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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9-3 / 9장 17-18절 / 05.9.23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9-3 / 9장 17-18절 / 05.9.23

정인순 2010. 10. 11. 13:31

광주강의 9-3  이근호 목사
녹취:서경수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923e.mp3


 

 9장 17-18절을 봅시다.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상이 무엇이냐?’고 물었기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술어부분에는 상은 이것隔? 이런 것이고 라는 말이 붙어 나옵니다.  그럼 뭐가 상입니까?  ‘값없이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면 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복음 전하게 된 것 자체가 상이예요.

그러니까 복음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복음 전한다는 것은 이미 상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심정이 바로 이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음 외에는 몰라요.  그에게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복음 모르면 지옥이고, 복음 알면 영생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후에 바울이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난 후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이런 바울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조롱했지요.  이런 평가에 대해 바울도 자신이 ‘미쳤다’고 긍정했습니다.  ‘그래, 나는 복음에 미쳤다.’ 라고.

24-75절을 봅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 대목은 교회 다니는 사람마다 헌신예배 때 목사들이 와서 하도 엉터리로 설교를 해서 쇠뇌가 되어(잘못 해석한 것에 물이 들어서) 제가 지금 이 부분을 해석하기가 겁이나요.  다 바꿔야 합니다.  

이 구절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유롭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자유가 뭐냐?  이것이 바로 ‘상’입니다.  마지막 때 면류관이 뭐냐 하면 이 ‘자유’인데, 만약 자유를 모른다면 하나님께 버려진 자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버림이 아니라 진짜 지옥 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유로우면 복음을 위해서 마음껏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여기에 얽매이고, 저기에 얽매이고 이렇게 되면 달음박질이 안 되잖아요.  달리기를 하는데 목표가 정해졌으면 그 방향을 향해 달려가면 그만인데, 옆에서 “고구마 먹고 가라, 밤 삶아 놓았는데 먹고 달려라, 목마른데 음료수 한 잔 마시고 가라” 이런 소리에 현혹되면 상 받을 수 없겠지요.

신앙인의 자유는 철저히 복음에 얽매인 것이기 때문에 복음 아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다른 것은 안 믿는다는 것을 전해한 믿음입니다.  아버지도 믿고 친구도 믿고 예수도 믿는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지요.  ‘나는 아버지도 안 믿고 엄마도 안 믿고 세상도 안 믿고 오직 예수만 믿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내용물이 담겨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방금 이야기한 이 자유로움 자체도 결국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너는 너 자신 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제가 열심히 목이 쉬도록 강의를 했는데 나중에 “목사님, 그것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걱정하는 분이 계신데, 이런 분이 없도록 사전에 조치하면서 강의를 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주께서 십자가 질 때 우리 죄를 다 가져가셨는데 그 죄가 어떤 것인가 하면, 바로 이런 말씀 앞에서 느끼는 우리의 감정(못 지키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는 이런 것)이 죄가 되어 그것마저도 십자가에서 다 해결을 했습니다.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씻어주셨기에 사도바울이 누리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것도 우리가 누리고 싶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누리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주님은 이런 차원에서 우리에게 적용시키고, 우리는 이 말씀 반대편으로 도망가고.  우리는 매일 도망치고 주님은 따라오시고.  우리가 아무리 도망쳐도 주님은 끝까지 따라오십니다.

10장에 들어가 봅시다.  
1-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다 같은”이란 말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집단 구원’인데, “다 같은 것”을 먹었지요.  그런데 이것을 놀랍게도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라는 것은 “너 세례 받았나?” “나 세례 안 받았다.”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세례는 몇 명이 세례 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세례 주시더냐 하는 점이 중요하거든요.

세례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같이 세례 받은 거예요.  왜냐하면 동일한 한 분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다 같이 받은 것입니다.

세례를 받게 되면 ‘다 같이’가 적용 되요.  그래서 여기에는 나와 타인이 비교나 경쟁할 필요조차 없는 그런 위치와 신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쓸데없이 옆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왜?  신령한 것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것을 다같이 동일하게(신령한 음료를) 마셨기 때문에 차이가 없고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분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다 같은 법칙이 적용되지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비로소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지요.

본문에서 광야 이야기가 나오는데,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세례를 받아놓고 모세에게 달라 들었어요.  이게 바로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까?  예수님께 세례를 받았지요.  예수님께 세례 받아놓고 누구한테 대듭니까?  노골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반항하지는 않지만, 환경이 왜 이렇습니까?  왜 저란 사람을 만나게 하셨습니까?  하면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주님을 원망하더란 말이지요. 이런 식의 태도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0절 봅시다.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여러분은 주님께 원망 안 했습니까?  매일같이 원망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멸망당해야 하겠네요?  당연히 멸망당해야지요.  이처럼 ‘멸망당해야 마땅하다’고 느끼는 것은, 멸망당할 자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런데 멸망 안 당할 사람에게는 ‘내가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그 공로를 깨닫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은 남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성경이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원망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라.’ 이렇게 입으로 천번 만번 외워보세요.  순간적으로 원망이 발생하는데.  

