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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을 정리해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확실하다면 현재 우리가 예수 믿고 있는 것이 없는 하나님을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구원하는 근거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데, 구원을 위해 살과 피 외에 다른 것은 여기에 끼어들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의 행함, 종교적 열정 이런 것을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제공하신 십자가의 살과 피로 영생을 확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들어온 것이 되는데, 영적인 세계가 되면 육만 현실이 아니고 영도 현실인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이 커지면 육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육이 커지면 영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외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시간에는, 그렇다면 이렇게 육적인 우리가 어떻게 구원이 확실하게 보장 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11장에서 조금 언급했는데 그것이 바로 ‘머리’입니다. 머리가 뭐냐? 머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섬기는 그 관계가 머리라고 했습니다. 이럴 때 나오는 현상이 뭐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머리를 머리로 제대로 섬길 때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이 인간의 자력으로 나옵니까? 절대로 안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성령에 의해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게 이뤄지게 하옵소서.’
그러나 우리같이 육적이고, 아무리 아버지의 뜻이 중요하다고 해도 돌아서면 광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고, 우리 대통령은 노무현이고 이것이 현실이지 이것 외의 현실은 없다고 하는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염려하지만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12장 13절을 봅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자’ 이런 차이는 육적 현실이지요? 육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 현실 맞습니다. 그리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것은 육입니까, 영의 세계입니까? 이것은 영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영의 세계를 원한다고 직업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런 모습은 아니지요? 직업을 가지세요. 의사를 하든지 판사를 하든지 백수가 되든지 원하는 일을 하세요. 그러나 운전사가 복 받았다고 판사 되는 것 아니고, 운전사는 운전사인체로 구원 받습니다. 파출부가 성령 받았다고 그 집 주인 되는 것이 아니고, 파출부는 파출부대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파출부냐, 주인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았는가를 묻습니다. 네가 영적인 사람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돼요. 직업 바꾼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교 갈 생각하지 마세요. 복음 아는 사람이 신학교 가면 학점 못 받아요. 왜? 신학교는 육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확인합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지요. 확인하는 방법은 21절에 나옵니다. 몸은 하나이기 때문에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육적이고 세상적인 차별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교회에 아침 9시부터 나와서 봉사하는 사람이 대단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거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 다 합니다. 물론 저나 다른 교인들은 걱정을 해요. 저분이 저렇게 일찍 와서 봉사하다가 다른 교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낙심해서 교회 안 나올까봐.
저희교회 성도들은 보통 11시 10분에 교회 나옵니다. 처음 저희교회 오시는 분은 10시 30분에 나와요. 일찍 와서 예배 준비도 하고 한다고. 그러다가 다른 교인들이 일찍 안 나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11시 정각에 나옵니다. 그러다가 시간 맞춰 나온다고 하다가 중간에 사소한 일이 생기고 해서 결국은 11시 10분에 나오게 됩니다.
왜 나는 허드렛일을 하느냐? 이런 생각 자체가 육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차별화 의식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차별한다는 것도 나쁘지만 차별을 느끼는 것도 나쁜 것입니다. 차별화를 의식하는 본인도 나빠요.
주님은 차별 없이 성령을 주셨건만(주님은 직업을 보지 않고 그냥 성령 주셨건만), 성령 받은 자들은 누가 더 좋은 성령이냐 차별화를 시켰다는 것은(나는 성령 받았는데 왜 내 직업은 여전히 천한 것입니까? 하고 따진다는 것은) 여전히 육적인 사람입니다.
이럴 경우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성경 말씀대로 하십니다. 나중 온 자가 먼저 온 자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초신자가 일찍 교회 와서 예배당 청소하고, 화장실 청소 하고 남들은 더럽고 귀찮다고 꺼리는 일을 혼자 즐겁게 주님 사모하는 마음으로 찬송하면서 봉사를 하지요. 주께서 이런 식으로 일하십니다. 이 초신자도 두 달 정도 다니면 기존 교인처럼 됩니다.
