사람 되려고 하니까 성경 말씀이 어려운 거예요. 이처럼 내가 훌륭한 사람 되려는 생각에서 성경을 보면 어려운데, 이왕 버린 몸, 내 죄가 어느 정도인지 가볼 때까지 가보자. 나도 내가 어느 정도 악한 자인지 몰라.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면 참으로 말씀이 쉽게 깨달아 져요.
9장 19절 봅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이 대목은 정말 중요합니다. 교회가 이 구절을 몰라서 온갖 문제가 다 발생합니다.
제게 이런 말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목사님, 저 사람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서로 서로 다 저한테 고자질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사람보다 더 못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제일 정점에 이근호가 있고, 그 밑에 또 누가 있고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피라미드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제일 밑에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위에는 예수님이 계시지요. 사도바울의 생각은, 예수님께서 믿음을 주고 복음을 줬다면 심지어 복음을 안다는 나조차도 그 주신 복음과 믿음에 대해서 터치할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는 없고, 다만 어떤 사람은 5% 있고, 어떤 사람은 10% 있다면, 내가 5% 도와주면 그만이고, 10% 있다면 10% 도와주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 그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한 것이 누구입니까? 우상이 아닌 한 분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이 만약에 예수 잘 믿다가 화가 난다고 소주를 병체 마시고 교회 와서 행패를 부릴 때, 다른 사람이 “목사님, 보세요. 저 사람 복음도 없고 믿음도 모르니까 저런 행동하잖아요. 교회에서 쫓아냅시다.” 고 할 때, 목사는 “이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 분이 저런 행동을 보인 것은 우리 전부에게 뭔가 하나님께서 한 수 가르치시려고(너희들이 어떻게 나오는가 한 수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조용히 찾아가서 왜 술을 마시고 난리를 피웠는지 들어보고 그러면 됩니다.
이 분이 이런 일 후에 스스로 교회 안 나오면 어쩔 수 없고, 또 스스로 교회 찾아 나오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00교회 문제에 있어서 자칫하면 그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너는 신앙이 높고 대단히 많이 알고 우리는 그래 병신이다.’ 라고 오해를 할 소지가 있어요. 오해하는 것이야 본인의 자유니까 오해를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데, 다만 ‘그런 오해는 정당해’ 라고 나올 필요는 없어요.
내가 당신들에게 한 것은 오해를 하든 말든 나는 당신들을 돋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지 너는 못나고 나는 잘나고 그런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이게 바로 사도바울의 정신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정신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십자가에서 나왔습니다. 바울이 잘난 것이 없어요. 하지만 자신에게 은사가 주어졌는데 이것은 남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기꺼이 종이 될 수 있는 그 자유.
10분간만 쉽시다.
(2005. 10. 6. 8:4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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