야고보서에 보면 마귀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어떻게 된 셈인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인이 없어요.  시시하게 보는 겁니다.  가룟 유다보다 더 못한 신앙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죽느냐 사느냐가 심각한 문제였는데, 요즘 교인들은 예수님이 죽어도 별로 심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어디에서 떠느냐 하면 아이 성적 떨어지면 떱니다.

결국 이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면 ‘나는 처음부터 구원될 자격도 없는 자인데도 주께서 구원 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나는 구원 될 자격도 없네.  그러면 나는 구원과 상관없네.  내 마음대로 살다가 지옥 갈란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잠시 잠깐이라도 십자가 은혜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없이, ‘원망하면 멸망한다고.  그럼 교회 때려치우자.  교회 가니까 원망하지 말라고 하고, 아무리 원망 안 하려고 해도 원망은 나오고 나는 안 되겠다.’ 라고 하면서 떠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사도바울 같은 고백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9:27)

감사가 없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늘 감사하라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고, 순간순간 감사가 찾아옵니다.

12절에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실 앉아도 조심해야 됩니다.  선자만 조심하는 것이 아니고, 넘어진 자도 조심해야 합니다.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완전한 시험은 뭡니까?  아까처럼 원망하는 사람.  광야에서 원망했던 사람은 완전한 멸망이지만, 성도는 이런 줄 알면서도 가끔은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요.  목자가 양인 나에게 붙어서 날마다 잔소리하고 있다는 것을 현실감 있게 느끼게 하는 그 순간이 왔을 때 그것이 바로 원망하는 시험이게 이기고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강의를 하면 어떤 사람은 시험을 벗어날 길을 찾느라고 난리를 피웁니다.  ‘주여, 벌써 3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시험에서 못 벗어났습니다.  내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이 사람은 시험에서 벗어나면 괜찮은 사람이 된다고 여겨요.  이렇게 되면 스스로 자신이 죄인 안 되려고 발버둥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주께서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면 죄인인줄 아세요.  목욕탕에 갔으면 탕에 몸을 푹 담가야지 뜨겁다고 발만 살짝 넣었다가 빼지 말고, 사람 죽으라고 뜨거운 물을 넣어 두었겠는가 하면서 좀 참고 몸을 담그면 그 가운데서 따뜻함을 느끼면서 시원함을 느낀단 말이지요.  

시험에서 벗어나려면 죄인이 죄 없는 척 하면 안 돼요.  ‘할 수 없다.  나는 이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하면서 푹 잠기면 주께서 이런 죄까지 사전에 미리 다 가져가신 십자가의 은총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행함의 차원이 아니고, 이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 주께서 벗어날 길을 주시는구나 하고 믿어라’는 것입니다.  이러나저러나 행함은 주님 앞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이 있는 이상은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고 가치 없는 것이기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14절에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우상은 없잖아요.  그런데 무슨 우상 숭배의 법이 나옵니까?  그것은 뭐냐?  아무리 이야기해도 인간은 우상을 만들어서 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망만 하는 죄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를 비참하게 다루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그것조차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낮아질 때 우리는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어떤 시험?  내가 훌륭하다는 시험.  내가 잘났다는 시험.  이런 것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은 자신을 쓰레기 취급했겠습니까.  

21절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이것은 그 당시의 문화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적 풍토의 조상숭배 문화가 있지요.  제사지내고, 추도식도 하고.

제가 이번에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면서 500여명 이상의 많은 손님을 접대 했습니다.  예전에는 상주들을 보면서 여러 사람들과 절하고 하면 얼마나 허리가 아프겠나 생각했는데, 실제로 절해보니까 하나도 안 아파요.  왜?  오는 사람마다 돈 들고 오니까, 오는 사람마다 3만원 혹은 5만원 내는데, 절 한번 하고 그 돈 챙기는데 왜 허리가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망자를 위해 절을 해요.  천주교 신자들도 절을 하는데, 세 번 절하는데 두 번은 완전히 절하고 마지막 한 번은 반 절을 합니다.  무슨 예법이 그런 것이 있는지?  원래 기독교인은 죽은 사람에게 절을 안 하잖아요.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절을 해요.  절을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천주교 신자들은 이런 미신이 퍼져있어요.  뭐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사흘 동안은 귀신이 안 돌아가고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미신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예수님 죽고 난후 바로 부활한 것이 아니고 사흘 동안 있다 가셨기에 사람이 죽으면 사흘은 죽은 것이 아니고 머물러 있기 때문에 절을 해도 괜찮다는 그런 천주교 내의 미신이 있어요.

