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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9-1 / 05.9.23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9-1 / 05.9.23

정인순 2010. 10. 11. 13:29

광주 강의 9-1(2005. 9. 23) 이근호 목사

녹취:서경수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923a.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923b.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923c.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923.hwp

 


 

 첫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라는 성경이 나오게 된 것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 책(편지)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대할 때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이 본문을 우리가 함부로 해석할 수 없고, 막 대할 수가 없다는 것都求?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이 먼저 있었고, 그 뒤에 이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기 때문에(하나님의 계시가 나왔기 때문에) 고린도전서를 이해하려면 십자가 사건을 거쳐서 본문을 이해해야 됩니다.  

만약 십자가 사건을 거치지 않고 고린도전서에 다가서게 되면 결국 그 말씀을 행함으로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성경을 율법적으로 보는 윤리, 도덕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행동 강령에 해당되는 책이 되고 맙니다.

지금 대다수의 한국 교회가 십자가가 빠진 상태에서 고린도전서를 접근하는데 이렇게 되면 결국은 교회 내에서 누가 이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많이 실천해 왔는가 하는 경쟁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교회 갈 때, 그 교회가 자기를 사랑해 주고 아껴주고 관심 가져주고 하면 사람은 그 집단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어디 가서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대우를 받고 가치를 인정받을 때 사는 보람을 느끼며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아라는 주체는 더욱더 포기를 못하고 강화되고 자아가 자기 생각의 전부를 점령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아가 강력해지고 크게 느껴지고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십자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본인이 가졌던 그러한 자의식 이었습니다.  그러했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남으로 말미암아 “내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였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고린도전서도 없었고, 후서도 없었고, 로마서도 없었습니다.  그냥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믿음으로 은혜롭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 자체가 바로 자기 속에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엄청난 죄가 자기 주체를 통해서 발산된다는 사실을 예수님 만난 후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한 후에 나온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린도전서를 보기 전에 십자가 사건을 경유해서 본문을 봐야 바른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십자가 사건은,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저주 받음으로써 우리 죄를 남김없이 다 처리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란 우리 죄를 전부다 가져가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다 처리함을 받아서 정죄함이 없이 이제는 죄 없고 의롭게 되었다고 인정받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제가 좀 전에 이야기했듯이 고린도전서는 이 십자가 사건의 바탕 위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자체가 십자가 사건을 대변해 주고 있는 글인데 이렇게 고린도전서를 보게 되면 이 안에서 뭐가 나올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죄가 나오겠지요.  

십자가 사건이 있고 난 후에 고린도전서가 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우리 죄를 전부다 몽땅 가져가서 처리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의 어떠한 죄를 가져갔는지를 모르지요.  모르는데 고린도전서를 비롯한 십자가 사건 이후에 나온 성경을 통해서 “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 이러한 죄를 다 가져가셨구나.” 하는 것을 밝혀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볼 때는 이러한 죄까지 있었구나 하는 것을 더욱더 많이 알게, 넓게 알게 되어 감사하다는 취지로 이 성경을 봐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잘남이라든지, 자신의 주체가 강화된다든지 하는 생각은 싹 가시고 이러한 죄까지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처리하셨구나 하는 주님에 대한 감사가 매 구절구절 읽을 때마다 나오게 되겠지요.

주님께서 하신 모든 공로에 대해서 오직 그분께만 영광 돌리고, 찬양하는 그러한 참다운 성도의 모습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이야기했고, 그것이 고린도전서, 로마서 전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죄인인가,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십자가 사건의 내막이 이런 성경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고린도전서 8, 9, 10장을 공부할 텐데, 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 사건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할 것은,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은 사건입니다.  이것은 성경 곳곳에 나오는데 두 군데만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27:46절에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구절과 로마서 8: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데(버리시는데), 내어 주실 때에 그냥 예수님만 오신 것이 아니고 은사라는 것이 동반해서 아드님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은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버림받았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지요.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일 이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이런 은사를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그 은사 속에 우리가 함께 놓여있기 때문에 그 은사를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버림받음 속에 계속 놓여 있어서 평생을 두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그러한 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죄,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계속 거두당하는 신세가 되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만이 하나님께 은사를 받아 구원 받은 자가 된다는 이러한 놀라운 방정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엘리베이터를 하나 그린다면 이 엘리베이터는 위에서 아래로 계속 떨어집니다.  이렇게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떨어지게 하는 힘(이 엘리베이터 안에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은 위에서 밀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엘리베이터 제일 밑바닥에서 나옵니다.