그 다음에 또 새로운 교인이 와서 기존 성도를 부끄럽게 만들고, 그 사람이 도 몇 개월 후에 기존 교인처럼 되고, 또 새 사람이 오고 ---
그래서 직분 제도가 문제가 있어요. 직분 제도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으면 그 직분을 반납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모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차별화를 느끼지 않을 경우에는 일단 주님을 사모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는 발인데 너는 눈이구나. 너는 내보다 낫다. 이런 차별 없이, 발이면 발, 눈이면 눈, 다 필요해서 주께서 주셨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런 마음이 사라지면 그 직분자는 직분을 반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직분 반납하는 사람이 없어요. 목사부터 아무도 내 놓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직분 내 놓으라고 할 수 없어요. 잘못하면 직분 내 놓은 것으로 ‘겸손한 자’라고 또 그것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분은 자기고 있으되 직분 없을 때처럼 겸손하게 살라고 권면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늘 목사님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내 교회는 없다는 생각으로 강단에 서 달라.’ 고 당부를 합니다. 내 소유의 교회는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지금 강단에 서는 것은 이번만 설교해 달라고 교인들이 요청한 것이라 여기고 설교 끝나면 떠난다는 생각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 교회를 잘 꾸려서 이끌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교회를 소유한 것이 되고, 여기서부터 자기 업적이 피어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사모되는 것이 아니고 내 교회가 사모의 대상이 되면서 점점 악마의 하수인이 됩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모하면 교회에서 나가라고 해도 “예”하고 미련 없이 짐을 챙깁니다. 대구 00교회에서 목사 한 분은 추천해달라고 제게 요청을 했어요. 전임 목사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처음 교회 개척할 때 그 목사가 몇 천만원 돈을 내 놓았어요. 그리고 그 돈 일부로 땅을 샀어요. 그런데 땅 값이 갑자기 올랐어요. 그렇게 되니까 목사가 땅 값 오른 것만큼은 자기가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이미 교회 헌금한 것은 내 놓을 수 없다고 하니까 목사가 소송을 제기했어요. 만약 그 땅 값이 내렸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목사가 내린 만큼 채워 넣겠습니까?
여기 계신 목사님들은 투자한 돈도 없고, 내 놓을 돈도 없고 마음 편하지요?
그래서 제가 그런 사람을 목사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교회라고 생각한 교인들이 문제라고 했어요.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해서, 제가 “일단 노회 탈퇴하고, 복음 아는 목사 부르세요.” 하니까 그것도 못해요. 노회 탈퇴하면 이단 되는 줄 알고 겁이 나서. 그래서 그들이 내 놓은 의견은 같은 교단에 소속된 복음 아는 목사 왔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것이 고린도전서 12, 13장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어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교회가 있고 거기에서 생활비가 나온다는 것을 현실로 생각해요. 그것은 육인데, 이것을 현실의 전부로 생각해요. 영은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이 영이에요. 주님만 사모하는데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면 그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나가면 그것이 영인데, 영을 현실로 안 보고 예초부터 ‘내 교회다. 돈 내 놔라.’ 이것만 현실로 본 거예요.
어떤 분은 ‘목사가 그럴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해요. 목사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려고 목사 된 거예요. 예수님 사모해서 목사 된 것이 아니고, 목사 직분으로 밥 먹고 살려고 목사 된 거예요.
그런 인간들이 고린도전서 12장을 가르쳤다면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여러분, 은사 받았는데 왜 안 섬깁니까? 시간 받치고 돈 받치고 다 드리세요.” 분명히 이런 식으로 설교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은사 받은 사람이고, 은사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다.’ ‘가르치는 사람을 배나 존경하라고 했으니 목사인 나를 섬기세요.’ 이런 설교 했을 것입니다.
제가 좀 전에 말씀 드렸지요. ‘어떤 사람을 볼 때 그냥 보지 말고 영적으로 보라’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 그 남편이 예수님을 머리로 생각하는 남편만 복종하라.’고
제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부담을 주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차별화가 여러분에게 더 부담을 줍니다. 현실적인 차별화. 왜 나는 이 모양, 이 골이냐 하는 현실적 차별화를 느끼는 것이 주님의 사랑을 감소시키고, 사랑을 무색케 하고, 주님은 자기 피까지 내 놓았는데 우리는 그 피 받고는 ‘흥 이까짓 피’ 하면서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하고 나옵니다.