그런데 남들이 다 절을 할 때에 뻣뻣이 서서 절 안 하는 사람 있습니까?  3일인지 4일인지 영혼이 머물고 그런 것은 모르고 남들이 절을 하니까 흉내라도 같이 내야 분위기가 살잖아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가 뭔지 모르지만 남들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성입니다.  이렇게 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약해요.  그래서 이 말씀의 성취는 누구의 소관입니까?  우리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면서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적용시켜서 이 말씀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야, 내가 진짜 귀신과 교제했구나.  다시는 안 해야지”  물론 이렇게 다짐을 해도 또 하겠지만, 어찌했건 그 순간만큼은 ‘이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거야’ 라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오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있는데, 그 때 고린도전서 10장 21절을 주께서 엘리베이터 타고 옆에서 심어주셨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이 살아계심은 죽은 문자의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목사가 백날 이야기해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찾아오시면 한 순간에 그 말씀에 사로잡혀 ‘내가 스스로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며 안간힘을 쓰는 것이 다 무의미하구나.  이제 그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맡겨야겠구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이 있지요.  ‘어디에 가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염려하지 말라.  성령께서 그 때 필요한 말씀을 너에게 하도록 하실 것이다.’

25절에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 말은 요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음식을 놓고 따지면서 먹고 말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8-29절에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여기 재미있는 말이,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라고 했지요.
타인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식하면 되지, 타인을 의식해서 잘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타인을 약 올리게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옷을 하나 사 입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제가 새 옷을 입은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본인은 행동이 갑자기 조심스러워 집니다.  옷은 좋은 것 입었는데 행동이 잘못되면 욕을 먹을까봐 자기가 스스로 자기 자존심 때문에 행동을 조심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 2시간 지났는데, 새 옷 입은 것을 남들이 모르면 그 때는 ‘예라 모르겠다.  내 마음대로 행동하자.’ 이렇게 됩니다.  

그처럼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남을 의식한다는 자체가 위선적인 행동이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편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되지요.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혼자서 괜히 복잡하게 계산을 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어요.  특히 부부사이에 그런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술 먹고 놀다가 집에 늦게 귀가하면서 아내가 틀림없이 화를 낼 텐데 어떻게 적당히 거짓말을 해서 화를 면할까 생각하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고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만들어서 몇 번 외우고 해서 집에 들어갔는데 아내는 잠들어 있어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도 아내는 아무 말이 없어요.  그래서 괜히 걱정이 되서 ‘어제 내게 늦게 왔는데’ 하면서 스스로 이실직고 하는데, 아내는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어서 남편이 늦게 온 것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우리는 자꾸 환상을 만들어내는데, 환상은 없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이 하신 작품만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 타인의 모든 것이 하나님 작품인데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하게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시장에 있는 모든 음식은 감사함으로 받아먹으면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먹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어떤 일도 감사할 것뿐인데, 사실 원망이 생기지요.  하지만 감사하도록 하시고 시험을 이기고 피할 길을 주시는 것은 누구의 몫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서 때를 따라 십자가 은혜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이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실 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조금만 더하고 진짜 마치겠습니다.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쳤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지금 자기밖에 모르는데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는 우리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라는 말씀을 줘야 우리가 내 자신을 위해 먹고 마시는 죄인이란 사실을 알지요.

주여 죄송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영광 위해 살았는데, 하나님 영광 위해 살라니 한 번도 그런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죄인인줄 깨닫게 되고, 이렇게 깨달을 때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구원을 얻게 하라’는 것은, 내가 전도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현재 있는 구원이 각자 갖고 있는 욕심 때문에 가려져 있거든요. 가려져 있을 때 위를 보고, 우리의 행동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세례 받게 하고 믿음을 주셨는가를 다시 한번 환기시켜서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관심 기울이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8, 9, 10장 강의를 정리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결국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 사도바울처럼 예수님 만나고 난 뒤부터는 모든 것이 예수님 홀로 다 하신 일인데, 우리가 평소에 살다보니 위의 세계, 넓은 세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 없는데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성령을 받고 한 세례를 받고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다시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자기의 토대와 뿌리에 대해서) 계기가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당신들의 정체는 바로 이것입니다.  아멘.  내가 왜 진작 못 깨달았지.  모든 것이 다 우상이고 모든 것이 감사할 거리인데 내가 왜 원망했지.  이렇게 나올 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셔서 성경말씀대로 성취시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울의 취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세상 사람들은 궁금해 하지도 않고 되는대로 삽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나는 내 밖에 모르는 고집쟁이고 완고한 사람이고 욕심쟁이지만 이런 가운데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심을, 죄를 다 청산해 주심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보니 너무 감사합니다.  그동안 지은 죄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큰 죄가 있지만 은혜가 죄보다 더 큰 것을 또한 깨닫게 해 주시니 이것도 감사합니다.  사나 죽으나,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 위해 사는 저희들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치겠습니다.

(2005. 10. 7. 10:4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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