이 엘리베이터 제일 밑바닥에는 뭐가 있느냐 하는 그 문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이 어디까지 버림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빌립보서 2장에 나옵니다.  6-8절 말씀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는데 어디까지 낮추느냐 하면,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종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더불어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고 계속 추락을 하고 있는 성도가 어디 까지 떨어져야 되는가 하면, 십자가가 무엇이냐 하는데 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떨어져야 합니다.

그 떨어져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고, 그 죄에 대해서 우리가 아직도 몰라요.  그런데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보게 되면 ‘아, 이런 이런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에 대한 거부가 우리에게서 계속 나오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러한 죄로 인하여 정말 주님의 마지막까지 낮추었던 십자가 까지 하나님의 저주를 실감하게 마련입니다.

사람 속에 십자가 사건이 유발하게 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용서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용서가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 배격하는 그런 욕구 같은 것이 우리 속에서 계속 나옵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 다릅니다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말씀에 대해서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유발했습니다.  

이러한 죄성은 마하슬루 라는 심리학자에 의하면 사람의 욕망을 10단계로 나누었어요.  제일 낮은 단계가 뭐냐 하면, ‘생존유지의 욕구’라고 해서 이것은 그의 짐승과 같은 수준인데, 배고프면 먹고 싶어 하고, 잠이 오면 잠자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말릴 수 없다는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인데, 자신의 욕구를 자기의 정신이나 이성으로 저지할 수가 없어요.  이처럼 인간은 자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욕망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마하슬루의 욕구 중 제일 끝의 욕구가 뭐냐 하면, ‘자아실현의 욕구’인데,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말 그대로 하면, 신처럼 자아가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것인데,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자아가 누구인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정도 실현되어야 자아가 실현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아실현의 욕구’라는 것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지 못해요.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주님과 함께 타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그 십자가 죽음까지 우리가 가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어느 정도의 죄가 우리에게서 계속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도대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죄의 전부가 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도무지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죄를 계속 안다는 것은, 그런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버림받게 하신 그 은사가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 작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과거에는 우리가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점점 더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서 터져 나오는 죄를 볼 때에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도 안 되고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릴 때는 모르는데, 20대 30대 가면 갈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만 철저히 챙기는 이기적인 인간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 고린도전서를 대하면서 이런 말씀을 우리 내부에서 계속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게 되지요.  

방금 제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십자가까지 계속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죄 때문에 버림받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 말고 또 한 가지 요소는 ‘구원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계속 버림 받게 되면 그러면 그것으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계속 주님과 함께 버림받는 가운데 엘리베이터 안에 지금 우리가 버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있는가 하면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양이 되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과 함께 엮어진 그 관계 자체가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세상 교회에서는 구원을 시간관계를 생각해서 ‘몇 년 전에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  그러면 앞으로 내가 50년 더 산다면 그 사이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행동에 나서야 그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데--

제가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의 행위는 욕망에서 나왔고 그 욕망에서 나온 행위는 어떤 것을 해도 다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관해서는 행위로 구원 받는 행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이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은 십자가 안에서 당겨지는 그 은사에 의해서 자신의 행위는 성경 말씀으로 비춰 볼 때 전부 죄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모든 행위는 죄가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행위가 아니고, 그런 행동을 하는 내 곁에 목자 되신 주님이 함께 있다는 이 자체가 믿어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믿어지게 되면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버림받는 가운데서도 그 상태는 구원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 행함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죄뿐이고, 그렇게 말씀으로 죄를 깨닫게 만드는 그 능력은 바로 십자가에서 당겨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 죄를 다 가져가서 대신 처리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은사로 주어진 이상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죄가 계속 발각되면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나를 위한 것밖에 되지 않는데, 그렇게 나를 위해 행동하는 그 옆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이 자체가 이것은 행함 관계가 아니고 놀라운 은사에 의한 믿음의 관계지요.  그러니까 이점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나올 것이 뭐냐, 감사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죄고, 이런 행동 하고 있는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는 것을 확증시켜 주는 것으로 삼으니까 더욱더 십자가의 피에 대해서 감사와 고마움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지요.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자기 욕망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가져간 죄를 깊이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 은혜에 대해서 고마움과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주님의 이름이 약속대로 벌이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일관된 약속 성취에 의해서 주어진 사랑인 것을 알고 우리 이름이나 노력, 공로조차 주님께 넘기게 되지요.