주님은 자기 생명을 버렸는데 그 생명은 뒷전이고 자기 인생 책임지라고 대드는 식이란 말이지요.
대구에서 교회사 강의 하면서 ‘다빈치 코드’ 이야기했어요.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는데 그 딸 이름이 ‘사라’입니다. 이 딸을 12살 될 때까지 이집트에서 키우다가 그 후 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이사해서 어떤 왕족과 결혼해서 프랑크 왕족의 가문으로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졌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어디 있습니까? ‘사라’라는 딸에게 이어졌고, 프랑크 왕족으로 계속 이어지겠지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은 쉬워요. 이 왕조를 믿으면 예수님 피를 믿는 것이 돼요. 그들에게 예수님의 피가 이어지고 있으니까.
이 엄청난 비밀이 너무 중요하니까 교회가 핍박해서 소멸되었는데, 최고의 비밀 조직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사실을 알고 ‘모나리자’를 그렸는데, 이 여자가 웃고 있지요. 그 웃음의 의미가 ‘나는 비밀을 다 알고 있지. 교회는 가짜고 예수님은 결혼에서 딸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이른 차원에서 웃고 있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12제자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예수님의 옆에 있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 내용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가 하면, 이런 이야기는 영적이 아니지요. 육적이잖아요. 인간들에게는 육만이 현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이 아시고 십자가에서 죽는 현실, 육적인 현실 속에 복음을 감춰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의 육신이 죽은 그 자체가 영적인 것입니다. 해탈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죽음 자체에 비밀이 있어요. 그분이 죽으신 그 효능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저의 책 [히브리서의 혼2]가 곧 출판되는데, 책 제목을 출판사에서는 ‘건방진 인간’으로 정하자고 했어요. 이것이 설교 제목 가운데 있는데, 저는 그 제목 말고 ‘보이지 않는 용서’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지요.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용서합니다.
그런데 세상 교회들은 자꾸 보이는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보이는 축복은 육적이에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밖에 안 됩니다. 이것은 악마가 준 것이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닌데,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용서하지 보이는 축복이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용서에 기대를 걸고 가는 것이 신앙이 아닌가 해서 저는 ‘보이지 않는 용서’라는 제목을 원했는데 채택이 될지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건방진 인간’이란 제목은 너무 건방져 보이잖아요?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모든 각양 좋은 물품들은 큰 성 바벨론에 다 모입니다. 그런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각양 좋은 것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왕따 당하지요. 그런데21장에 보면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확실하거든 영적인 세계가 분명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이 영적 세계는 세상이 주는 차별화를 초월해야 합니다. ‘너는 잘났는데 나는 이게 뭐냐?’ 이러지 말고, 이런 의식 없이 예수님이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그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분을 보는 것처럼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입니다.
우리나라 유행가 가사의 80%가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TV 드라마도 80% 이상이 사랑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즘은 ‘출생에 비밀’이 왜 그리 많은지? 이런 것이 과연 사랑이냐? 이것은 다 육적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이것이 사랑입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 이것이 누구의 속성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아버지께 가졌던 그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온유했고,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했고, 질투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고향이 하늘나라 인데. 세상 것이 뭐가 부럽다고 ‘아버지 세상 것 왜 안 주십니까?’ 그런 질투심을 왜 가지겠습니까?
예수님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예수님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예수님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
방금 제가 ‘사랑’의 자리에 전부다 ‘예수님’을 넣었지요? 왜냐 하면, 사랑이란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다가 예수님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10절의 “온전한 것”이 뭡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강의의 핵심이 뭔가 물으신다면 ‘예수님을 사모하세요. 이게 또 하나의 확실한 현실입니다.’ 뭘 보고 믿을까요? ‘십자가에 누가 죽으셨는가를 보고 믿으세요. 어떤 사나이가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피 흘리신 예수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자신을 작게 생각하고, 우리 처지를 작게 생각하고, 그런 처지 가운데 차별 없이 값없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은혜가 크게 보이는 그런 생활로 일관할 수 있는 남은 생애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5. 11. 5. 11:0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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