이것은 믿음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믿음이나 감사 같은 것은 결과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우리의 의도적인 행위와는 상관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행위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행위에 의해 나온 열매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인데 주님의 포도나무 때문에 생기는 그 열매.  이것은 우리 행함의 차원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엮여져 있다는, 얽혀 있다는, 연결되어 있다는 하나의 증거물로서 열매로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가 우리가 앞으로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면서 계속 나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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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독자적 노선이 성화론이냐 하면 만약 독자적으로 하지 않고 주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천국 간다면 이것은 인간 성화론이 아니고 누구의 성화론이냐 하면 함께 계신 성령님의 성화론입니다.

내가 만약 [비타 500] 뚜껑을 따는 이것이 힘든 것인데 했다면, 이 영광은 누가에게 돌아갑니까?  “야, 그 어려운 것을 했으니까 하신 분이 누구지요?  아이쿠 목사님이 하셨습니까?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되면 내가 거룩하고 내가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나 성화론에서 내가 훌륭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훌륭하셔서 인도한다, 성경께서 [비타 500]의 뚜껑을 땄다고 한다면 그 영광은 성령께서 받잖아요.  그러면 누가 거룩한 분입니까?  성령님이 거룩하지요.  그러면 이것은 개인의 성화론이 아니고 성령님의 성화론이 되니까 성화론 자체가 있을 수 없지요.  이러나저러나 성화론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이 [복음의 회복]이란 책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가 성화론을 말하는 것은 내 잘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로 된 것을 말한다.”고 하거든요.  주의 은혜로 한 것이라면 하나님 성화론이지 인간 성화론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성화될 필요 없어요. 원래 거룩한 분이예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성화론을 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만약 본인이 스스로 자기 머리를 깎았으면 “참, 머리 예쁘게 잘 깎으셨네요.”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지만, 대신 누가 깎아 주었다면 머리 깎인 사람한테 “훌륭하게 머리 깎았네요.” 이런 소리 하면 안 되지요.

우리는 머리 깎이는 입장에 있고 모든 영광은 목자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교인)는 이런 꼴입니다.
교  인: 하나님 정말 훌륭하십니다.
하나님: 나는 원래부터 훌륭했어.
교  인: 하나님은 갈수록 더 훌륭하십니다.
하나님: 이놈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처음부터 완벽했어.

하나님이 어디 점진적으로 성화됩니까?  하나님이 부족하고 모자란 분이었는데 차츰 좋아져서 온전한 하나님이 되었습니까?

이러나저러나 성화론을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이들이 성화론을 고집하는 것은, “잘난 목사 나를 본받아서, 내 행위의 근처에라도 와야 천국을 꿈꿀 수 있다.  시킨 대로 해라.” 하고 자신에게 종속시키려고 하는 짓입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 유지를 위해 돈이 필요하고,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일군들이 필요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이것도 모르고 순진해서, “나는 언제 성화되어서 우리 훌륭한 목사님처럼 되어 복을 받을까?” 하면서 시키는 대로 따라 해요.

이렇게 간단한 논리도 모르잖아요.
구원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행함은 빠집니다.  꼭 행함을 거론하려면 목자의 행함, 예수님의 행함 때문에 구원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함이 어떤 행함이냐 하면 요한복음 6장 37-38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 다시 살리는 이것”(39절)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뭐가 나옵니까?  목자다운 행위가 나올 것 아닙니까?  그 행위가 나밖에 모르는 행위를 덮치는데 이 내 행위에 예수님의 행위가 덮쳐오는 이 관계를 구원관계라고 합니다.  이런 관계에 있을 때 구원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나를 품어서, 이것을 “예수 안”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될 때 이것이 구원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인간 행위에서 구원을 찾으려면 그것은 반칙입니다.

구원 문제를 거론하려거든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겠습니까?” 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이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행하셨는데 그것을 내가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이렇게 되면 또 다시 인간의 행함이 들어오게 됩니다.  내 밖에서는 예수님이 행하고, 내 안에는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렇게 되면 내가 받아들이는 행위가 첨가되어야 구원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구원론이 인식론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이 인식론은 10분 쉬었다가 계속 해 봅시다.

(2005. 9. 28. 10:10 녹취 마침)